[글 제목은 이동순 시인의 시집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가짜 뉴스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너무나 그럴 듯해서 속는 경우도 있고, 특히, 유투브라는 플랫폼을 타는 상당수 ‘●●●TV’들의 범람과 활동이 이런 어지러운 질주에 속도를 더하고 있다. 비단 유투브만이 아니고 인터넷 환경에는 이미 빅데이터를 활용한 맞춤형 서비스가 일상이 되었다. 특정 네티즌의 관심사가 반영된 검색 환경이 제공되는 것이다. 각종 인터넷쇼핑몰은 말할 것도 없다. 해당 영상을 올린 매체(게시자)를 ‘구독’하지 않아도 한두 차례 본 영상들에 대한 흔적(기록)이 저장되고 분류되어 그것과 관련된 영상들이 첫 화면에 ‘메인’으로 노출되어 유사한 주제의 관련 영상들을 자주 보게 되는 ‘쏠림’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흐르면 단편적인 앎에 머물지 않고 교양의 ‘깊이’를 더하는 데 더없이 좋은 도구가 될 것이나, 악성 루머가 휘발성이 더 강하듯이, 정보의 진위도 문제지만 그러한 정보의 쏠림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고,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악을 잉태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아는 것이 힘이다.’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이 남긴 말이다. 그는 영국 경험론이라고 부르는 유파의 시조가 된 사람이다. 베이컨은 연역, 즉 일반화된 법칙에서 개별의 결론을 추론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오히려 오류를 야기하기 쉽고, 올바른 지식은 항상 실험과 관찰이라는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해서 생기는 오류, 베이컨은 경계해야 할 네 가지 유형의 ‘우상’을 제시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동굴의 우상(개인 경험에 의한 우성)은, 각 개인의 고유하고 특수한 본성이나 자신이 받은 교육과 타인과의 교류에 의해서 생기는 우상을 동굴의 우상이라고 명명했다. 자신이 받은 교육과 경험이라는 편협한 범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단정해버리는 오류로 한마디로 ‘독선’이다. 다음은 시장의 우상(전문轉聞의 의한 우상)이다. 언어의 부적절한 사용으로 생기는 우상,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다. ‘전해들은 말’을 진실이라고 믿고 현혹되는 것. 한마디로 거짓말인데, 오늘날 ‘가짜뉴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미리 ‘경계’한 듯하다. 극장의 우상(권위에 의한 우상)은 저명한 이의 주장 등 권위와 전통을 아무런 비판 없이 믿는 데서 생겨난 ‘편견‘을 뜻한다. TV나 신문에 등장하는 전문가의 주장은 무조건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인데, 오늘날은 이러한 ’미디어의 우상‘에서 특히 자유롭지 않다. 또 하나, 종족의 우상(자연 성질에 대한 우상)은 인간이란 종족이 가진 한계성 때문에 ‘착각’하는 것으로, 앞선 네 가지 우상들에 우선하기도 하고, 이 때문에 이러한 우상들에서 쉽게 빠져들고 쉽게 헤치고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이상은 최근에 발간된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라는 책의 40번째 ‘도구’, <오해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우상> 편을 요약하면서 필자의 ‘의견’을 덧붙인 것이다.  일본 저자인 야마구치 슈(지은이)의 저작을 번역한 책(김윤경 옮김, 다산초당(다산북스), 2019. 01.)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이 18년 동안 유배지에 머물며 집필한 책들 상당수가 제자들과 협업한 ‘편저’이고 보면, 그 정신을 계승한다는 면에서 이 출판사(다산초당)의 정체성에도 맞는다고 해야 할까? 넓게 두루 살피면서 핵심을 뽑아내는 것도 그렇고, ‘실시간’의 세계를 읽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는 책이다.

특히, 오래전에 읽고서 잊고서 지내던 철학자의 세계를 상기(想起)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내게는 베이컨의 제시한 ‘우상’에 관한 기억이 그랬다. 그리고 앞서 정리한 대목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가짜뉴스’가 극성을 부르는 최근 상황에 대한 ‘경계(警戒)’가 맞춤한 것처럼 정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앞서 거론하였거니와 특히, 유투브 시청의 쏠림 현상 때문에 시청자들은 우물 안에 갇혀(동굴의 우상),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폐해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전 대통령 전두환 씨가 광주광역시의 법원까지 ‘강제구인’되어 재판정에 섰거니와, 진상규명과 인정 ‘투쟁’을 거쳐 이미 국립묘지까지 조성되어 안장된 5.18 희생자와 유족들을 모욕하는 세력들의 ‘준동’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때다.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그들을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다. 어쨌든 가짜뉴스와 유투브의 시청시의 편향성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더욱'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싶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이동순 시인이 있다. 이 시인의 제5시집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된 해는 1992년 봄이었다.(알라딘에 ‘품절’로 분류된다) 앞서의 현상들을  ‘이것 참 문젤세’하며 지켜보면서 떠올린 시집이다. 이 시집의 표제시가 동명의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이다. 시집들이 모인 서가에서 오랜 만에 이 시집을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와, 검색을 통해 모처럼 시를 읽었다.(인용한 시에 오탈자가 있다면 책을 찾은 다음에 수정할 계획이다)  

“저 풀꽃들은/ 어디서 아침을 맞지/ 어떤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지// 밤비에 젖어/ 글썽이는 속눈썹으로/ 그들은 함초롬히 실눈도 떠볼 거야// 사랑아 어둠 속에서/ 깊이 뿌리를 박고 선 풀꽃의 아침처럼/ 흩어질 듯 맺혀 있는 내 사랑아// 마음이 아픈 풀꽃은/ 어떤 표정을 짓지/ 궂은 비 나리는 가을 저녁// 풀꽃의 아랫도리가/ 서늘하게 젖어올 때면/ 저절로 알게 될꺼야// 풀꽃 언저리에/ 송글송글 맺혀 동그마니/ 작은 어깨를 떨고 있는 이술방울// 두 볼이 서서히/ 다갈색으로 물들어가는/ 저 가을 들판의 수줍음을//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시 전문. 

 

이제 이 시를 읽으려면 도서관에 가거나 이동순 시선집 『숲의 정신』(산지니, 2010)을 구매해야 할 것 같다. 시의 내용과 제목을 연결 짓기가 좀 낯설다고 할까,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이고, 설명이 간단치 않으며 길어질 것이다. 때문에 이 시집이 출간되었을 때 한 신문의 ‘출간단신’으로 대체할까 한다. 단지 이 한 편의 시만이 아니라 이 시집에 수록된 상당수의 시들이 던지는 메시지가 표제시로 압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동순 시집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 "이제 세상은 어느 틈에 `어리석은 지혜자'의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한탄하는 이시인은 삶의 가난함, 고통으로 얼룩진 민족의 역사, 그러한 것들이 뒤엉켜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정황을 담백하게, 그러나 읽는 이의 가슴에 쓸쓸함이 깃들게 하는 어조로 노래한다.”

사법농단으로 마음을 놓고 재판을 받을 수 있나, 의구심이 커지는 요즈음 주목하는 책 한 권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다. <수사학>은 『정치학』과 뗄 수 없는 관계일 뿐 아니라 『시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저자는 수사학에서 이미 언급한 부분들이 있어 <시학>을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을 (원전)번역한 천병희의 『수사학/시학』을 제1원전번역(텍스트)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안보-군사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전략가들에게 국내외를 막론하고 오래된 전쟁 교과서 역할을 하듯이, <수사학>은 정치인(연설), 법조인, 그리고 작가에게 필독 교과서 중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변론을 하거나(변호사) 기소장을 쓰거나(검사) 판결문을 내는데(판사), <수사학>은 참으로 쓸모가 많은 책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연설문을 작성하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 함으로써 ‘그런 것으로 여기게’ 하는데 노하우를 집대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던가! 기왕 가짜뉴스로 대중들의 마음을 현혹하는 일을 일처럼 일로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정독하여 노하우를 습득하시기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를 때라고 하지 않는가, 완벽에 가까운 거짓말은 작품이 되어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니까. KBS1의 <저널리즘 토크쇼J>를 꾸준히 보는데, 가짜뉴스를 비롯하여 특정 언론들의 무소불위의 횡포를 견제하는 몇몇 착한 콘텐츠들이 언론인의 자정과 자성의 메시지를 생산하고 있어 다행이다. 이런 프로그램의 애시청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힉>을 꼭 챙겨 읽기를 바란다. 보다 깊이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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