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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켠 티브이에서 박지윤 아나운서와 패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토론 주제는 결혼 5년 차, 두 아이의 엄마이자 여러 프로그램 MC로 활발하게 활동중인 박지윤 아나운서가 내놓은 안건, 일도 아이도 포기 못 하는 나, 비정상인가요?”였다.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절대적이기에 엄마의 커리어를 포기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시각부터 일을 포기하고 불행해하는 엄마보다 일도 육아도 열심히 행복하게 하는 엄마가 낫다는 엄마 중심적인 의견, 아이의 아빠보다 수입이 더 많으면 일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현실적인 접근까지, 각자의 경험과 문화에 따른 다양한 생각이 오고 갔다. 보고 있자니 슬슬 화가 났다. 왜 엄마라는 역할과 여성의 직업이 토론거리가 되어야 할까? 도대체 왜 이것이 고민거리가 되어야 하는 걸까?

 

열받긴 해도 육아와 커리어는 나 또한 항상 고민하는 문제다. 당장이라도 구직에 성공하여 원하는 일을 실컷 하고 싶으면서도, 막상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육아가 걱정이 된다. 친정엄마에게 아기를 맡기기는 죄송하고, 시댁은 멀고, 보육 기관에 보내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고, 베이비시터를 두자니 비용이 적잖이 부담스럽다. 한창 엄마를 찾을 시기에 아기를 두고 반나절 이상을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육아에 전념하자니 한 해가 가고, 또 두 해가 가다보면 영영 사회 진출이 막히는 건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지금 당장 취업에 성공한 것도 아니면서 언제, 어디서, 어느 정도의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일지 고민이 된다.

육아와 커리어라는 두 마리 토끼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요즘, 나는 종종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1841~95)를 떠올린다. 그녀는 대학시절 여성과 예술이라는 강의에서 처음 알게 된 화가이다. 이 수업에서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 화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특히 베르트 모리조의 <요람>을 제일 좋아했다.

 

일과 육아 두 마리 토끼를 잡았던 화가, 모리조

 

<요람>은 파리에서 있었던 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걸린 유일한 여성 화가의 그림이었다. 작품에서 보이는 파스텔 톤의 색감이나 다소 거친 마무리 등과 같은 특징은 당대 파리의 인상주의자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베르트 모리조, <요람>, 1872

 

다만, 소재는 사뭇 다르다. 남성 인상주의 화가들이 도시화되어가는 파리의 모습이나 도시인의 여가 생활, 또는 여성의 누드를 주로 그린 데 반해, 모리조는 대개 가정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화폭에 담았다.

 

<요람> 역시 그녀의 언니인 에드마가 갓 태어난 딸 블랑시를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여성 작가 특유의 소재로 보이지만, 이는 사실 19세기 프랑스 사회가 암묵적으로 여성 화가에게 부여했던 제약을 극복하는 그녀 나름의 방법이었다.

 

모리조는 로코코의 거장 프라고나르의 증손녀로 어릴 때부터 심도 깊은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인상주의 그룹전에도 유일한 여성 멤버로 참가하여 많은 양의 작품을 남긴 화가이다. 그녀는 1세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새로이 발굴, 남녀 불평등을 극복한 인생의 롤모델이었다.

 

화가의 언니로 남은 에드마

 

그런데 요즘 나는 모리조가 아닌 <요람>의 모델, 에드마 쪽에 시선이 간다. 동생인 모리조와 함께 미술 수업을 받았고,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지만, 결혼과 출산 이후 예술가로서의 삶을 접었다는 에드마. 이십대 초반의 내 눈에 에드마는 한심해 보였다. 자기 일을 그만둔 그녀는 의지도, 열정도 없다고 생각했다.

 

베르트 모르조, <화가의 언니: 에드마 퐁티용 부인>, 1871

 

그런데 지금의 나는 온갖 상상을 더해서라도 이십대의 나로부터 에드마를 변호하고 싶다. 어쩌면 에드마는 자기 일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 남편의 이해나 주변의 협조를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리조의 남편 외젠 마네-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는 그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대신 아기에게 젖을 물려주는 유모도 있었다.) 에드마는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다시 붓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연이은 임신으로 다시 그림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후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들의 연민 어린 시선과 달리 에드마는 더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에드마보다 모리조 같은 삶을 꿈꾼다. 일도 육아도 전부 잘하고 싶은 욕심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렇지만 더이상 모리조의 삶이 위대하고 에드마의 삶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삶의 가치는 꼭 눈에 보이는 성취나 업적에 있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또한 이제는 여성마다 추구하는 바가 모두 다를 수 있다는 여성 안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각자의 최선이 있다

 

이십대 초반의 나는, 모리조의 작품을 보며 그녀처럼 일과 가정에서 모두 성공하는 멋진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요즘 그 다짐을 지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육아와 커리어, 분명 이 두 가지는 양립 가능하다고 배웠는데 실전에서 자꾸 부딪친다. 능력의 문제인지, 사회를 좀더 탓해도 되는 것인지. 더 이를 악물고 덤벼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제 적당히 해야 하는 건지. 예전에는 확신했던 문제들에 지금은 그다지 자신이 없다.

 

내 주변, 아이를 낳은 친구들은 모두 고민한다. 더러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기도 했고 더러는 더 공부하겠다는 계획을 접기도 했다. 아이를 조금만 키워놓고 다시 일을 갖기를 꿈꾸기도 하고 동시에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의심도 한다. 어찌어찌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경우에도 육아와 일을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남들처럼 아이를 위해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루에도 여러 번 고심한다. 나 역시 내 일에 대해 어디까지 욕심을 내고 얼마만큼 타협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마 정답은 없을 것이다. 아니, 무수히 많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거다. 각자의 상황과 성향, 가족의 형편에 따라 최선이라는 것은 모두 다를 테니 말이다. 답이 많은 만큼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그 답을 줄 수 없는 만큼, 고민은 더 깊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지금의 이런 고민을 돌아보며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오리라 믿고 싶다.

모리조와 같은 삶을 살게 되든지 에드마와 같은 삶을 살게 되든지 상관없이, 나중에 나의 딸이 지금의 나와 같은 시간을 지날 때,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고민들은 충분히 값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간절히 바란다. 내 딸이 살게 될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그래서 우리의 딸들은 더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기를. 당연히 꿈을 꾸고 이룰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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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요즘 매일 읽어달라고 들고 오는 책은 레오 리오니의 저마다 제 색깔이다. 환경에 따라 색이 바뀌는 카멜레온이 초록색 앵무새처럼, 빨간 금붕어처럼, 회색 코끼리처럼 그리고 분홍색 돼지처럼 자기 고유의 색을 갖고 싶어하는 이야기다.

 

돌쟁이 아기가 이런 철학적인 내용을 이해할 리는 없다. 내용에 감명받는 쪽은 오히려 엄마인 나다. 요즘 나도 종종 내 색깔을,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십대의 나는 취향과 취미가 뚜렷한, 색깔이 나름 선명한 사람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은 나를 핫핑크 같은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었는데, 요즘 나는 핑크는커녕 아무 색도 없는 진짜 그냥 아줌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종종 우울하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나조차도 헷갈린다. 나의 모든 기호보다 아기의 필요가 우선이다보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가물가물해졌다.

 

아기가 어린 지금이야 당연히 나 자신보다는 아기가 먼저여야 한다고들 하지만 이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면, 어느새 엄마아닌 는 정말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가끔 겁이 난다.

 

페미니스트 작가 나오미 울프에 따르면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여성이 임신을 하면 자신의 무덤을 팠다고 한다. 그리고 출산 후 40일까지도 여성이 살아 있으면 파놓았던 무덤을 다시 흙으로 메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료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한 지금은 다른가. 출산은 여전히 생사를 가르는 일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임신과 실제적 죽음을 밀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학자 오나 도나스가 엄마됨을 후회함에서 말하듯이, 오늘날에도 엄마가 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죽음이다. 출산을 하면서 탄생하는 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너무도 강렬하여 예전 그 누구의 엄마도 아닌 사람으로서의 나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내가 사라지는 느낌, 그리고 그에 대한 두려움. 초보 엄마라면 한번쯤 느꼈을 감정 아닐까.

 

나라는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 같을 때 나는 화가들, 특히 여성 화가들의 자화상을 떠올린다. 작품이라는 것은 소재를 불문하고 작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주제나 양식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화가의 성격을 반영하지만, 자화상만큼 그린 이의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장르는 없다.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끈질기게 지켜냈던 렘브란트, 반 고흐, 프리다 칼로, 베르트 모리조 등 상당수의 화가들이 많은 자화상을 남겼는데 최근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림은 헬레네 스키예르벡(Helene Schjerfbeck, 1862~1946)이라는 핀란드 여성화가의 것이었다.

 

한 여성으로서의 자화상들

 

1884년에 그린 스키예르벡의 자화상에서 그녀의 젊은 패기가 느껴진다. 정면을 응시하는 푸른색의 눈과 꼭 다문 입술이 다부지다.

    

헬레네 스키예르벡, <자화상>, 1884-85

 

이것은 스키예르벡이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의 초기작이다. 이제 막 미술의 중심지 파리에 도착하여 화가로서의 꿈을 펼치겠다는 의지가 이목구비의 정확한 묘사, 배경마저 여러 번 덧칠하여 그리는 정성, 그리고 정면을 또렷하게 응시하는 도전적인 자세에서 드러난다.

 

평생 동안 스키예르벡은 4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그 작품들은 시기별로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던 무렵에는 사실적인 표현이 주를 이루었고, 핀란드로 돌아온 후에 그린 <검은 배경의 자화상>은 한결 단순명료해졌다.

 

 

헬레네 스키예르벡, <자화상(검은 배경의 자화상>, 1915

 

아카데믹한 느낌은 모두 사라졌고 절제된 색채와 군더더기 하나 없는 형태만 남았다. 몇 가지 색 면으로 이루어진 표면, 곳곳에서 보이는 툭툭 내리그은 선, 특유의 내리깐 눈 등에서 스키예르벡이 그녀만의 스타일을 확립했음을 알 수 있다.

 

말년에 스키예르벡의 자화상은 한번 더 변했다.

    

헬레네 스키예르벡, <자화상(늙은 자화상)>, 1945

 

스키예르벡만의 느낌은 남아 있지만 단단한 색면이 사라지고 드로잉적인 면이 부각되었다. 어찌 보면 뭉크의 그림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을 곧 떠날 화가의 모습 같기도 하다.

 

이렇게 그녀의 자화상은 외모도, 화풍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변화했다. 한 인간의 변화를 마치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그녀의 자화상은, 삶은 곧 변화라는 진리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나만의 자화상을 만든다

 

인생의 굵직한 변화를 맞을 때마다 다른 스타일의 자화상을 선보인 스키예르벡의 모습은 왠지 나에게 용기를 준다. 나 역시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맞아 나의 그 무엇이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지만, 사실은 나도 그녀처럼 새로운 스타일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중이 아닐, 예전의 색, 이전의 나를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이 과도기여서 그런 게 아닐까, 실은 좀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스키예르벡의 자화상이 초기보다 중기가 더 그녀답고, 더 매력적인 것처럼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는 엄마들이 새롭게 그리는 자화상도 그럴 수 있으리라 위안해본다.

 

다시 동화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카멜레온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카멜레온이 불변의 색을 갖게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는 색이 변한다. 녹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또 노란색으로. 그런데 그는 책의 초반부와 달리 행복하다. 그가 변화를 수긍하며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또다른 카멜레온을 만났기 때문이다. 책의 중반부에서 카멜레온은 다른 카멜레온과 함께 이동하고 함께 몸 색깔의 변화를 체험한다. 그러면서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에 더이상 불만을 품지 않게 되었다.

 

찬찬히 동화책을 보다가, 나도 카멜레온처럼 변화를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 역시 육체적, 정신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아이도 매일매일 자란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비로소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 흰 점의 붉은 버섯 위에서 색의 변화를 마음껏 즐기는 카멜레온의 미소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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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하나와 거실만으로 이루어졌던 우리의 신혼집에서 거실은 매우 중요했다. 그곳은 책상과 책장이 있는 나의 공부방이기도 했고 남편과 함께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휴식처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SNS에 육아 용품으로 점령당한 선배 엄마들의 거실 사진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의 거실만큼은 반드시 부부의 성역으로 지키겠다는 결심을 누구보다 확고하게 했더랬다. 알록달록한 장난감은 절대 사지 않겠다는 다짐도 하고 덩치 큰 육아용품은 들이지 않겠다는 나름의 원칙도 세웠다.

 

그런데 이 모든 결심은 아기가 태어나면서 무참히 깨졌다. 5분이라도 엄마를 쉴 수 있게 한다면 물건의 색이나 크기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심지어 아기는 물건이 알록달록할수록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족이 가장 많이 생활하는 곳이 거실이니 아기도 거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아기 매트, 기저귀, 장난감, 담요 등이 그렇게 거실에 자연스레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서 거실의 정중앙을 차지하던 내 책상과 책장은 갈 곳을 잃었다. 어디 마땅히 둘 데도 없어서 중고시장에 팔아버렸고 절대 버릴 수 없는 컴퓨터와 책들은 식탁 한 귀퉁이에 몰아두었다.

 

점차 줄어드는 내 공간을 보자니 마치 출산 전의 내 자신이 점차 없어지는 것 같고, 씁쓸했다. 점점 집의 주인은 아기가 되어가는 것만 같아, 좁아진 나의 공간을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위태로운 의자 위의 여인

 

윤석남(1939~)<의자 위의 여인>은 제목 그대로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버려진 나무 판과 버려진 의자로 만든 작품이다.

  

작품 앞에서 윤석남 작가

 

윤석남, <의자 위의 여인>, 1994

 

작품에서 의자 위에 걸터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어딘지 불편해보인다. 휴식을 취하고 싶어 눈을 감았지만 얼굴에는 어두움과 피로가 묻어 있다. 생기라고는 하나 없는 모습이다. 윤석남 작가는 이 여인의 형상이 젊은 시절의 자기 모습이라 설명했다. 결혼 후 윤석남의 집에는 그녀의 방이 없었다. 대다수의 여성이 그렇듯 그녀의 공간은 부엌이었다. 주부에게 부엌은 밥을 준비하고 치우는 노동의 공간이다. 게다가 부엌은 개인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가족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언제든지 들락거릴 수 있는 개방된 공동 소유의 공간이다.

 

주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집안에 자신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삶에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상징한다고 윤석남은 말한다. 그리고 본인 역시 당시에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등,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회고한다.

 

<의자 위의 여인>에는 작가의 이런 경험과 고민이 녹아 있다. 나무 위에 채색된 여인은 따라서 윤석남 자신의 자화상이자 그녀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여인들의 초상이다.

 

당당한 여자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똑같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이지만,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그린 그녀에게서는 힘과 자신감이 느껴진다. 이 여인은 피카소와 마티스 등 미술사 거장들의 발굴자이자 후원자, 그리고 비평가이자 작가였던 현대 여성의 어머니’,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미국의 스타인 가문은 프랑스로 이주하여 미술 컬렉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파블로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1905~06

 

특히 거트루드 스타인이 피카소 작품을 지속적으로 구매한 것은 아방가르드 미술의 왕좌에 마티스를 제치고 피카소를 앉히는 데 큰 공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 속에서 스타인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앞을 쏘아보고 있다. 무슨 말이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씰룩이고 이제 못 참겠다는 듯이 일어서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대상을 단순화시켜 단단하게 표현한 방법과 더불어 검정과 암갈색 등의 무거운 색채가 스타인의 당당함과 위엄을 부각시킨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스타인의 성격을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스타인의 방에서 스타인과 피카소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다. 스타인은 모델이 된 여인 아드리아나를 너무 섹슈얼하게만 그렸다며 피카소의 그림 <목욕하는 여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데, 이 작품을 그렸던 1928년에 피카소는 이미 스타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모두의 칭송을 받는 화가 앞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거침없는 혹평을 해대는. 보통 여성과 다른 스타인의 성격이 잘 나타난다.

 

실제로 스타인은 자신의 방에서 미술과 문학 작품에 대해서 언제나 자신 있게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피카소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을 그린 것은 1906년으로 그녀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럼에도 피카소는 스타인의 거침없는 성격을 간파했던 것 같다.

 

무엇이 그렇게 스타인을 자신 있게 만들었을까.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누구 하나 부럽지 않은 재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가 아닌, 그녀 자신으로만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피카소의 이 그림은 무수한 명작으로 둘러싸인 그녀의 공간, 스타인의 아틀리에에 걸려 있었다.

 

다시 찾을 나만의 공간

 

집에서 아내가, 또 엄마가 자신의 공간을 따로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정된 면적 안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필요를 채워야 하기에 주부의 공간은 가장 먼저 양보되기 십상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더욱 그렇다. 잠자리마저 아이와 나누어 써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뭐든지 결핍될수록 욕구는 커지는 법이다. 내 공간에 대한 필요도 자꾸만 커져간다. 이사를 가면 새집에는 꼭 나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리라 다짐해본다. 집안 어느 구석에라도 꼭 나의 몸과 영혼이 쉬는 공간을 마련할 거다. 넓지 않아도 괜찮다. 의자 하나와 작은 테이블만으로도 충분하다.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 펜 한 자루, 메모지, 책 몇 권 그리고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 하나를 올려둘 거다.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고, 글도 써볼 테다. 정작 그곳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못하더라도 내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충족된 느낌이 들 것 같다.

 

엄마여도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나의 공간은 분명히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은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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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과 육아를 불편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다룬 프랑스 영화 <해피 이벤트>(2011)에서는 이제 막 엄마가 된 주인공 바바라가 두려운 마음을 안고 아기와의 일상을 시작한다.

그녀의 하루를 보면 헬육아라는 말이 실감난다.

 

밥을 먹으려고 전자레인지를 돌리는 순간 아기는 울기 시작한다. 편히 자고 싶어도 침대에 눕히면 엄마가 돌아서자마자 우는 아기를 혼자 둘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바바라는 24시간 아기와 밀착된 생활을 한다. 아기를 안고 밥을 먹고, 아기와 한 침대에서 자고, 아기와 같이 욕조에 들어가 몸을 씻는다. 그녀가 자기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한 톨도 없다. 그녀의 지도교수는 9개월 안에 논문을 끝내면 조교수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렇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시간은 꿈도 꿀 수 없다. 논문은커녕 커피 한 잔만이라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바바라의 대사처럼 아이와의 하루는 분명 행복하고 충만하다. 그렇지만 숨쉴 틈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결국 그녀의 스트레스는 폭발하고 만다.

 

 

 

집에 있다고 내가 내 시간이 있는 줄 알아? 친구 만나러 외출한 지도 1년이나 되었어. 그것도 몰랐지?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남편에게 잔뜩 퍼부어대고 그녀는 부엌 귀퉁이에 쪼그려 한참을 흐느껴 운다. 그리고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고 친정으로 떠난다.

 

영화를 보며 나는 그녀의 심정에 너무나 공감했다. 나 또한 아이를 낳고 나서 나만의 시간이 절실해졌다. 아이를 챙기고 집안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다 가 있다. 밤에 자리에 누워 돌아보면 나를 위해 보낸 시간을 꼽아보기 어려워 마음이 공허해진다. 집에 아이를 봐줄 사람이 누구라도 있는 날에는 화장실에 자주 가곤 했다. 조금이라도 혼자 있고 싶어서. 그리고 상상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조용히 밥을 먹고 혼자 종일 뒹굴거리며 책도 보는,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을.

 

누구에게나, 당연히 엄마에게도 조용한 곳에서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시간.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히 혼자가 되는 그런 시간 말이다.

 

 

마음이 머무는 공간, 스카이 스페이스

 

혼자만의 시간이 몹시도 고플 때 나는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1943~)의 작품을 떠올린다. 미국 캘리포니아 태생인 제임스 터렐은 형광등과 같은 인공 광원을 주재료로 한 설치 작품들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다. 미술에서 늘 조연을 담당하던 이라는 소재를 주연으로 끌어올렸다는 점과 과학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동시에 전달한다는 점에서 미술계의 주목을 끌었다. 작업 초기에 인공의 빛을 다루던 터렐은 점차 자연의 빛으로 관심을 확장하였고, 여러 종류의 빛을 다루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빛의 작가라는 멋진 별명을 얻었다.

 

미술사적 설명은 구구절절하지만 그의 설치 작업은 단순하다. <스카이 스페이스>는 그저 하얀 색의 방이다.

 

 

제임스 터렐, <스카이 스페이스>, 2012

  

  

방안에는 오직 관람자를 위한 벤치만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천장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다. 작품의 관람 방법 또한 간단하다. 작품 안에 앉아서 (또는 서서) 천장에 있는 타원형의 구멍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면 된다.

 

마음이 머무는 시간만큼 방안에서 하늘의 변화와 구름의 이동을 관찰한다. 바람을 느끼고 빛을 쐬는 동안 관람자는 마음과 머리가 차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소란스러운 일상에서 잠시 빠져나와 가만히 조용한 시간을 가지며 깊은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것이다. 터렐의 작품들은 이처럼 관람자에게 고요하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하는데, 이는 명상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믿음을 가진 퀘이커 교도였던 부모님의 영향 때문이다.

 

하늘 풍경화 야머스 피어 속에 앉아서

 

터렐이 관람자로 하여금 하늘을 올려다보게 한다면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6)은 자신이 직접 하늘을 보고 묘사했던 화가이다. 대지주의 아들이었던 컨스터블은 아버지의 소유지를 배경으로 한 전원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그의 풍경화에는 하늘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존 컨스터블, <야머스 피어>, 1822

 

그저 보기 좋은 그림처럼 보이지만 그의 풍경화는 미술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화가가 야외로 이젤을 들고 나가 풍경을 직접 보고 그렸다는 점 때문이다. 관념 속의 자연을 그리는 것이 관습이었던 그 시절, 화가가 밖에 앉아 실제 자연을 관찰하며 작품을 그린다는 것은 하나의 혁신이었고, 후에 인상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컨스터블은 현대 미술사의 흐름에서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림을 보면 유유자적 하늘이나 올려다보는 여유로운 시대였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컨스터블이 활동했던 시기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한창인 때였다. 사회는 정신없이 빨리 변했고, 컨스터블의 고향인 영국이나 그보다 먼저 그를 인정했던 프랑스에서도 산업혁명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컨스터블이 풍경화에 몰두한 이유도, 프랑스인들이 그의 전원 풍경화에 열광했던 이유도, 여유 없이 바삐 돌아가던 산업혁명의 한가운데에서 잠시 하늘을 보며 쉬어가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가만히 멈춰서 하늘을 보았던 컨스터블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의 내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인생에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들, 이런 날일수록 하늘을 볼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뛰어넘는 진리인가보다.

 

 

오직 나만 생각할 것

 

정신과 전문의들은 엄마들도 자기 시간을 사수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내 몸이 충분히 쉬기 위해서는 아이 없이 혼자인 상태가 되어야 하고, 마음이 충분히 쉬기 위해서는 아이와 상관없이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한마디로 아이와 똑 떨어져 있는 시간이 엄마 자신과 건강한 육아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해피 이벤트>의 결말은 이런 의미에서 큰 울림을 준다. 자기 시간을 갖겠다며 떠나버린 여주인공이 딱히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친정 엄마와 차를 마시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고, 엄마 옆에 누워서 잠을 자고, 친구와 함께 외출하는 것 정도의 소소한 일들이다. (사실 주변에서 도와준다면 아기를 키우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굳이 특별한 일을 꼽자면 하나 있기는 하다.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서 하이데거니 니체니 하는 자신의 전공 서적들을 한참 쏘아보다가 그동안 준비해온 논문을 컴퓨터에서 영구 삭제한 것이다. 수많은 철학서들을 읽었지만, 우리 삶에서 중요하다는 그 이론들이 정작 현실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었다는 깨달음(?)을 그녀는 얻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녀는 해피 이벤트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는 바바라가 커피숍에서 아기와 남편을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바바라는 너무 보고 싶었어. 못 본 지 1년은 된 것 같아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기를 품에 안는다. 그러고 남편에게 말한다. “우리 이제 이야기를 해보자.” 자기 시간을 가지면, 마음과 생각이 정리되고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아기에게 한번 더 웃어주고 아기의 짜증을 한번 더 받아줄 여유 말이다. 그리고 덤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남편과의 관계를 개선해보고자 하는 의지마저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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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강한 인상을 남긴 몇 편의 영화 중에 왕샤오슈아이 감독의 <나날들冬春的日子>(1993)이라는 작품이 있다.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토리가 재미있다거나 장면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좋은 이유에서가 아니다.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지겨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나날들>에서는 별것 없는 초짜 예술가 부부의 반복되는 일상을 보여준다. 총 상영시간 80분 동안 기승전결 구조를 갖춘 스토리 하나 없이 밥 먹고, 그림 그리고, 빨래하고, 친구 만나고, 잠자는 따위의 소소한 일들이 반복된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젊은이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는 의미, 이 영화가 이후 중국 언더그라운드 영화에 디딤돌이 되었다는 영화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지겨워서 보는 내내 주리를 틀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 영화가 떠오른 것은 영화만큼이나 최근의 내 삶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져서다. 오늘도 또 육아 전쟁이구나 싶어 한숨이 나오는 아침, 아기 울음소리에 신경이 유독 예민해지는 오후, 말똥말똥한 아기에게 제발 더 자라고 짜증이 버럭 나는 밤이 요 며칠 지속되었다. 육아 권태기가 찾아온 거다.

 

영화 <나날들>이나 나의 나날들이 지루한 것은 바로 반복때문이다. 하루에도 별 특별할 것 없는 똑같은 일이 수차례 반복되고, 그 하루가 계속 되풀이된다. 물론, 영화 속 예술가들도 현실 속 엄마도 바쁜 하루를 보낸다. 특히 엄마의 매일은 쉬는 시간도 하나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바쁜 업무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노동의 양, 리듬, 강도를 조정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타인(아기)에게 있다는 것도 문제다.

 

변화 없는 일과가 계속되면 어느 순간 권태가 찾아온다. 육아에도 권태를 느낀다고 하면 엄마 자격이 없는 것 같이 들리겠지만, 누구든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일을 계속하면 지루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엄마도 예외는 아니다.

 

고되지만 지루한 다림질하는 여인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가 그린 <다림질하는 여인들>에도 반복되는 매일을 지겹고 피곤해하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에드가 드가, <다림질하는 여인들>, 1884~86

 

 

파리가 한창 활기찬 도시의 모습으로 단장하고 있을 때 좁고 어두운 세탁실에서 다림질하고 있는 여인들이다. 작품 속의 한 여인은 잠까지 잔뜩 오는지 뒷목을 잡은 채 하품을 하고 있다. 매일 같은 곳에서 똑같은 단순노동을 하려니 하품이 쩍쩍 나오도록 지루할 수밖에 없다. 고단함과 지루함이 그림에 잔뜩 묻어 있다.

 

이 세탁부들은 한가해서 권태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당시 파리에서 세탁부의 일은 고되고, 바쁘고, 많았다. 그러나 치열함 속에도 권태는 끼어든다.

 

다림질하는 여인이 무료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빨랫감 옆에 놓인 압생트다. 파리의 많은 노동자들이 즐겨 찾던 싸구려 술. 우리나라로 치면 소주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한 번 다림질하고, 목을 축이고, 또 다리미를 밀고. 압생트를 마시는 것은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을 달래주는 그들 나름의 방법이었다.

 

무심히 빛나는 Day Light

 

작가 나빈(1983~)의 그림에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들어 있다. 그녀는 우리의 하루 중 한 순간을 포착하여 그림을 그린다. <Day Light>에는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거실 한편에서 빨래를 말리고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나빈, <Day Light>, 2014

    

 

빨래를 하고 말리는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일과의 한 부분이지만, 어째 나빈의 그림에는 지루함이라는 단어보다 평안함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것은 그녀가 사용한 빛나는 노란색 때문이다. 햇빛을 머금은 것처럼 밝은 노랑의 빨랫감이 탁탁 털어져서 가지런히 널려 있는 모양새,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의 느낌,

 

또 작품을 시원하게 만드는 빛나는 노랑과 시원한 파랑의 대조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산뜻하게 만든다. 작가의 이름 나빈은 아름다울 에 빛날 을 써서 아름다운 빛이라는 뜻인데, 작가의 이름과 빛으로 충만한 작품이 참 잘 어울린다.

 

나빈의 그림을 보면 일상이란 이렇게 찬란한 것이구나하는 긍정적인 생각이 든다. 별일 없는 우리의 일상이, 실은 그녀의 작품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아기에게 젖병을 물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의 오늘도 그렇지 않을까? 다만 우리는 늘 그 공간 안에 있어서 일상의 찬란함을 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만의 육아 권태기 처방전

 

육아 권태기를 보내며 권태기 극복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은 보통 권태기에 빠진 연인들에게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라고 추천한다. 육아 권태기도 비슷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몇 가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았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역시 쇼핑. 가장 지겹게 느껴졌던 몇 가지 물건을 새로 샀다.

 

낡은 옷을 정리하고 아이와 나의 새 실내복을 마련했다. 하루에도 아이에게 수차례 읽어주어 나도 아이도 지겨워진 동화책을 대신할 새 책도 몇 권 샀다. 여기에 더해 한동안 듣지 않던 음악을 틀어놓거나 새로운 산책로를 개발한다거나 옆 동네 놀이터를 방문하는 것 따위의 일들도 시도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가구 배치도 새로이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지겨워 죽겠다는 그 느낌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새 물건들이나 새로운 일과보다는 오히려 시간의 힘 덕분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버텨내야 하는 지겨운 시간을 새로운 무언가로 채우는 것은 꽤 괜찮은 권태기 극복 방법인 것 같다.

 

육아는 앞으로도 쉬지 않고 계속될 테고 권태는 분명 슬그머니 또 찾아올 거다. 잠깐 모든 걸 정지시키고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도 들 테고 아이가 커갈수록 더 자주 무기력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나만의 육아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개발해두면 좋겠다. 운동이든 꽃꽂이든 독서든, 뭐라도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고 삶에 활력을 줄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해두는 거다. 그러면 또다시 부정적인 감정이 찾아왔을 때, 멋지게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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