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요즘 매일 읽어달라고 들고 오는 책은 레오 리오니의 저마다 제 색깔이다. 환경에 따라 색이 바뀌는 카멜레온이 초록색 앵무새처럼, 빨간 금붕어처럼, 회색 코끼리처럼 그리고 분홍색 돼지처럼 자기 고유의 색을 갖고 싶어하는 이야기다.

 

돌쟁이 아기가 이런 철학적인 내용을 이해할 리는 없다. 내용에 감명받는 쪽은 오히려 엄마인 나다. 요즘 나도 종종 내 색깔을,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십대의 나는 취향과 취미가 뚜렷한, 색깔이 나름 선명한 사람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은 나를 핫핑크 같은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었는데, 요즘 나는 핑크는커녕 아무 색도 없는 진짜 그냥 아줌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종종 우울하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나조차도 헷갈린다. 나의 모든 기호보다 아기의 필요가 우선이다보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가물가물해졌다.

 

아기가 어린 지금이야 당연히 나 자신보다는 아기가 먼저여야 한다고들 하지만 이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면, 어느새 엄마아닌 는 정말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가끔 겁이 난다.

 

페미니스트 작가 나오미 울프에 따르면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여성이 임신을 하면 자신의 무덤을 팠다고 한다. 그리고 출산 후 40일까지도 여성이 살아 있으면 파놓았던 무덤을 다시 흙으로 메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료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한 지금은 다른가. 출산은 여전히 생사를 가르는 일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임신과 실제적 죽음을 밀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학자 오나 도나스가 엄마됨을 후회함에서 말하듯이, 오늘날에도 엄마가 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죽음이다. 출산을 하면서 탄생하는 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너무도 강렬하여 예전 그 누구의 엄마도 아닌 사람으로서의 나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내가 사라지는 느낌, 그리고 그에 대한 두려움. 초보 엄마라면 한번쯤 느꼈을 감정 아닐까.

 

나라는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 같을 때 나는 화가들, 특히 여성 화가들의 자화상을 떠올린다. 작품이라는 것은 소재를 불문하고 작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주제나 양식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화가의 성격을 반영하지만, 자화상만큼 그린 이의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장르는 없다.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끈질기게 지켜냈던 렘브란트, 반 고흐, 프리다 칼로, 베르트 모리조 등 상당수의 화가들이 많은 자화상을 남겼는데 최근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림은 헬레네 스키예르벡(Helene Schjerfbeck, 1862~1946)이라는 핀란드 여성화가의 것이었다.

 

한 여성으로서의 자화상들

 

1884년에 그린 스키예르벡의 자화상에서 그녀의 젊은 패기가 느껴진다. 정면을 응시하는 푸른색의 눈과 꼭 다문 입술이 다부지다.

    

헬레네 스키예르벡, <자화상>, 1884-85

 

이것은 스키예르벡이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의 초기작이다. 이제 막 미술의 중심지 파리에 도착하여 화가로서의 꿈을 펼치겠다는 의지가 이목구비의 정확한 묘사, 배경마저 여러 번 덧칠하여 그리는 정성, 그리고 정면을 또렷하게 응시하는 도전적인 자세에서 드러난다.

 

평생 동안 스키예르벡은 4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그 작품들은 시기별로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던 무렵에는 사실적인 표현이 주를 이루었고, 핀란드로 돌아온 후에 그린 <검은 배경의 자화상>은 한결 단순명료해졌다.

 

 

헬레네 스키예르벡, <자화상(검은 배경의 자화상>, 1915

 

아카데믹한 느낌은 모두 사라졌고 절제된 색채와 군더더기 하나 없는 형태만 남았다. 몇 가지 색 면으로 이루어진 표면, 곳곳에서 보이는 툭툭 내리그은 선, 특유의 내리깐 눈 등에서 스키예르벡이 그녀만의 스타일을 확립했음을 알 수 있다.

 

말년에 스키예르벡의 자화상은 한번 더 변했다.

    

헬레네 스키예르벡, <자화상(늙은 자화상)>, 1945

 

스키예르벡만의 느낌은 남아 있지만 단단한 색면이 사라지고 드로잉적인 면이 부각되었다. 어찌 보면 뭉크의 그림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을 곧 떠날 화가의 모습 같기도 하다.

 

이렇게 그녀의 자화상은 외모도, 화풍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변화했다. 한 인간의 변화를 마치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그녀의 자화상은, 삶은 곧 변화라는 진리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나만의 자화상을 만든다

 

인생의 굵직한 변화를 맞을 때마다 다른 스타일의 자화상을 선보인 스키예르벡의 모습은 왠지 나에게 용기를 준다. 나 역시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맞아 나의 그 무엇이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지만, 사실은 나도 그녀처럼 새로운 스타일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중이 아닐, 예전의 색, 이전의 나를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이 과도기여서 그런 게 아닐까, 실은 좀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스키예르벡의 자화상이 초기보다 중기가 더 그녀답고, 더 매력적인 것처럼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는 엄마들이 새롭게 그리는 자화상도 그럴 수 있으리라 위안해본다.

 

다시 동화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카멜레온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카멜레온이 불변의 색을 갖게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는 색이 변한다. 녹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또 노란색으로. 그런데 그는 책의 초반부와 달리 행복하다. 그가 변화를 수긍하며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또다른 카멜레온을 만났기 때문이다. 책의 중반부에서 카멜레온은 다른 카멜레온과 함께 이동하고 함께 몸 색깔의 변화를 체험한다. 그러면서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에 더이상 불만을 품지 않게 되었다.

 

찬찬히 동화책을 보다가, 나도 카멜레온처럼 변화를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 역시 육체적, 정신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아이도 매일매일 자란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비로소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 흰 점의 붉은 버섯 위에서 색의 변화를 마음껏 즐기는 카멜레온의 미소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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