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하나와 거실만으로 이루어졌던 우리의 신혼집에서 거실은 매우 중요했다. 그곳은 책상과 책장이 있는 나의 공부방이기도 했고 남편과 함께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휴식처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SNS에 육아 용품으로 점령당한 선배 엄마들의 거실 사진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의 거실만큼은 반드시 부부의 성역으로 지키겠다는 결심을 누구보다 확고하게 했더랬다. 알록달록한 장난감은 절대 사지 않겠다는 다짐도 하고 덩치 큰 육아용품은 들이지 않겠다는 나름의 원칙도 세웠다.

 

그런데 이 모든 결심은 아기가 태어나면서 무참히 깨졌다. 5분이라도 엄마를 쉴 수 있게 한다면 물건의 색이나 크기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심지어 아기는 물건이 알록달록할수록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족이 가장 많이 생활하는 곳이 거실이니 아기도 거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아기 매트, 기저귀, 장난감, 담요 등이 그렇게 거실에 자연스레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서 거실의 정중앙을 차지하던 내 책상과 책장은 갈 곳을 잃었다. 어디 마땅히 둘 데도 없어서 중고시장에 팔아버렸고 절대 버릴 수 없는 컴퓨터와 책들은 식탁 한 귀퉁이에 몰아두었다.

 

점차 줄어드는 내 공간을 보자니 마치 출산 전의 내 자신이 점차 없어지는 것 같고, 씁쓸했다. 점점 집의 주인은 아기가 되어가는 것만 같아, 좁아진 나의 공간을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위태로운 의자 위의 여인

 

윤석남(1939~)<의자 위의 여인>은 제목 그대로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버려진 나무 판과 버려진 의자로 만든 작품이다.

  

작품 앞에서 윤석남 작가

 

윤석남, <의자 위의 여인>, 1994

 

작품에서 의자 위에 걸터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어딘지 불편해보인다. 휴식을 취하고 싶어 눈을 감았지만 얼굴에는 어두움과 피로가 묻어 있다. 생기라고는 하나 없는 모습이다. 윤석남 작가는 이 여인의 형상이 젊은 시절의 자기 모습이라 설명했다. 결혼 후 윤석남의 집에는 그녀의 방이 없었다. 대다수의 여성이 그렇듯 그녀의 공간은 부엌이었다. 주부에게 부엌은 밥을 준비하고 치우는 노동의 공간이다. 게다가 부엌은 개인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가족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언제든지 들락거릴 수 있는 개방된 공동 소유의 공간이다.

 

주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집안에 자신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삶에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상징한다고 윤석남은 말한다. 그리고 본인 역시 당시에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등,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회고한다.

 

<의자 위의 여인>에는 작가의 이런 경험과 고민이 녹아 있다. 나무 위에 채색된 여인은 따라서 윤석남 자신의 자화상이자 그녀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여인들의 초상이다.

 

당당한 여자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똑같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이지만,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그린 그녀에게서는 힘과 자신감이 느껴진다. 이 여인은 피카소와 마티스 등 미술사 거장들의 발굴자이자 후원자, 그리고 비평가이자 작가였던 현대 여성의 어머니’,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미국의 스타인 가문은 프랑스로 이주하여 미술 컬렉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파블로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1905~06

 

특히 거트루드 스타인이 피카소 작품을 지속적으로 구매한 것은 아방가르드 미술의 왕좌에 마티스를 제치고 피카소를 앉히는 데 큰 공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 속에서 스타인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앞을 쏘아보고 있다. 무슨 말이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씰룩이고 이제 못 참겠다는 듯이 일어서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대상을 단순화시켜 단단하게 표현한 방법과 더불어 검정과 암갈색 등의 무거운 색채가 스타인의 당당함과 위엄을 부각시킨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스타인의 성격을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스타인의 방에서 스타인과 피카소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다. 스타인은 모델이 된 여인 아드리아나를 너무 섹슈얼하게만 그렸다며 피카소의 그림 <목욕하는 여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데, 이 작품을 그렸던 1928년에 피카소는 이미 스타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모두의 칭송을 받는 화가 앞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거침없는 혹평을 해대는. 보통 여성과 다른 스타인의 성격이 잘 나타난다.

 

실제로 스타인은 자신의 방에서 미술과 문학 작품에 대해서 언제나 자신 있게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피카소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을 그린 것은 1906년으로 그녀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럼에도 피카소는 스타인의 거침없는 성격을 간파했던 것 같다.

 

무엇이 그렇게 스타인을 자신 있게 만들었을까.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누구 하나 부럽지 않은 재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가 아닌, 그녀 자신으로만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피카소의 이 그림은 무수한 명작으로 둘러싸인 그녀의 공간, 스타인의 아틀리에에 걸려 있었다.

 

다시 찾을 나만의 공간

 

집에서 아내가, 또 엄마가 자신의 공간을 따로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정된 면적 안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필요를 채워야 하기에 주부의 공간은 가장 먼저 양보되기 십상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더욱 그렇다. 잠자리마저 아이와 나누어 써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뭐든지 결핍될수록 욕구는 커지는 법이다. 내 공간에 대한 필요도 자꾸만 커져간다. 이사를 가면 새집에는 꼭 나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리라 다짐해본다. 집안 어느 구석에라도 꼭 나의 몸과 영혼이 쉬는 공간을 마련할 거다. 넓지 않아도 괜찮다. 의자 하나와 작은 테이블만으로도 충분하다.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 펜 한 자루, 메모지, 책 몇 권 그리고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 하나를 올려둘 거다.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고, 글도 써볼 테다. 정작 그곳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못하더라도 내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충족된 느낌이 들 것 같다.

 

엄마여도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나의 공간은 분명히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은 나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