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와의 만남입니다.

만남은 수많은 우연을 거쳐야 됩니다.

대부분의 우연은 우연으로 끝납니다.

그렇지만 인연이 되는 우연들의 합은 돌이켜보면 나의 선택인 경우가 많습니다.


근래 보았던 일본 영화 속에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대사가 떠오르네요.

우리 곁에 있는 인연들은 모두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것들이지요.

사람이나 책이나.


오정희 선생님과의 인연. 소중히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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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선생님은 1947년생으로 1943년생이신 아버지와는 같은 세대를 사신 분입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가 생기고 나니 가끔 내가 처한 상황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감정을 이입해 볼 때가 많습니다.

내 자녀를 다그치고 혼을 낼 때, 때론 쳐다보고 있노라면 사랑 그 자체일때..부모님의 감정이 이랬구나. 라는 걸.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유년 시절이 그리운 건 내가 내 새끼에게 느끼는 감정. 

바로 그 감정들을 우리 부모님이 나를 대할때마다 가슴 가득 담고 있었구나 하는 아련함 때문이 아닐런지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면 나의 유년시절을 기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지금의 부모님 유년시절을 기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도 되겠네요.


혼자 남으신 아버지께 이 책을 선물해드렸습니다.

관심도, 그럴 여유도 없었던 아버지의 힘들고 가난했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함께 하고 싶네요. 

아버지도 이 책을 읽으시면서 당신의 유년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부모님이 보고 싶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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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8개의 단편이 실린 자전적 소설입니다.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어떤 계층의 한국 여성의 보편적인 하나의 전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설에서는 작품마다 주인공의 나이대를 적어놨네요


1. 유년의 뜰(6세~13세)

2. 중국인 거리(13세~16세) : 2004년 수능 출제, 창비 고등학교 교과서 수록

3. 겨울뜸부기(18세~20세)

4. 저녁의 게임(18세~20세) : 이상문학상 역대 최연소 수상자(1979년) - 37회 수상자인 김애란(만32세)보다 빨랐음

5. 꿈꾸는 새(20대 후반~30대 후반)

6. 비어있는 들(20대 후반~30대 후반)

7. 별사(20대 후반~30대 후반)

8. 어둠의 집(50대 이후)


소설가 편혜영은 오정희 선생님을 두고 한국에서 여성 작가가 겪어야 할 소설의 시작이고, 오정희를 읽지 않고 소설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평을 내린 바 있다고 합니다. [출처 : 나무위키]


오정희 선생님은 초고를 완성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녹음기에 녹음해 그걸 다시 재생해 듣고 문장을 수정하는 버릇이 있고,

본인의 모든 소설을 다 외우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 : 나무위키 ] 놀랍네요.


6편 <비어있는 들>까지 읽고 남은 두 편은 돌아가신 엄마의 20대를 생각하며 천천히 읽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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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 긋기******


[유년의 뜰]


거울 속에는 언제나 좁은 방안이 가득 담겨 있었다. - 11쪽


머리를 기르겠다고 가냘프게 항의를 했지만 할머니의 매운 눈에 단박 주눅이 들어 머리를 깎았다. 희끗희끗 서캐가 실린 머리털이 발 밑에 떨어질 때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 16쪽


언니는 자주 할머니의 눈을 피해 불에 달군 부젓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태웠다. 파마를 시켜준다는 것이다. -17쪽


거미처럼 여윈 그애는, 할머니의 빈젖을 빨 때 외에는 늘 가늘고 약하게 울었다. - 28쪽


아버지는 내게 연약한 넓적다리, 혹은 발목을 잡던 악력, 막연히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 보다 커다란 것, 땀으로 젖어 있던 등허리로 남아있었다. - 48쪽


저녁을 먹고 나면 우리는 화로를 끼고 앉아 내복을 벗어 화로 위에 팽팽히 펴놓았다. 그러면 옷 솔기에 숨었던 이가 더운 기운에 게으르게 기어나오고 우리는 그것을 손쉽게 주워 화로에 떨어뜨렸다. 저녁내 방에서는 이를 태우는 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 59쪽


나는 어머니의 지갑에서 점차 더 많은 액수의 돈을 꺼냈다. -62쪽




[중국인 거리]


달은 줄곧 머리 위에서 둥글었고 네 살짜리 동생은 어눌한 말씨로 씨팔눔아아, 왜 자꾸 따라오는 거여어, 소리치며 달을 향해 주먹질을 해대었다. - 72쪽


큰 덩치에 비해 지붕의 물매가 싸고 용마루가 밭아서 이상하게 눈에 설고 불균형해 뵈는 양식의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일종의 적의로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언덕을 넘어 선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에도 불구하고 언덕은 섬처럼 멀리 외따로 있었으며 갑각류의 동물처럼 입을 다문 집들은 대개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러하듯 다소 비장하게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 75쪽


난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 매기 언니가 목걸이도 구두도 옷도 다 준댔어. - 82쪽


노오란 햇빛이 다글다글 끓으며 들어와 먼지를 떠올려 방안은 온실과도 같았다. - 82쪽


유리 목걸이에 햇빛이 갖가지 빛깔로 쟁강쟁강 튀었다. 그 중한 알을 입술에 물며 치옥이가 말했다. -83쪽


이건 비밀인에 우리 엄마도 계모야.

치옥이는 비밀이라고 했지만 치옥이가 의붓자식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동네에서 아무도 없었다.-86쪽


여름의 긴긴 해는 한없이 긴 고양이의 허리를 자르며 비껴 기울고 있었다. -88쪽


시의 정상에서 조망하는 중국인 거리는, 검게 그을린 목조 적산 가옥 베란다에 널린 얼룩덜룩한 담요와 레이스의 속옷들은, 이 시의 풍물이었고 그림자였고 불가사의한 미소였으며 천칭의 한 쪽 손에 얹혀 한없이 기우는 수은이었다. 또한 기우뚱 침몰하기 시작한 배의, 이미 물에 잠긴 고물이었다. - 90쪽




[겨울 뜸부기]


직장 생활 십 년에 속절없이 서른 살의 노처녀가 되어 딴에는 세상살이의 쓴맛 단맛 다 아는 양 제법 달관한 표정을 지어도 때로 잠 안 오는 밤,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노라면 잠결에 내뱉은 어머니의 괴로운 한숨 소리,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물리칠 수 없는 업원처럼 내리누르고 나는 사는 게 이런 것인가, 이것의 끝은 무엇일까를 막막하게 생각하곤 했다. - 106쪽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위안이란 다만 비바람 치는 날 손안에 간직한 찻잔의 온기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찻잔이 싸늘히 식을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 117쪽



논산 훈련소로부터 오빠가 입고 떠났던 옷이 오던 날 어머니는 몹시 울었다.

과부된 지 이십 년 만에 처음 우는 울음이라고 했다. 낡은 옷은 더욱 작아 보였고, 이미 그것을 입었던 사람의 체취를 잃어 마치 쓰레기통에 펼쳐진 채 버려진 옷가지처럼 흉하고 불길하며 이물스러웠다. - 119쪽



[저녁의 게임]


서향의 창으로 비껴든 햇빛은 도마의 잘게 파인 홈마다 낀 찌끼를 뒤져내고 칼빛을 죽이며 개수대의 물에 굴절되어 물 속의 뿌연 앙금을 떠올렸다. -128쪽


음식을 씹을 때마다 완강히 드러나는 턱뼈와 무력하게 늘어진 목덜미의 주름이 눅눅하게 그늘 속에 잠기는 것을 나는 왠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 133쪽


방은 조용한 어둠 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윽고 집 전체가 수렁 같은 어둠 속으로 삐그덕거리며 서서히 잠들기 시작했다. - 150쪽



[꿈꾸는 새]


허위허위 올라온 길들은 꼬리를 잘라 흔적을 없애는 도마뱀처림 재빨리 집들 사이로 숨어버렸다.

대신 연민과 증오와 욕정과 무관심으로 녹여버린 애정이, 지나간 시간들이 눅눅한 공기 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 169쪽



[비어있는 들]


바람은 안개에 갇혀 흐르지 않았다 - 176쪽


까맣게 입을 벌린 굴이 한 토막씩 천천히 기차를 삼켰다. - 178쪽


수면은 비늘처럼 잔굽이로 밀렸다. -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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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16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프리쿠키님, 잘 지내셨나요.
제 서재에 댓글을 남겨주셔셔 반가운 마음을 담아 인사드리러 왔어요.
오정희 선생님의 책, 최근에 다시 출간된 모양이네요.
우리의 어린 시절도 그렇지만, 책도 다시 재출간 되지 않으면
오래전의 일처럼 기억하는 사람이 적어질 거예요.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북프리쿠키 2022-12-17 12:52   좋아요 1 | URL
네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재출간되지 않으면 기억하는 사람이 적어진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좋은 책은 좋은 영화처럼 다시 나와주는게 좋은거같네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코로나로 중단된 북프리 모임.
원년멤버 4명이 오랜만에 모이니
너무 좋았습니다.

전 산지 꽤 오래된 오정희 선생님 작품 입문. 유년의 뜰 30여 페이지 읽어보니
조만간 오정희 컬렉션(5권) 지름신 내리지 싶습니다.

박완서 선생님 소설전집 결정판(22권)
조금씩 모으고 있는데,
두분의 자전적 소설들 전작읽기에
도전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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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2-07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완전 좋았겠네요.
오정희, 박완서 비교적 옛날 작가라 모으겠다는 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쿠키님 참 기특하십니다.👍

북프리쿠키 2022-12-14 17:09   좋아요 1 | URL
박완서나 오정희 쌤은 내 아버지, 어머니의 힘들었던 유년시절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라떼는 말이야. 를 왜 그렇게 많이 말씀하셨는지를 공감할 수 있는 아련함. 내 살과 피의 근원..
연로하신 아버지께 선물하고 싶네요
유년의 뜰.

새파랑 2022-12-04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북프리쿠키님 아이디가 독서모임 이름이었군요. 저런 북클럽 모임 하면 정말 재미있고 책도 잘 읽힐거 같아요~!!

북프리쿠키 2022-12-14 17:11   좋아요 1 | URL
네. 북플 활동은 거의 저 혼자만 하는데.
다들 북프리 ** 으로
닉넴을 갖고 있어요.
흠. 함께 책 읽는것만으로도
넘 행복합니다^^

꼬마요정 2022-12-05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박완서님 참 좋아요 ㅎㅎ 모임 하시는 분들 막 생기가 느껴집니다. 이제 이렇게 좋은 모임 중단 안 되면 좋겠어요!!

북프리쿠키 2022-12-14 17:15   좋아요 1 | URL
요정님 잘 계시죠~
예전 파우스트 같은 책 읽으면서 저와 책읽기 공감이 참 잘 통했던(?) 분이라
늘 소중한 북플 친구라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박완서 쌤 책의 아스라한 유년시절의 글들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
네 모임은 정해진 날짜는 없지만 언제든지 프리하게 모이는거라 이제 중단하지 않고 책과 함께 늙어가는 인연이 되려구요.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22-12-15 12:26   좋아요 1 | URL
저도 늘 소중한 북플 친구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북프리쿠키님이 말씀해주시니 뭔가 설렙니다 ㅎㅎ

북프리쿠키 2022-12-18 20:15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의 방대한 독서에 놀라고,
그 정도 내공에도 변함없이 글은 항상 잔잔하고 차분하게 쓰시는 깊이에,
오히려 제가 더 존경하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데에 부끄럽습니다..ㅎㅎ

꼬마요정 2022-12-18 21:53   좋아요 1 | URL
칭찬 고맙습니다. 북쿠키님 역시 그러하니 우리 함께 재미있게 책 읽어요^^ 추운 날 감기 조심하세요!! 너무 춥습니다ㅜㅜ
 



신문에는 연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기사가 대 여섯 단씩 실리기는 했지만, 소스케는 그걸 훑어본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암살 사건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 35쪽



"나 같은 가난한 월급쟁이는 살해당하는 게 싫지만 이토 씨 같은 사람은 하얼빈에 가서 살해당하는 게 나아"하고 소스케가 비로소 우쭐해하며 말했다. (중략) "왜라니, 이토 씨는 살해당했으니까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거든, 그냥 죽어보라고, 그렇게는 안되지." - 36쪽



세간을 넣어두는 방에서 꺼내온 것을 환한 데서 보니 분명히 본 적이 있는 두 폭짜리 병풍이었다.

아래쪽에는 싸리, 도라지, 참억새, 칡, 마타리를 빈틈없이 그려놓고 동그란 달은 은박으로 처리했으며 그 옆의 빈 곳에 "들길, 그리고 하늘에 뜬 달 속의 마타리, 기이치"라는 하이쿠 한 수가 쓰여 있었다. - 65쪽



소스케는 아주 짧았던 그때의 대화를 일일이 떠올릴 때마다 그 하나하나가 거의 무색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 담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투명한 목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두 사람의 미래를 새빨갛게 뒤덮었는지를 신기하게 여겼다. 지금은 그 붉은색도 세월이 흘러 옛날의 선명함을 잃어버렸다. 서로를 불태운 불꽃은 자연스럽게 변색되어 까매졌다. 두 사람의 생활은 이렇게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 184쪽



지금까지 소스케의 마음에 비친 오요네는 색과 소리가 어지러운 가운데 서 있을때조차도 무척 차분했다.

그리고 그 차분함은 눈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데서 온 것이라고만 생각되었다. - 188쪽



"그런데 말이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자로를 제일 좋아한다더군요. 그 이유를 물어보니까, 자로라는 사람은 뭔가 하나를 배웠는데 그것을 미처 행하기도 전에 또 새로운 것을 들으면 고민을 할 정도로 정직해서랍니다. 사실 저도 자로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어서 난처했지만, 아무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하고 결혼도 하기 전에 또 새롭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고민되는 거 아니겠느냐고 물어보았지요." - 203쪽



오늘까지의 경과로 미루어보아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은 세월이라는 격언을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이끌어내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것이 그제 밤에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다. - 218쪽



"책을 읽는 것은 아주 해롭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독서만큼 수행에 방해되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도 이렇게 <벽암집>같은 걸 읽고 있습니다만, 자기 수준 이상의 것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적당히 어림짐작하는 버릇이 붙으면 좌선할 때 방해가 되어 자기 이상의 경계를 예상해보거나 깨달음을 기다려보거나 해서 충분히 파고들어야 하는 데서 좌절할 수 있습니다. 무척 해가 되니 그만 두는게 좋을 겁니다. 만약 굳이 뭔가 읽고 싶으시면 <선관책진>처럼 사람에게 용기를 주거나 격려해주는것이 좋겠지요. 그것도 그냥 자극의 방편으로 읽을 뿐이지 깨달음 자체와는 무관합니다." = 234쪽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큰일이 절반쯤 끝난 것처럼 느꼈다.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만,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이 문의 빗장을 열 수 있을 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수단과 방법을 머릿속에서 분명히 마련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열 힘은 조금도 키울 수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서 있는 장소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과 손톱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닫힌 문 앞에 무능하고 무력하게 남겨졌다. 그는 평소 자신의 분별력을 믿고 살아왔다. 그 분별력이 지금은 그에게 탈이 되고 있음을 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취사선택도, 비교 검토도 허용하지 않는 어리석은 외골수를 부러워했다. 또는 신념이 강한 선남선녀가 지혜도 잊고 여러가지로 생각도 하지 않는 정진의 경지를 숭고한 것이라며 우러러보았다.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가는 것은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원래의 길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 252~253쪽



놀랍게도 이 제목 자체는 소세키의 작명이 아니다. 전작 <그 후>를 마무리 짓고 신문사에서 다음 작품의 제목을 알려달라고 독촉하자 소세키는 아사히 문예란을 담당하던 제자에게 적당한 제목을 붙여달라고 부탁했고, 이 제자가 친구와 상의해서 정한 제목이 "문"이었다. - 266쪽



그는 문을 열 만한 힘이 없다. 이것이 전근대적 전통에서도, 근대 문명에서도 출구를 찾지 못했던 소세키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 -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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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옹이 43세의 나이로 1910년 3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소설.


<산시로> <그후>를 거쳐 마무리되는
전기 3부작의 마지막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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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잔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꺼내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 자신의 '얕음'과 '허세'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책이었지요.

빈곤포르노라는 용어 안에 얼마나 많은 인류의 지성과 실천을 담아냈는지를 묵도할 때,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사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극복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야 한다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를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수잔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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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1-17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햐아~ 이건 딴 얘긴데, 쿠키님 서가는 정말 깔끔하군요.
쿠키님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 책상은 폭격 수준인데 말입니다.ㅎㅎ
사실 무슨 정신으로 사진을 올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버텨보려구요.ㅋㅋㅋ

북프리쿠키 2022-11-17 15:13   좋아요 1 | URL
ㅎㅎ 이것 또한 허세의 일종 아니겠습니까. 좋은 말로 하자면 자기만족이구요.
텔라님은 텔라님 책상에서 자기만족을 느끼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