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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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네 살 아이는 밤 9시면 방에 들어가 한 시간 정도 뒤척이다가 10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잠에 든다. 그 한 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고, 몸을 구르며 장난을 치고, 이불을 뒤집어 썼다가 벗었다 반복하며 혼자 즐거워한다. 나는 아직 혼자 잠들지 못하는 아이 곁에 누워서 한 시간 동안 하는 일 없이 함께 있어주었다. 어느 날은 아이가 10시가 지났는데도 영 잘 기색이 없었다. 누워서 자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눈을 오히려 빛내며 계속 굴러다녔다. 11시가 다 될 무렵 이제는 재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에게 불쑥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그만 자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흔히 듣지 못하던 낮은 목소리에 입이 나왔고 샐쭉해졌고 이내 풀이 죽었다. 아이는 그제야 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 누웠는데, 벽을 보며 등을 돌리고 한 마디를 던진다. “아빠는 왜 나한테 화가 났어요?” 아이의 무심한 한 마디는 나의 밤을 길게 만들었다. 아이는 금방 잠들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아빠는 왜 나한테 화가 났냐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물음은 아빠와 나는 서로 어떤 존재이기에 당신이 나의 행동을 강제하고 규율 할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지 묻는 것과 같다 여겼다. 아버지와 딸의 혈연 관계가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서늘한 사회적 관계 또한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에 잠에 들지 못했다. 고작 딸 아이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크게 마음을 쏟는 것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김희경 작가의 <이상한 정상가족(동아시아, 2017)>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정상적인 가족, 정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한 것들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생각의 경직을 만들어냈고, 이 경직된 생각이 나는 정상적이고 너는 비정상적이라는 경계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내가 정상적이라고 믿을수록 나는 완고해지고, 나는 내 아이를 타자가 아닌 소유물로 간주하고, 나에게서 네가 멀어질수록 나는 너를 체벌을 통해 다시금 내게 길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나, 비정상적인 사람들 모두 스스로 정상적이라고 여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관계를 객관적으로 환원하기 쉽지 않다. 너는 나의 누군가이며 나의 무엇이지, 너와 나 서로 양립하며 감정과 정보를 교류할 개별적인 존재로 너를 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해야만 한다. 누군가 나를 소유할 수 없듯이 나 역시 타인의 행위를 소유할 수 없으며, 타인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 나의 아내, 나의 딸, 나의 부모, 누구든지 말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밤 11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 날을 다시 떠올려보자. 나는 아이를 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어는 나였고, 동사는 재우다였고, 목적어는 아이였다. 아이는 나의 행위의 목적지였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향하는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라는 것, 공동체는 누군가가 누군가의 목적어가 아니며 스스로 주어가 되어야 했다. 내가 아이를 재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잠에 드는 것,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며 배우고 감탄하고 삶을 익혀가는 것 …… 그것이야말로 함께 만들어가는 지극히 정상적인 공동체에 부합하지 않을는지. 나는 나의 방식대로 너를 길들일 수 없다. 아니, 길들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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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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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문태준 시인은 끊임없이 여행을 희망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끊임없이 여행을 희망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여행을 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가 살아가는 현실이란 것이 시인의 본성이나 기질과 꼭 들어맞는 것이 아니기에, 바로 그 불협화음이 그를 현실을 벗어나게 싶게끔 만든다고 생각했다. 시집 <그늘의 발달>에서 문태준 시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본성, 기질, 자아, 마음, 아니 무엇이라 불러도 괜찮겠다. 자신이라 여겨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살얼음 아래 같은 데 2> 시를 보자. 시인은 살얼음이 낀 물가를 거닐다가 물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구멍을 발견한다. 차디찬 겨울 물 속에서 부유하는 물고기가 보인다. 그는 투명한 물 속이 그의 생가(生家)같다고 했다. 시인은 물 속을 계속 바라봤다. 그가 거닐고 있는 현실이 아니라, 그의 본성과 기질에 더 가까운 공간이 차고 투명한 물 속에 있었다. 생(生)은 미묘한 불협화음 속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문태준 시인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 생(生)의 불협화음을 대하는 감정에 있다. 누구나 현실에서 쓰고 다니는 가면이 자신의 본성과 기질에 맞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한 자신의 모습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불협화음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시인이 물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는 후회, 분노, 고통, 자기 부정의 감정이 담겨있지 않다. 시인은 고요하게 저 세상에 존재하는 자아를 관찰하고 있다. 삶을 살아가며 무수한 그늘이 발달하고 넓게 드리울 것이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늘 속에서 그늘 밖의 어딘가를 계속 응시하고 있는 거다. 그에게 삶은 미묘한 불협화음 속에 놓여 있는 것인데, 동시에 그 불협화음을 인정하고 함께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시인은 삶에서 도망치고 벗어나려 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것대로, 또한 저것은 저것대로였다. 나는 시인의 무심한 태도가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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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필립 K. 딕 걸작선 12
필립 K.딕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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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회사를 다니는 우리들에게 연말 연초는 참 중요한 시기겠지. 연말에는 한 해의 성과를 평가하고 또 연초는 새로운 한 해의 계획을 수립하고 이런 저런 프로젝트에 대한 구상도 쏟아져 나올 시기인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직원들의 이동이 맞물리는 시기라서 그렇지. “어느 팀에 있던 누가 어느 팀으로 이동한다더라, 오랫동안 회사를 떠나 다른 계열사에 가 있던 그 친구가 다시 친정에 복귀한다더라, 팀장이 이번에도 누구를 놓아주지 않고 이동 안 시켜준다더라, 거기 몇 년 째야 그럼? 꼭 지박령 같네”, 이런 이야기가 무수히 돌고 도는 가운데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이동을 하지. 이제 회사에 입사한 지 만 9년이 지났는데, 9년 동안 이동의 소용돌이를 지켜 보며 깨달은 건, 직원들의 이동 시장은 아수라와 같이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회사는 굴러간다는 거야. 그 직원이 없으면 이제 그 조직도 운명을 다하겠구나 싶은 순간에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조직을 유지하고 성과를 내는 법이었단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어떤 조직에서 누구보다 빛나는 순간을 맛보았고 스스로 전설을 만들어냈던 누군가가 있을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개별자로 여겨졌거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곧 조직과 동의어인, 그래서 누구나 그를 뚜렷이 식별하고 기억하여 개별자로 존재하는 사람이 분명 몇 명은 있었어. 그러나 그런 사람이 조직을 떠나갔음에도 조직이 영속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실제로 개별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했던 걸까 – 소설에서 레이첼 로즌이라는 이름이 부여된 안드로이드의 고백과 같이 – 약간은 허무한 생각도 들었단다. 그러니까 뭐랄까,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은 기계 부품이라고까지 스스로를 비하하진 않았지만, 조직을 이루는 한 요소로서 너와 나의 구분이라는 건 사실 굉장히 허황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우리 사이에 구분이 없다. 우리는 같은 직원이다.

그래서인가 ……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1968년 作)>을 읽었을 때, 앞서 이야기한 안드로이드 레이첼의 고백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어. 지금으로부터 무려 50년 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타인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인간과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결여된 안드로이드의 대립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내가 주목한 건 존재와 존재 사이에 구분이 없어지는 상황들이었어. 안드로이드를 식별하려고 개발한 테스트는 그 정확도가 100%는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식별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인간이 아니라고 지목된 이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구분이 흐려지는 셈이지. 인간은 모두가 <감정이입 장치>를 통해 선지자 머서와 하나가 되고, 반대로 안드로이드는 모두가 인기 TV 프로그램인 <버스터 프렌들리>를 시청하고 있어. 레이첼 로즌은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레이첼 로즌이라는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똑 같은 모습과 성격으로 프로그램 된 수 많은 안드로이드 중 하나에 불과하지. 그들 사이에 구분이란 없었어.

이런 소설을 우리는 흔히 SF 소설이라고 구분하지. SF(Science Fiction)소설. 캐나다의 저명한 SF 작가인 로버트 J. 소여는 SF를 “현재에는 없을지라도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을 다루는 장르” 라고 정의했다고 하지. 그러니까 1960년대 필립 K. 딕이 이 소설을 구상했을 때 분명 안드로이드라는 개념도 없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경찰차, 감정 이입 장치, 인공 동물, 영상 통화 장치 따위의 것은 분명 없었겠지. 아마 이러한 개념을 생각해내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거야. 2019년을 통과하는 이 순간에, 2069년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런데 더 상상하기 어려운 건 과연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거야. 달리 말하면 우리는 어떤 존재로 존재할 것인가, 이런 말과 같겠지. 얼마나 쉽고, 편리하고, 간단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즐겁게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그러한 삶이 도래했을 때 사피엔스라는 생명은 과연 무엇으로 다른 생명과 비교하여 사피엔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인지, 이런 질문을 마주하면 단지 즐겁다기 보다는 조금은 섬뜩한 기분마저 들어.

그래서 나는 SF소설, 흔히 공상과학소설로 분류되는 것들은 조금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어. 아까 "SF소설은 현재에는 없지만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을 다룬다" 이런 이야기를 했지. 지금 통용되는 규범, 기술, 문화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공간을 상상하여 창조하고는, 이런 삶 또한 인류가 취할 수 있는 수 많은 가능성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거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안드로이드, 실제 양과 전기 양을 명확히 구분하고 식별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존재는 무엇으로 그 존재라고 불릴 수 있는가, 이 소설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지. 소중한 질문이야. 누군가 그 질문을 떠올리고 표현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우리는 미래의 우리와 큰 구분이 없을 거고,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역시 어떻게든 이전과 같이 유지되고 시간이 흘러갈 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SF소설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기 보다는, 현재를 조금 낯설게 만들어주는 거였어. 낯설게 느껴진 순간, 이전과 같아질 수는 없으니까. 이전과 같지 않다면 적어도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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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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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 <빌리 앨리어트>를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영국 잉글랜드 북부 더럼에 살고 있는 열 한 살 빌리는 권투보다 발레가 재미있다. 남자가 발레를 한다는 상식을 깨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빌리가 처한 현실이다. 아버지와 형은 석탄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이고, 할머니는 정신이 가끔 오락가락하는 치매를 앓고 있다. 형편은 여의치 않고 세파(世波)는 험난하기만 하다. 윌킨슨 발레 교사의 도움을 받아 빌리는 발레의 세계에 빠지게 되고, 강경한 아버지 앞에서 마치 신기가 든 듯한 모습으로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왕립 발레학교의 오디션을 통과하고 차이콥스키 음악에 맞춰 발레를 선보이는 유명한 발레리노가 된다. 예술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열 한 살 소년이 말이 아닌 몸으로 전해준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유명한 대사인, 전기처럼 짜릿하기만 하다. 예술을 향한 生의 성장은 아름다웠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 <빌리 앨리어트>를 두 번째, 그리고 여러 번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석탄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지만 실제 일을 하지는 않고 있다. 당시의 마가릿 대처 영국 수상의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노조는 장기파업으로 대응하고 있던 때였다. 아버지와 형은 매일 현장에 나가 경찰을 마주하고 피켓을 들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에 맞서 대항했다. 빌리가 체육관에서 발레를 하는 것을 보고 나서, 아버지는 파업을 멈추고 다시 밥벌이를 시작한다. 아이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른의 현실이 꿈으로 도망쳐 버리게 놔둘 수 없었다. 빌리의 형편은 여의치 않고 세파(世波)는 험난하기만 하나, 그것은 단지 소설이나 문학이 특정 인물에 부여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공통의 상처이기도 했다. 예술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으나,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예술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가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1955년에 쓰여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제작 <롤리타>는 영화 <빌리 앨리어트>를 여러 차례 감상하며 겪은 생각의 변화와 정확히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이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이 소설은 여러 지점에서 아름답다. 아니 정확히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험버트 씨와 소설을 읽는 내가, 소설에서 언급하는 인물과 순간들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일 테다. 어느 여름 날 서른 일곱 살 험버트는 열 두 살 소녀 롤리타를 만난다. 험버트는 롤리타의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책을 읽을 때, 침대에 누워 있을 때, 테니스를 칠 때, 창 밖을 볼 때, 의붓아버지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같이 롤리타와 사랑을 나눌 때 그녀에게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 아름다움은 험버트에게 결핍된 것을 채워주고 그를 보다 완전하게 만들기 때문에, 단순히 유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生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이유가 무엇이든 험버트 스스로는 진실된 아름다움을 쫓고 있다고 믿었을 거다. 나의 님펫, 롤리타 곁에서.

<롤리타>를 다 읽고 났을 때 첫 장을 펼쳐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비단 이 소설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서른 후반의 남성은 스물 다섯 살이나 어린 여자 아이를 성(性)적으로 제어하고 통제하고 위압하는 소아성애자다. 매 시 매 분 롤리타가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던 그는 어느 날 롤리타가 불과 이십 팔 분 동안 자취를 감췄다고 격분하며 손등으로 롤리타의 광대뼈를 가격한다. 가까스로 도망쳐 그의 곁을 떠난 롤리타를 몇 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좌절한 것은 롤리타가 자신을 떠났다는 것보다도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마음을 주지 않은 것, 그러니까 롤리타가 험버트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적이 결코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쌍방향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닫고, 자기 대신 그녀의 마음을 유혹하고 희롱했던 사내를 찾아가 권총으로 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가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작품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고서, - 처음 작품을 읽을 때는 다시 읽을 생각에 놓치고 읽지 않은 – 나는 앞서 <빌리 앨리어트>를 보며 떠올린 생각을 후회해야만 했다. 예전의 나는 “예술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으나,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예술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의도는 예술이라는 포장 아래 놓인 현실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며, 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 진정한 예술이 될 거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롤리타>의 나보코프는 딱 잘라서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롤리타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라고 그는 말했다. 나보코프는 소아성애자를 통해 현대인에게 왜곡된 성 의식의 문제점 …… 따위를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험버트라는 위인을 통해 심미적 희열을 추구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 지점에서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소아성애자인 험버트의 삶을 따라 다니며 나 역시 아름답다고 분명 느낀 순간이 있었다. 험버트가 테니스를 치는 롤리타를 바라보며, 롤리타가 입은 옷, 바람에 옷이 살랑거리며 나부끼는 모습, 테니스 공을 처음 치는 순간의 우아한 동작, 그녀의 명랑한 표정, 청각적인 면에서도 하나하나가 맑고 또랑또랑한 타격음, 이런 순간을 묘사하며 너무나도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험버트의 심리가 고스란히 나에게 전이되었다. 험버트의 즐거움과 행복함에 어느 정도의 진실함이 깃들어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폭력이 깃들어있는지는 헤아릴 수 없다. 다만 그것에 내가 교감하고 심지어 조금은 동화되었다는 것 …… 험버트는 롤리타와 서로 다른 지점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지만, 나는 완전히 평행선을 걸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험버트의 특별한 심리상태와 내가 조금은 연결되었다는 감정은 몹시도 불편하고 역겨웠다.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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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창비시선 198
조용미 지음 / 창비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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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유희경 시인이 운영하는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 찾았다. 서점의 벽 한 켠은 시집을 취급하는 다양한 출판사와 수 많은 시집들로 가득했는데, 수 많은 시인들은 놀랍게도 저마다 다른 단어를 떠오르게 했다. 어떤 이의 시어(詩語)는 투명하고, 혹은 언어유희적이고, 고요하고, 현실에 전투적이고, 生에 초연하고, 서정적이고, 혹은 우울하다. 놀랍게도 – 놀랍다는 표현을 한 번 더 반복해야 할 정도로 – 하나의 표현은 딱 하나의 시집에만 허락되었다. 여기 조용한 느낌의 시어가 쓰인 두 시집이 있다고 하자. 두 시집은 일견 조용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세세히 파고 들면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니까 시인들의 세계에 표현과 감정의 중복이란 없었다. 비슷한 듯 보여도 읽다 보면 그 시인만이 전달하는 고유한 감정은 각자 다르다. 시인을 정의하는 고유한 단어, 그걸 찾아내어 명명하는 것은 시집을 읽는 우리들의 몫이었다. 

그 날 서점에서 시집 두 권을 샀는데, 하나는 조용미 시인의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였다. 지금까지 여섯 편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 두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다. 2000년에 발표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작품이며, 1962년 生인 시인에게는 나이 마흔을 앞두고 쓰여진 것이기도 하다. 조용미 시인은 <종교적 인간>이다. 조용미 시인이 종교적 인간이라는 말은, 그녀의 시가 종교적 정취로 가득하다는 말과 같았다. 종교라는 단어는 태생적으로 독실한 신앙, 나직한 기도, 조용한 묵상, 경건한 성상(聖像), 이런 감각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시인이 창조한 종교적인 공간에 신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현실만 가득하다. 낙선사 뜨락, 남양주 석화촌, 옥룡사터, 대원사 다층석탑, 능내리 ...... 시집에서 발견되는, 시인이 경험하는 공간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런데 현실의 공간 위에서 종교적 정취가 느껴진다. 의아했다. 

M.엘리아데의 <성과 속>구절을 인용해보자.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이 균질하지 않다고 했다. 종교적 인간에게는 현실 속에 성스러운 공간이 있어 그것만이 실재적이고 현실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성스러운 공간은 머리 속에, 하늘 위에, 형이상학적인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서 창조된다고 했다. 그 이외의 공간은 무가치하다. 때문에 종교적 인간에게 공간은 균질하지 않게 다가온다. 반면 속세의 인간에게 모든 공간은 평등하며 균질적이다. 특별히 성스러운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모든 공간은 동일한 군상이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무대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공간을 과연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소실점을 계속 노려보고 있으면 소실점 이외의 지점은 까맣게 덮이고 오직 소실점만이 시야에 담기는 무아지경의 세계, 아마 그런 것과 비슷한 시선일 테다. 

조용미 시인은 <종교적 인간>이다.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혹은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 위에 성스러운 공간을 새롭게 창조하여 계속 그것만을 응시하고 있다. 폐허가 된 거돈사의 천 년 묵은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한밤의 진불암에서 마주한 대숲을 보며, 점봉산 단목령까지 산을 오르며 시인은 현실 속에서 영적인 시간을 경험하고 공간을 창조한다. 시집을 읽으며 나도 거돈사에 가면, 진불암에 가면, 점봉산에 가면 시인이 만들어 놓은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체험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궁금한 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왜 시인이 그토록 종교적 인간을 갈망하는지, 왜 시인이 현실 위에 성스럽고 영적인 공간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지 묻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시인은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이곳 저곳 남겨 두었다. 시인은 “불행이란 몸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 그래서 몸이 없다면 어디에 불행이 있을 수 있을까” 라며 노자의 <도덕경>한 구절을 읊조린다. 

몸이 없는 곳, 그래서 불행이 없는 곳. 고통이 없는 곳. 마음의 생채기가 없는 곳. 그런 곳이 있는지 시인은 끊임없이 현실 위에 영적인 경험을 덧대려는 것 아닐까 싶었다. 하늘에 떠 있는 일만 마리의 물고기가 적멸(寂滅)하며 폭우가 쏟아지는 곳이 있어 그곳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그런 곳에서는 어떠한 불행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없고 싶다는 마음, 이게 시인이 남긴 단서였다.

조용미 시인이 부러웠던 건 아니다. 나는 시인 그 자신이 되고 싶었다.

(2018. 12. 13.)
 

어비산(魚飛山)에 가면 물고기들이 날아다녔던 흔적을 볼 수 있을까
산에 가는 것을 미루다 물고기의 등을 뚫고 나온 사리를 본다 물고기는 뼈를 삭여 제 몸 밖으로 산 하나를 밀어내었다 

날아 다니는 물고기가 되어 세상을 헤매고 다녔다
비가 쏟아지면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정에서 푸덕이며 금과 옥의 소리를 낸다는 만어산(萬魚山)과 그 골짜기에 있는 절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일만 마리 물고기떼의 적멸, 폭우가 쏟아지던 날 물고기들이 내는 장엄한 풍경소리를 들으며 만어사의 옛스님은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 

- 조용미 시인의 <魚飛山>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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