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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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 <빌리 앨리어트>를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영국 잉글랜드 북부 더럼에 살고 있는 열 한 살 빌리는 권투보다 발레가 재미있다. 남자가 발레를 한다는 상식을 깨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빌리가 처한 현실이다. 아버지와 형은 석탄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이고, 할머니는 정신이 가끔 오락가락하는 치매를 앓고 있다. 형편은 여의치 않고 세파(世波)는 험난하기만 하다. 윌킨슨 발레 교사의 도움을 받아 빌리는 발레의 세계에 빠지게 되고, 강경한 아버지 앞에서 마치 신기가 든 듯한 모습으로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왕립 발레학교의 오디션을 통과하고 차이콥스키 음악에 맞춰 발레를 선보이는 유명한 발레리노가 된다. 예술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열 한 살 소년이 말이 아닌 몸으로 전해준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유명한 대사인, 전기처럼 짜릿하기만 하다. 예술을 향한 生의 성장은 아름다웠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 <빌리 앨리어트>를 두 번째, 그리고 여러 번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석탄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지만 실제 일을 하지는 않고 있다. 당시의 마가릿 대처 영국 수상의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노조는 장기파업으로 대응하고 있던 때였다. 아버지와 형은 매일 현장에 나가 경찰을 마주하고 피켓을 들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에 맞서 대항했다. 빌리가 체육관에서 발레를 하는 것을 보고 나서, 아버지는 파업을 멈추고 다시 밥벌이를 시작한다. 아이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른의 현실이 꿈으로 도망쳐 버리게 놔둘 수 없었다. 빌리의 형편은 여의치 않고 세파(世波)는 험난하기만 하나, 그것은 단지 소설이나 문학이 특정 인물에 부여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공통의 상처이기도 했다. 예술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으나,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예술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가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1955년에 쓰여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제작 <롤리타>는 영화 <빌리 앨리어트>를 여러 차례 감상하며 겪은 생각의 변화와 정확히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이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이 소설은 여러 지점에서 아름답다. 아니 정확히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험버트 씨와 소설을 읽는 내가, 소설에서 언급하는 인물과 순간들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일 테다. 어느 여름 날 서른 일곱 살 험버트는 열 두 살 소녀 롤리타를 만난다. 험버트는 롤리타의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책을 읽을 때, 침대에 누워 있을 때, 테니스를 칠 때, 창 밖을 볼 때, 의붓아버지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같이 롤리타와 사랑을 나눌 때 그녀에게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 아름다움은 험버트에게 결핍된 것을 채워주고 그를 보다 완전하게 만들기 때문에, 단순히 유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生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이유가 무엇이든 험버트 스스로는 진실된 아름다움을 쫓고 있다고 믿었을 거다. 나의 님펫, 롤리타 곁에서.

<롤리타>를 다 읽고 났을 때 첫 장을 펼쳐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비단 이 소설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서른 후반의 남성은 스물 다섯 살이나 어린 여자 아이를 성(性)적으로 제어하고 통제하고 위압하는 소아성애자다. 매 시 매 분 롤리타가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던 그는 어느 날 롤리타가 불과 이십 팔 분 동안 자취를 감췄다고 격분하며 손등으로 롤리타의 광대뼈를 가격한다. 가까스로 도망쳐 그의 곁을 떠난 롤리타를 몇 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좌절한 것은 롤리타가 자신을 떠났다는 것보다도 자신에게 단 한 번도 마음을 주지 않은 것, 그러니까 롤리타가 험버트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적이 결코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쌍방향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닫고, 자기 대신 그녀의 마음을 유혹하고 희롱했던 사내를 찾아가 권총으로 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가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작품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고서, - 처음 작품을 읽을 때는 다시 읽을 생각에 놓치고 읽지 않은 – 나는 앞서 <빌리 앨리어트>를 보며 떠올린 생각을 후회해야만 했다. 예전의 나는 “예술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으나,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예술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의도는 예술이라는 포장 아래 놓인 현실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며, 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 진정한 예술이 될 거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롤리타>의 나보코프는 딱 잘라서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롤리타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라고 그는 말했다. 나보코프는 소아성애자를 통해 현대인에게 왜곡된 성 의식의 문제점 …… 따위를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험버트라는 위인을 통해 심미적 희열을 추구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 지점에서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소아성애자인 험버트의 삶을 따라 다니며 나 역시 아름답다고 분명 느낀 순간이 있었다. 험버트가 테니스를 치는 롤리타를 바라보며, 롤리타가 입은 옷, 바람에 옷이 살랑거리며 나부끼는 모습, 테니스 공을 처음 치는 순간의 우아한 동작, 그녀의 명랑한 표정, 청각적인 면에서도 하나하나가 맑고 또랑또랑한 타격음, 이런 순간을 묘사하며 너무나도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험버트의 심리가 고스란히 나에게 전이되었다. 험버트의 즐거움과 행복함에 어느 정도의 진실함이 깃들어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폭력이 깃들어있는지는 헤아릴 수 없다. 다만 그것에 내가 교감하고 심지어 조금은 동화되었다는 것 …… 험버트는 롤리타와 서로 다른 지점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지만, 나는 완전히 평행선을 걸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험버트의 특별한 심리상태와 내가 조금은 연결되었다는 감정은 몹시도 불편하고 역겨웠다.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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