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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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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나날이다. 출근 전 확인했던 뉴스에서는 오늘 서울 아침 기온이 -6도라고 했지만 체감 온도는 그것보다 더 추웠던 2월 어느 날 아침. 광화문 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는 5분 남짓 시간 동안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갔단다. 커피를 주문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는구나. 언뜻 봐도 가로 세로 각 5~6미터가 넘어 보이는 대형 그림이었는데 머리카락부터 눈썹, 얼굴 색, 입술, 손가락까지 모든 것이 파란색으로 채색된 여자의 초상화였어. 그림 속 여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시선을 정면으로 던지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파란 가운데 눈동자만큼은 하얗게 빛나고 있어서 그 시선으로부터 얼굴을 돌릴 수가 없었단다. 생각해 보렴. 내 눈 한 가득 보이는 파란색의 얼굴, 그리고 나를 주시하며 내려다 보고 있는 커다란 눈동자. 나는 같이 앉아있던 아내에게 이건 꼭 <1984년> 소설에 나오는 빅브라더(Big Brother) 같은데, 라며 함께 웃고 말았어. 그리고는 이내 섬뜩해졌지. 커피숍을 떠날 때까지 내게 달라 붙었던 시선의 섬뜩함 ......

문학이라는 것이 세대를 건너 독자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인물을 단 한 명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조금은 성공한 셈 아닐까. 이런 인물의 존재감이란 너무나 선명해서 단지 작품 속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 어딘가에 실제 살아 숨쉬는 것 아닐까 착각을 하게 하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허삼관 매혈기>의 허삼관, <롤리타>의 롤리타, <면도날>의 래리 ...... <1984년>의 빅브라더도 분명 그 중 한 명이었던 것 같아. 텔레스크린을 통해 우리들의 모든 순간이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수집되어 빅브라더에게 향하고 있다는 설정은 섬뜩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매력적인 세계관이었어. 이 세상 어디에도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없어 모두는 늘 자기 검열을 하느라 바쁘지. 이 매력적인 섬뜩함은 <1984년> 발표 이후 많은 매체를 통해 현실 세계에 빗대어 늘 환기되고 재생산되었던 것 같아. 확실히 빅브라더는 <1984년>에게 아주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했어. 빅브라더, 사람의 움직임을 쫓아 눈이 함께 움직이는 그의 커다란 포스터, 소리와 행동을 자발적으로 검열해야 했던 시민들의 모습은 <1984년>를 관통하는 첫 번째 메타포, <감시>를 상징하고 있어. <감시>라는 단어로, 이 책은 문을 열었단다.

그러나 미셸 푸코의 책 <감시와 처벌>을 떠올린다면, <1984년>은 <감시>로 시작해서 조금씩 <감시> 이후의 <처벌>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구조를 갖고 있었어. 작품 전체를 관통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이것이었단다. “구전제주의자들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자들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 (p297) The command of the old despotisms was “Thou shalt not”. The command of the totalitarians was “Thou shalt”. Our command is “THOU ART” 주인공 윈스턴은 빅브라더의 눈을 이리저리 피해 세계의 틈을 넓혀 나가다가 끝내 감시망에 걸려 처벌을 받게 되지. 그때 당을 대변하는 오브라이언이 원하는 건 윈스턴이 겉으로 굴복하고 당의 방침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어. 당의 말은 언제나 옳은 것이며, 이들이 진심으로 빅브라더를 사랑하도록 그들의 마음은 뿌리부터 전면적으로 개조되어야 했어. 어떤 것을 해야 하거나 또는 어떤 것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할 것 자체가 태생적으로 존재하지 않도록 그들의 몸과 정신은 빅 브라더를 향해 완전히 예속되어야 하는 것 ...... 그러니까 빅브라더의 <처벌>이란 이 세상에 더 이상 감시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도록, 모든 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 아니었을까. 감시하여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할 것이 없도록 처벌하는 것 말이야.

 

 

그렇다면 <1984>에서 말하는 건 빅브라더와 같은 전체주의적 국가, 전체주의적 존재에 대한 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끊임없이 텔레스크린을 통해 이루어지는 감시와, 창문 하나 없는 101호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처벌. 이 두 가지가 의미하는 건 <자유의 종말>, 그것도 신체와 정신 모든 측면에서 자유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어. 이 작품이 반(反)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이라는 걸 떠올려 보자. 자유가 완전하게 종말을 맞이한 지점이 반(反)유토피아라면, 유토피아란 우리의 자유를 통제하는 조건 – 끊임없는 감시,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의 강제화 – 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점을 의미하겠지. 여기서 두 가지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들었어. 우선 유토피아(Utopia)란 말의 어원을 보면 그리스어 topos(장소)와 ou(부정)가 조합된 단어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라고 하지. 어디에도 없는 곳 ...... 자유의 끝이 유토피아라면,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신체와 정신 모든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일까, 조지 오웰은 그런 지점엔 끝내 도달할 수 없을 거라고 예견했던 것인지도 몰라.

더 흥미로웠던 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Condition에 대한 거였어. 독재, 국정농단, 감찰, 사법농단, 블랙리스트, 억압, 방송출연금지 이런 단어들이 최근 몇 년 간 거리를 배회하며 <1984년>이 현실로 도래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져갔던 것을 기억한단다. 그때 우리들 마음 속에 떠오른 것은 우리가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훼방 놓는 세력에 대한 것이었지. 나를 구속하는 너희들. 그러니까 우리의 자유를 예속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타자였어. 이 말은 분명 맞아.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어딘가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어. 신체와 정신적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외부의 타자도 그리고 내부의 자아도 모두 자유로움을 진실되게 추구할 수 있어야 하겠지. 즉, 나는 예속 없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싶다는 희망의 무게만큼이나, 동시에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의지가 있는지 ...... 어떤 질문의 끝은 나 자신을 가리켜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걸 생각하면 아침에 보았던, 커피숍의 커다란 눈동자의 눈빛을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 그 여자의 섬뜩한 눈빛은 당신을 감시하고 통제하겠다는 눈빛이 아니라, 당신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을 쫓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눈빛이라고.

당신은 타자(他者)의 여집합에서 자유를 수집하려 했던 것인지를 묻고 있는 눈빛이라고,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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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른 이름들 민음의 시 224
조용미 지음 / 민음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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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세상에 두 부류의 시인이 있다고 해보자. 첫째 부류는 머리를 써서 몸 속에 있는 시를 몸 밖으로 끄집어 내는 시인인데, 이들에게 있어 시는 건져 올려지는 것과 다름 없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라면 더 없이 좋다. 정갈하게 자리에 앉아 어떤 것에 대해 시를 써보겠다고 하며 고요한 시간 속에 손 끝과 머리 끝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심상을 하나 둘씩 두레박으로 끌어 올린다. 가지런히 끌어올려진 단어와 문장은 몇 번의 교열 끝에 하나의 시가 된다. 두 번째 부류는 시인 몸 속에 차곡차곡 쌓여진 감각들이 어느 순간 차오름을 이기지 못하고 손 끝, 머리 끝을 통해 밀어 올려져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경우다. 이들에게 시를 짓는 일이란 반복되는 일상이라기 보다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몸의 각성과 같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류 중 시인의 본질에 가까운 것은 없다. 프리모 레비도 <휴전>을 쓸 때 한 달에 한 챕터씩 규칙적으로 글을 썼다고 했으니, 의식적으로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감각을 끄집어내는 것도 감응(感應)의 한 방편이다.

그러나, 조용미 시인의 <나의 다른 이름들>을 읽다 보면 시인은 꽤나 규칙적인 삶을 추구할 것 같은 위인이면서도 그가 시를 짓는 방식은 꽤나 규칙적이지 않은, 몸 속 깊은 곳으로부터 밀어 올려진 단어와 문장을 직조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 보여 주는 불교 교리, 폐사지, 매화, 축축한 감촉, 어두운 색깔, 영산홍의 세계는 시인이 꽤나 단정하고 규칙적이며 일과의 규율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동시에 단어와 문장에 숨길 수 없이 배어 나오는 영(靈)적이면서도 선(仙)한 기운은 도무지 이 감각이 머리로 의식하여 끄집어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그건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일상의 규칙과 영적인 불규칙이 만들어내는, 자신 안으로 침전하는 무한한 심연의 깊이가 시집을 쉽게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가의 시집을 네 권 정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마음을 알았다. 시인은 내가 사랑하는 몇 명의 작가들. 서경식, 신준형, 김혜리, 은유 이러한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

몇 명의 작가를 사랑한다고 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무슨 말일까. 나와 시인, 시인과 세계는 두 겹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시인이 보여주는 영적인 세계와 고요한 침묵의 언어를 나는 동경하고 그것들에 감응한다.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인식한 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시인과 결을 같이 하기 때문에 나와 닮은꼴이 있다며 안도하게 한다. 그러나 시인은 나를 마주보지 않고 있기에 나는 시인의 등을 바라보며 그를 동경한다. 시인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녀는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 지구에서 6천 광년 떨어진 곳에 이는 성운을, 벽 속으로 스며든 푸른 틈 사이로 보이는 깊은 푸른 세계를, 방 곳곳을 어지럽게 만드는 천리향의 미열을 차분히 앉아 눈을 감고 보고 있다. 그것들 역시 시인이 가 닿으려 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시인 역시 우주를 동경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를 감각하는 동시에, 각자 다른 존재의 등을 보며 당신을 동경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사랑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당신의 등을 바라보며 계속 움직이는 것을 말했다. 나는 시인에게, 시인은 우주에게 쉽사리 닿아 안착할 수 없음을 알기에 우리는 이 무한대의 움직임에 안도하며 기꺼이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 가끔은 저마다의 속도가 달라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설 때가 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면 향기로 숨이 가빠 온다. 천리향의 향기보다 사람의 향기가 더 지독했다. 겨울임에도 봄을 꿈꾸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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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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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장교 그리뇨프가 부임하게 될 벨로고르스끄 요새는 오렌부르끄에서 40 베르스따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고 했다. 베르스따는 러시아에서 예전에 사용하던 거리 단위인데 요즘 단위로 따지면 40km가 약간 넘는 거리다. 청년 장교가 귀족의 삶을 버리고 일선으로 투입된 오렌부르끄는 과연 어디에 있는 곳인가 ...... 지도에서 찾아보니 현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국경에 붙어있는 곳이다. 수도 모스끄바에서는 1,220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새로운 장소였다. 그 동안 읽었던 러시아 고전문학은 대부분 유럽에 인접한 모스끄바, 혹은 뻬쩨르부르그를 무대로 했는데, 뿌쉬낀의 <대위의 딸>은 시선을 과감하게 동쪽으로 돌렸다. 이곳에서 청년 장교 그리뇨프는 황제를 참칭하는 반란군의 수괴 뿌가쵸프와 인연이 섞이고 사랑하는 약혼자 마샤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 곁에서 사랑, 죽음, 이별을 경험한다. 여기에는 귀족들의 연회와 정치적 암투 대신, 검푸른 초원과 황량한 요새와 민중들의 삶이 담겨 있었다. 이 지점에서 다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보자.

한국이나 일본에서 도스토옙스끼의 명성은 참으로 높고,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은 곧 도스토옙스끼와 같은 말이었다. 나도 그랬다. 도스토옙스끼의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읽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이토록 광대한 세계관, 쉼 없이 등장하는 군상들이야말로 러시아 고전문학 그 자체라고 믿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 대부분이 진심으로 아끼고 자랑하는 알렉산드르 뿌쉬낀이야말로 이들 대문호에게 영향을 준 시발점이었다는 점엔 시큰둥했는데, 때문에 <대위의 딸>은 구입 후 오랫동안 서가 한 편에 버려져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묘사와 압축적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서사는 이것이 근 20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점을 의심하게 했는데, 책을 읽고 나자 위대한 러시아의 대문호가 뿌쉬낀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건 바로 민중에 대한 시선이었다.

<대위의 딸>에서 황량한 초원 속 오렌부르끄를 무대로 뿌가쵸프의 반란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여제를 중심으로 한 폐쇠적 사회 현상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등장하고 있고, 주인공인 청년 장교 그리뇨프는 위대한 인물도 아니며 굳은 심성을 지닌 주인공의 전형도 아니다. 그는 다양한, 얄팍한 감정 속에 몸을 내던지는 위인이며 삶을 자신의 뜻대로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지도 못한다. 그는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 받고, 우연에 의해 앞으로 나아간다. 스스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겠지만 그를 움직이는 건 그의 의지도 아니며, 그가 나아가는 길은 크게 바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런 민중에 대한 담담한 시선, 그리고 민중들의 수 많은 우연이 결합되어 만들어내는 것이 역사라는 담담한 시선, 뿌쉬낀의 소설은 경쾌한 스피드 속에 이전과는 다른 시선이 녹아 있었다.

때문에 <대위의 딸>을 읽으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떠올린 것은 조금은 필연적이었다. 역사는 특정 위인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수 많은 민중들이 함께 만들어 낸 동작 에너지의 합인데, 개인의 동작 에너지 역시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슬프게도 우연이 더 많이 작용한다는 것 ...... <전쟁과 평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보다 31년 전 출간된 <대위의 딸>에 함축적으로 이미 담겨있었던 것 아닌가. 바로 여기서부터 위대한 러시아의 리얼리즘 문학이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무언가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경쾌하고 함축적이며 간단한 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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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1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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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과연 그렇다면 당신은 과연 몇 초 이내에 소중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또 간신히 떠올린 기억이 다른 기억을 압도할 만큼 당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얼마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기억이라는 단어에는 사람, 사물, 공간, 시간 …… 수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서 질문에 답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였냐고 질문을 바꿔보자. 조금은 답을 하기 편해졌을까, 조금은 대답을 빨리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거다. 누군가를 특정하여, 당신이야말로 나의 삶을 이렇게 만들고 바꿔놓은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소중하다고 지목 당한 사람에 대한 책임감, 지목 당하지 않은 수 많은 인연에 대한 미안함, 두 가지를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감정의 지층을 파헤치고 고민하여 결국 가장 소중한 기억, 소중한 사람을 발견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내 그 지점에 당도한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삶이 한 점으로 귀결되는 무언가, 어딘가, 누군가는 있기 마련이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히브리어로 글을 쓰는 아모스 오즈의 대표적이자 자전적 소설인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는 작가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야기 한다. 작품은 흡사 민족주의 정서가 가득한 족보를 들춰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시작한다. 작가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각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또 그 위로 수 없이 많은 선조들이 살다가 죽었을 것인데, 작가의 지금을 만든 핏줄의 근원을 따라 백 년도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수 없이 많이 제시되는 등장인물은, 그들 모두가 작가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이토록 기억하려 애쓰는 것일까, 의문을 자아낼 만큼 생생하고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다. 몇 세대에 걸친 이들 유대인의 삶은 유럽에서의 홀로코스트, 몇 천년에 걸친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시오니즘,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무력 분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결합되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작가가 제시하는 등장인물은 실제 존재했던 사람이고, 작가는 실제 존재했던 시간을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잠깐 소설을 덮고 생각해보자.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간신히 비껴간 프리모 레비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의 한 순간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증언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작품의 마지막 문단에 당도할수록 점차 이것은 유대인의 처연한 삶을 다룬 증언 문학이 아니라 작가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작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 그가 열 두 살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그의 어머니. 그녀가 우울증과 편집증을 견디다 못해 생을 마감할 때의 나이는 서른 여덟이었다. 그러니까 작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그가 60년 전 떠나 보내야 했던, 지금 작가의 나이보다 30년이나 어린 나이에 머물러 있는 당신의 어머니를 추억하고 있는 거다. 작가의 어머니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 소설의 마지막 문단도 함께 끝이 났는데, 그제서야 왜 이토록 많은 등장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웅성대며 작품 곳곳에 등장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라는 하나의 인물을 향해 집결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남편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사촌 형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머니의 자매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 그들은 모두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했고 사그라졌다.

 

투시 원근법은 3차원의 물체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회화 기법이다. 입체적으로 그려진 물체의 선을 연결하다 보면 모든 선은 하나의 점에서 만나게 되는데 선과 선이 만나는 점을 소실점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 그려진 모든 물체는 하나의 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작가가 평생 살아온 삶은 당신이 열 두 살 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라는 점으로 귀결되는 삶이었고, 어머니라는 소실점을 향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과 또 한편으로는 처연한 어둠으로 가득했던 것인지 그를 증명하기 위해 80년 가까운 삶을 바쳤던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시대를 기록하거나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였기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한다고 외치는, 어쩌면 사랑의 증명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의 원근법으로 그려진 生 끝에는 단 한 사람이 서 있었고, 시간을 거슬러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기에 이 증명은 상대로부터 맞는 답이라 채점 받을 수 없는 …… 끝내 종결될 수 없는 사랑의 증명이었다. 2018년에 생을 마감한 아모스 오즈 작가가 당신의 어머니와 꼭 다시 마주하기를 바란다. 열 두 살 소년과 서른 여덟의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 ▨

(2019.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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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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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 아이는 밤 9시면 방에 들어가 한 시간 정도 뒤척이다가 10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잠에 든다. 그 한 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고, 몸을 구르며 장난을 치고, 이불을 뒤집어 썼다가 벗었다 반복하며 혼자 즐거워한다. 나는 아직 혼자 잠들지 못하는 아이 곁에 누워서 한 시간 동안 하는 일 없이 함께 있어주었다. 어느 날은 아이가 10시가 지났는데도 영 잘 기색이 없었다. 누워서 자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눈을 오히려 빛내며 계속 굴러다녔다. 11시가 다 될 무렵 이제는 재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에게 불쑥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그만 자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흔히 듣지 못하던 낮은 목소리에 입이 나왔고 샐쭉해졌고 이내 풀이 죽었다. 아이는 그제야 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 누웠는데, 벽을 보며 등을 돌리고 한 마디를 던진다. “아빠는 왜 나한테 화가 났어요?” 아이의 무심한 한 마디는 나의 밤을 길게 만들었다. 아이는 금방 잠들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아빠는 왜 나한테 화가 났냐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물음은 아빠와 나는 서로 어떤 존재이기에 당신이 나의 행동을 강제하고 규율 할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지 묻는 것과 같다 여겼다. 아버지와 딸의 혈연 관계가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서늘한 사회적 관계 또한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에 잠에 들지 못했다. 고작 딸 아이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크게 마음을 쏟는 것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김희경 작가의 <이상한 정상가족(동아시아, 2017)>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정상적인 가족, 정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한 것들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생각의 경직을 만들어냈고, 이 경직된 생각이 나는 정상적이고 너는 비정상적이라는 경계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내가 정상적이라고 믿을수록 나는 완고해지고, 나는 내 아이를 타자가 아닌 소유물로 간주하고, 나에게서 네가 멀어질수록 나는 너를 체벌을 통해 다시금 내게 길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나, 비정상적인 사람들 모두 스스로 정상적이라고 여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관계를 객관적으로 환원하기 쉽지 않다. 너는 나의 누군가이며 나의 무엇이지, 너와 나 서로 양립하며 감정과 정보를 교류할 개별적인 존재로 너를 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해야만 한다. 누군가 나를 소유할 수 없듯이 나 역시 타인의 행위를 소유할 수 없으며, 타인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 나의 아내, 나의 딸, 나의 부모, 누구든지 말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밤 11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 날을 다시 떠올려보자. 나는 아이를 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어는 나였고, 동사는 재우다였고, 목적어는 아이였다. 아이는 나의 행위의 목적지였다.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향하는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라는 것, 공동체는 누군가가 누군가의 목적어가 아니며 스스로 주어가 되어야 했다. 내가 아이를 재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잠에 드는 것,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며 배우고 감탄하고 삶을 익혀가는 것 …… 그것이야말로 함께 만들어가는 지극히 정상적인 공동체에 부합하지 않을는지. 나는 나의 방식대로 너를 길들일 수 없다. 아니, 길들여서는 안 된다.


https://blog.naver.com/marill00/221443058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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