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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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마주의 책 표지를 보였을 때 누군가 제목이 왜 마주인지 물어왔다. 제목이 말의 주인으로 보일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 뒤로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계속해서 마주가 왜 마주일까 생각했다. 이래서 마주였을까 싶은 어림짐작만이 남은 지금, 그 안의 모든 것들이 과거에서 왔을까 코로나라는 팬데믹에서 왔을까 궁금하다.


 지금은 2023년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쓰고 다니지 않는다. 코로나가 남긴 상흔이 모두 지워진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 코로나로 인한 제약이 일상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되찾은 일상 앞에서 마주를 읽으며 이게 정말 우리에게 있었던 현실이 맞았었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번호가 붙여져 격리되는 확진자, 대중앞에 공표되는 동선, 기피되고 비판받는 장소와 사람들. 잊고 있었던 것인지, 잊고 싶었던 것인지 모를 기억들을 마주하는게 편치 않았다.


 서로 마주하는 관계들 속에서 약간 무서움을 느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현미경으로 해부하는 듯한 적나라함, 왠지 모를 불편함을 빤히 바라보는 것 같은 껄끄러움이 느껴졌다. 남들에게 쉽게 호감을 사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늘어놓는 장단점들, 다른 관계를 회피하기 위해 남편과 결혼했는데 아이를 낳고 다시 여자들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했다는 토로, 은채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엄마의 시선인, 나리의 말. 


 " 그애가 내 거였을 때, 십년 전 오늘에, 십이년 전 오늘에, 나는 아이가 어떤 눈으로 나를 보며 우는지 본 적이 있다.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주문처럼 중얼거린 적이 있다. 크지 말라고. 여자아이가 되지 말고 내 아기로 있으라고. 나만 보라고. 

 소나무랑 소나기는 무슨 사이야, 엄마?

 이제 그애는 그런 걸 묻지 않는다.

 내 음식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하지도 않는다.

 앞니가 흔들린다고 울지 않고, 쥬쥬기타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혼자 운다.

 여자아이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운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문 너머에서 내 아이가 우는데, 나는 아이를 안지 못한다.

 어느 날은 생각한다.

 너를 처음부터 다시 키우고 싶다.

 어느 날은 애걸한다.

 은채야, 나 좀 안아줘.

 어느 날은 홀로 사무친다.

 은채야, 사랑해! (163) "


 아이를 혼낼 때, 아이를 울리고 또 달래주는 것이 온전히 자신의 손안에 있다는 충만함을 느끼는 나리의 내면을 무섭게 여기다가도 커가는 아이가 자신에게서 멀어짐을 느끼는 섭섭함과 어쩔 수 없는 사랑을 안타까워 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문득 나도 언제부터 엄마, 하고 울지 않게 되었더라 생각한다. 내가 혼자 울던 때 내 엄마도 저렇게 나를 달래주고 싶었을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다는 건 마음의 빗장을 쉽게 풀어낸다. 마냥 불편하게, 어색하게 마주를 읽다가 이내 마주가 좋아졌던 한순간이었다. 나리가 롯데월드 투썸에서 어색하게 여기던 수미를 받아들였던 것에도 그런 계기가 있었겠지 싶었다. 그러고나니 민들레가 심어졌을 비탈사과밭과 지금쯤이면 한창 빨갛게 익어갈 사과들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다. 추석을 앞두고 어쩌면 딴산의 그이들이 벌써 작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가옥 앞 정자에 앉아 있으려니 여름에는 수박바가 제철이고 가을엔 바밤바가 제철이라면서 여자가 바밤바 세개를 가져왔다. (218) "


 나리가 만조 아줌마가 하는 말에 흐흐흑 웃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어쩐지 재밌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철지나 별 것 아니라고 생각되는 말들도 유독 인상깊고 재밌게 느껴지는 말들. 어쩌면 마주 안에서 봤던 어떤 말들보다 이 싱거운 말장난이 가장 오래도록 또 빈번히 여름과 가을에 떠올라 사용되겠다. 나는 마주를 코로나로 인한 혼란과 상흔보다도 이 가벼운 웃음과 사과밭 풍경으로 기억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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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근육을 키우는 중입니다 - 14살부터 시작하는 회복탄력성 수업 마음이 튼튼한 청소년
실라 라자 지음, 김인경 옮김 / 뜨인돌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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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 이 규칙을 지키지 못해도 걱정하지는 마세요. (29) "


 '마음 근육을 키우는 중입니다'는 청소년을 위한 도서이지만, 성인인 나도 책소개글을 보고 관심이 갔던 이유가 '잠'과 '삶의 방식'이라는 주요단어들 때문이었다. 회복탄력성, 생활 습관 같은 것들은 요즘 의식하고 있는 주제들이다. 언젠가부터 친구와 오랜만에 안부를 묻게 될 때면 잘 지냈는지 대신 요즘 잠은 잘 자는지 질문을 받게 되었다. 지나가는 말로 밤에 잠이 잘 안와서 늦게 잔다, 그래서 낮에 힘들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했었나보다. 나이를 먹으며 피곤이 쌓이는 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친구의 안부인사를 떠올리니 옆에서 보기에도 염려될 정도라면 변화가 필요한 것 아닌가 싶었다. 왜 피곤할까, 왜 잠이 잘 오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가지는게 맞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몸의 근육을 키우는 운동을 평생에 걸쳐서 하듯이 마음 근육을 키우는 것도 청소년, 어른 모두 해야하지 않을까. 


 실제로 책의 초반 동안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책에 관심은 가더라도 내용이 재미있을 것이라는 기대로는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1부의 내용은 이 책에 대한 그런 예상을 바꿔주었다.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 눈길이 가는 곳은 사진으로 찍어두는데, 수시로 사진을 찍어두게 되어 조금 귀찮았을 정도다. 기대감을 변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책이 강압적이고 확고한 어조를 사용하지 않고 부드러운 태도로 독자를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초반부에 " 회복탄력성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17) " 고 안내해 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달성하기 위한 목표로 성공, 실패로 셈하지 않고 한번 이렇게도 해봐야지 시도해봐도 된다는 접근 방식의 변화가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1부의 내용들이 요즘 내가 많이 생각하고 있는 '일상의 규칙'이라는 주제와 겹쳐서 더 몰입이 잘 됐다. 청소년기에는 주위 어른들이나 학업 과정을 통해 관리/도움을 받을 수 있던 음식, 수면, 운동, 생활습관 같은 것들이 모두 자신의 책임과 관리 아래에 놓이게 되면 자유롭지만 흐름이 흐트러지기 더 쉽다. 그래서 오히려 어른들이 이 책을 더 실감하고 필요로하지 않을까 싶었다. 책 안에 "식사와 운동 습관 기록하기(36)" 목록이 있는데 네개의 질문으로 네번 얻어맞은 기분이 드는 것들이었다. 몇 대 맞았나 생각해보자.

1 일주일 동안 어떤 채소를 먹었나요?

2 일주일 동안 먹은 가공식품(과자, 사탕, 탄산음료 등)을 써보세요.

3 일주일 동안 패스트푸드를 몇 번이나 먹었나요?

4 일주일 동안 운동(체육 수업, 요가, 빨리 걷기 등)을 얼마나 했는지 써보세요.

 

 " 우리는 전체 공개로 게시물을 올리고 '좋아요'를 받는데 집착하는 문화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런 문화에 참여할지 말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요. (41) "

 그 뒤로 이어지는 소셜미디어 의존 부분에서도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 서평을 쓰는 알라딘에도 전체공개와 좋아요 기능이 있지 않은가까지 생각이 미치면 중독이 맞는지 아닌지 스스로의 내면에서도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 자신에게 하는 말에 관심을 가져 보면, 그 말들이 대개 과거나 미래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가끔 우리는 과거나 미래를 너무 신경 쓰느라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놓치기도 해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유일한 순간이데 말이죠.(66) " 

 지금을 놓치고 있다는 것, 도전을 포기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마치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는 척하는게 쉽고 익숙하지만 아무 도움은 되지 못한다는 걸 되새겨보게 되는 부분이었다. 전에 제대로 못했었는데, 혹은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큰 두려움이 되는 사회지만 조금씩 한번 해보니 이렇다는 걸 알게됐어, 실패할수도 있는데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하고 도전해보게 되도록 조금씩 생각을 바꿔 '경험'을 시도하는 문턱을 낮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덧붙여 살짝 다른 이야기지만 소셜미디어 중독과 함께 생각해보면, 여행이나 특별한 경험을 할 때의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때도 있지만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위해 눈으로 보기 보다 사진과 영상을 남기려고 렌즈나 화면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간이 더 길지 않았나? 이런 질문들이 책을 읽으며 수시로 떠올랐다. 

 

 이 뒤로도 1부에서 "마음 챙김 취미 활동(74), 마음 챙김 식사(75)" 같은 주제가 나오면 멈추지 못하고 관심이 쏠린다. 게다가 단어 사용마저 청소년보다는 2~30대 성인들의 관심에 더 적합한 느낌이라 책의 1/3을 읽으면서도 대부분의 내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며 빠져들어 읽게 되는 것이다. 다만 2부와 3부의 내용은 좀 더 청소년의 나이대에 맞는 조언을 담고 있어서 큰 흐름을 훑어보듯 읽었다. 아무래도 그 시기의 정서적인 부분은 좀 더 예민하고 또래 집단의 영향이 큰 편이라, 이제는 공감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3부의 "합리적 사고방식 기르기(203)" 문항들은 인상적이다. 4부에서 나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를 자신보다 타인에게 적용하려 노력하는 중이라 집중해서 읽었다. 타인의 실패를 경험으로 말해주고 타인의 실수를 공감해주려 하는데 쉽지 않다.  


 청소년 도서 중 문학작품이 아닌데도 공감하며 흥미롭게 읽었다. 애초에 어른스럽고 성숙한 삶의 규칙과 태도를 가지고 생활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배움은 끝이 없는 것이니까. 이렇게 지내도 괜찮을까 하는 자기 반성과 함께 생활 습관, 태도, 생각을 좀 바꿔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보자. 읽기 편하고 공감되는 내용이 1부와 4부에 특히 많다. 경우에 따라선 2부, 3부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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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추억 전당포
요시노 마리코 지음, 박귀영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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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른들은 일부러 바닷가 절벽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6) "


 처음부터 의심하면서 읽었다.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라니, 사실 마법이 아니라 아이들의 상상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일부러 전당포가 있는 절벽에 가지 않고 아이들의 상상을 지켜주는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벌써 간파해냈지' 하는 기분으로 저 문장을 가장 먼저 꼽아놓았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또 다른 감상이 마음 속에서 생겨났다. 그래서였구나. 모든 것에는 끝이 있어서.


 " "납득한 게 아니에요. 그 애의 사고방식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면도 있어요. 단지 저나 모두가 알고 있던 정답을 말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탁 말해버리다니 멋지다고, 나중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다음부터는 점점. 감기가 아니라 주말만 돼도 만나지 못해서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져요."

 인터뷰가 계획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폭주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리카는 어색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저는 당신도 그런 상대가 있지 않을까 하고, 그걸 알려줬으면 한 거예요."

 마법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리에게 보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어.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

 "어, 그런가요?"

 "그래. 왜냐하면 우리 마법사는 생명이 영원하거든. 그래서 지금 만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어. 너희 인간이 누군가를 정말정말 만나고 싶어 하는 까닭은 언젠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날이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43) "


 사실 얼마 전 가만히 누워 한결 시원해진 바람을 맞다 문득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을 거리에서 지나쳐가며 살아가고 있는데 왜 과거에 알게 되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일은 적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학교 다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을 반이 달라지거나, 졸업을 하고 난 뒤로 이렇게 평생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고 이별한 적이 있었나 짚어봤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수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테지만 어쩌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인연들이라 생각하니 모두에게 조금 더 잘할 걸 싶었다. 그때는 그런 걸 알수도 없고 또 알았다하더라도 이런 식의 후회를 할 거라고 생각치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요시노 마리코의 '반짝반짝 추억 전당포'도 그런 만남과 헤어짐, 기억과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깊이있게 누군가를 사귀고 이어지는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마음과 태도의 중요성을, 지우고 싶은 쓴 기억이나 즐거웠던 기억 또 아무리 사소하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한 부분이라도 자신을 이루는 소중한 조각임을 추억 전당포를 이용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조용히 비추어준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되겠지만 막상 천천히 책을 읽으며 리카와 하루토의 성장을 지켜보고 나면 마지막에는 감동하게 된다. 이렇게 순수한 감동을 준다는 점이 좋아서 청소년 도서를 읽는게 좋다.


 창을 닦는 달팽이와 차를 내어주는 다람쥐, 쓰다듬을 받는 갈매기 같은 동화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마법에 걸린 사랑'이란 디즈니 영화를 몇번이나 반복해서 볼 정도로. 표지에 있는 다람쥐를 보고 처음에는 인형이라고 생각했는데 매번 집안일을 돕는 야무진 모습으로 등장해 읽는 재미가 있었다. 어른이더라도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내가 '반짝반짝 추억 전당포'를 읽었다면 그 날 밤에 침대에 누워서 나라면 어떤 추억을 맡길까 고민하다 잠들었을테다. 물론 지금도 그러긴 한다. 독후활동으로도 아주 좋은 주제가 여럿 나올 책이라 읽어보기 참 좋을 것이다. 책을 읽고 생각해보자. 나라면 어떻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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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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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응축 영역'이란 사랑의 감정이 응집되는 대상 곧 사랑의 파트너를 말한다. '정박 지점'이란 사랑이 닻을 내리는 지점 곧 사랑하는 이유다. 문제는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슈미츠는 '먼저 죽은 파트너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사례로 든다. 그 경우에 사랑의 대상은 현재의 여자이지만 그 사랑의 목표는 과거의 여자다. 응축 영역 곧 사랑의 대상과, 정박 지점 곧 사랑의 이유가 분리돼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파국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84/사랑은 왜 깨지기 쉬운가) "


 [그앨 정말 좋아하나 / 너를 닮아서 사랑하나 / 흔들리는 마음은 점점 알 수가 없어]

오래 전 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사랑의 딜레마'는 이리도 가까운 곳에서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의 어긋남을 노래하고 있었다. 읽으면서 쉽지 않다고 몇번을 되뇌이고 있다가 직관적으로 '이건 나도 예를 들어서 설명할 수 있겠는데?' 싶은 깨달음이 온 부분이다. 어렵지만 어렵지만은 않다. 


 '생각의 요새'는 약 500여쪽에 달하는 인문학 도서다. 책의 소개로는 '오컴의 면도날'같은 간결하고 선명한 언어로 사상가들의 생각과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고 하지만 일단 어려워보인다. 하지만 어려운 말 쓰지 말라고 화내는 것보다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배워가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보려 도전했다. 나와 같은 입장의 사람들에게 좀 더 유혹적인 리뷰가 되었으면 해서 다가가기 쉬울 감상을 소개글보다 먼저 넣어보았다. 면도날은 아니더라도 가위정도는 될만한 시선이었다면 좋겠다.


" 루만은 사회적 체계가 '소통'(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소통은 정보를 알려주고 그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통은 '정보-통보-이해'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누군가 생각 곧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통보하면, 그것을 받아들여 이해하는 순간에 소통이 성립한다. 생명체가 끊임없는 신진대사로 자기를 유지해 가듯이, 사회적 체계도 끊임없는 소통의 반복으로 자기를 유지해 간다. 만약 소통이 사라지면 사회적 체계는 소멸한다. (106/체계이론과 주체 없는 사회학) "


 요즘 SNS를 처음 이용해봤는데, 허공에 아무말을 말해보는 기분이 들어 사람들이 왜 이런 걸 하는걸까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친구라 서슴없이 부르고 '소통'하자며 하트를 남기는 것을 부럽게 바라보며 SNS 초보는 혼자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는 왜 가장 깊고 내밀한 공간에 들어앉아 그림자 같은 상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내고 소통을 이야기할까. 소멸되고 싶지 않은 사회적 체계가 우리 내면 무의식에 자리잡아 어디로든 무엇이라도 발신하여 수신을 얻어내라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부 흡충이나 촌충이 숙주를 조종하는 것처럼.


 또 하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 오늘날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선거로 대표를 뽑는 '대표제 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를 뜻한다. 그러나 대표제 민주주의는 '인민의 직접 통치'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열등한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할 여건이 돼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택한 차선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124/대표제의 길, 민주주의의 길) "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홉스와 루소의 사상이 충돌하는 부분에 이르러(126) 요즘 시기에 이 부분의 내용을 읽는다면 공감도 되고 생각할 점도 많을 것이다. 


 " 대표제는 다수의 의지로부터 떨어져서 대표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을 허용한다. 나아가 스스로 의지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대표해서 행동하는 것도 대표제에서는 가능하다. 그런 차원의 대표제가 적용될 수 있는 사례로 이 책은 환경. 생태 문제와 미래 세대 문제를 든다. 지구를 대표해 온난화 문제를 제기하고 싸우는 것,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대표해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다. (127/대표제의 길, 민주주의의 길) "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를 대표해 지금 세대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가능하다.(128)"로 이어지는 책의 내용은 꽤 강렬하게 다가왔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떠올리며 대표제의 명암을 가늠해보았었는데, 지난 24일을 기점으로 연일 이어지는 뉴스를 보며 특히나 생각이 많아지는 부분이었다. 


 책의 몇몇 부분과 함께 나의 짧은 감상을 정리하며 리뷰를 남겼는데 어떤 부분은 좀 멀리 떨어져서 흐린눈을 하고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생각이 알 수 없는 곳으로 튀어 한동안 멀거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몸 테크닉(142)'과 '헤게모니 투쟁과 대중문화(149)' 부분을 읽으며 언급되는 하비투스, 대중문화에 대해 생각하다 이런 속도로는 연말에나 완독하여 리뷰를 쓰겠구나 싶어 초반부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추천글을 남긴다. 생각보다 흥미로운 내용도 많고 생각이 튀어가는 지점이 재밌으면서, 빨리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처서가 지나고 날이 선선해지는 시기가 오고 있으니 당신에게 사유를 선물할 '생각의 요새'를 하나 지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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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
델핀 페레 지음, 백수린 옮김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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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왔어도 한낮을 지독하게 울리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듣다보면 여름이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올 여름은 확실히 각별하다. 코로나와 이런저런 사정으로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떼어 여행을 다시 떠나게 되었다. 이제는 가족들도 각자의 생활이 있어 가족 여행을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전부는 아니어도 거의 모두가 3일에 걸친 여행을 함께 떠나 힘들고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나면 오래도록 함께 이야기 할 추억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흡족한 한편, 확실히 가족 여행은 힘들다.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을 보니 마음에 더 와닿는 부분이 많고, 제목마저 더 내 이야기 같은 공감이 됐다. 수채로 연하게 그려진 그림이 보여주는 이야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글로 써진 이야기는 얼마 되지 않지만 하나하나 다정하고 애틋하다. 엄마와 할아버지 장의 여름에서, 엄마와 세티에게로 이어지는 추억들은 단단한 고리가 되어 가족을 하나도 강하게 묶어주는 듯 하다. 


 여행의 마지막에 그토록 꼼꼼히 챙기던 우산을 잃어버리고 돌아온 탓에 세티가 종종 모자를 찾는 부분에서 책장을 멈춰 분실물 센터를 한참동안 뒤적였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우산이 분실물이 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니. 우산을 키워드로 한 3일간의 습득물 신고 내역을 둘러보는데도 500개 이상의 목록을 훑어야 했다. 그 많은 우산들 중에 내 우산은 없었다. 나도 우산이 필요했던 다른 여행자에게 내 우산을 선물했다고 생각해야 할까.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 오랜만이라 마음이 헛헛하다. 이 여름의 유일한 아쉬움이 될 듯 하다.


 책의 마지막은 아이가 엄마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이었다고 말하며 끝을 맺는다. 하지만 나의 여름은 이제 더이상 아이가 아닌 나의 감상보다도 함께한 짧은 시간이 올해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게 해주었고, 어떤 여행이었는지 부모님의 감상이 궁금한 시간이었다. 분명 모든 것이 다 좋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함께해서 아름다운 여름'이었다고 여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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