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출신 한국사 연구자이신 마르티나 도이힐러 (Martina Deuchler) 런던대 명예교수의 연구서입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학자께서 경북 안동과 전북 남원의 출계집단의 변천을 추적해 어떻게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왔는지를 추적한 사회사입니다.

출계집단이란 부계와 모계를 통해 공통의 조상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초기에는 가계도에 부계와 모계를 모두 기록하다가 조선에 신유학이 도입된 이후 부계중심으로 바뀝니다.

조선의 부계중심 종족제도의 출현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16-17세기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고, 조선에서는 유교식 부계종족과 토착적 기반의 문중을 동일한 제도로 담아내는 절충으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p715).

따라서 조선은 특히 지방의 경우 통치는 정부의 ‘공적’조직에 기반하지 않고 중앙정부는 지방을 종족제도를 통해 ‘사적 통치 (private governance)’를 하는 사족(士族)집단과 갈등관계에 있었고 지방의 사대부, 즉 사족들은 종족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신분과 이익을 지켜냈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경우, 출생과 출계가 엘리트 신분을 상속 가능하게 했지만 , 중국은 이론상 엘리트 신분은 사회적 출신과 무관하게 오직 과거급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p721).

한국의 이런 출계 기준의 국가와 사회는 엘리트 신분과 비엘리트 신분의 구분을 확실하게 만들었고, 비엘리트 층의 상향이동이 극히 제한된 사회였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확대된 상태로 서울에 근거를 둔 소수의 경화사족(京華士族)만이 권력에 접근이 가능하고 지방의 사족들도 점점 과거급제가 어려워지게 되면서 이들은 자신의 출계집단과 서원 그리고 유향소 등을 통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과 경쟁하고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족들 중에서도 서얼(庶孼)들은 적서차별의 벽에 막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고 향리(鄕吏)들고 출세길이 막혀 결국 지방정치 부패의 온상이 되고 맙니다.

이미 노비들이 실질적인 경제활동의 당사자인데도 사족들의 견고한 기득권에 막혀 착취당해온 내력은 다른 책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노비는 조선 조정이 필요에 따라 세금을 더 걷기 위해 양인 여성과 노비의 결혼을 용인하기도 하고 농업과 가내 노동력의 필요에 따라 노비는 재산으로서 경제적 가치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조선은 노비들의 노동력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경직적인 엘리트 양반위주의 견고한 신분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경직적 신분사회를 만든 엘리트 제도를 존속시킨 건 신유학이 아니라 ‘토착적 친족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합니다(p727).

그리고 조선의 신분제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갑작스럽게 폐지되었으나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는 신분의식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아직도 스멀스멀 살아있다고 느낍니다.

아직도 학벌에 목매고 고시출신들 실력에 관계없이 실력이 있다고 믿는 세태가 신분제의 긴 그림자가 아직 한국사회를 배회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네요.

끝으로 이 책의 외형적인 구성을 보려합니다.
본문만 총 729쪽의 벽돌책으로 총 14장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신라부터 조선말인 19세기까지 다루지만 주로 조선 중기가 중심으로 생각됩니다.

저자가 2015년 Harvard에서 출판한 영문본을 너머북스에서 2018년 번역한 책입니다.

책을 보면 저자가 안동과 남원 등지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들이 가득합니다. 저자가 오랜시간 한국을 탐구한 자료들이 집대성한 책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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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명의 공저자들이 각각 본인에게 전문적인 도시에 대해 맡아서 쓴 책입니다.

대표저자인 경희대 민유기 교수의 서문에 따르면, 전작인 ‘도시는 기억이다 (서해문집,2017)의 후속편으로 기획된 책이 이 책으로 상기의 전작이 주로 서양의 도시들을 다루었기에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 그리고 러시아 극동지방까지 포함)의 도시를 다루었다고 합니다.

총 21곳의 동아시아 도시를 모두 여기서 소개할 수는 없고 몇몇 도시를 선별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식민도시편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세력이 충돌했던 중국 동북의 관문 다롄과 하얼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싱크탱크였던 만철(滿鐵, 南満州鉄道株式会社)의 본사가 위치했던 교통의 요지로 19세기 청일전쟁 승리후 일제가 차지하였으나 영국, 독일, 러시아의 간섭( 삼국간섭, 三國干涉,1895)으로 요동반도의 영유를 하지 못한 곳이기도 합니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암살로 한국인들에게 잘알려진 곳이지만 도시 자체가 제정 러시아시기 러시아인이 건설한 곳으로 러시아가 중국 대륙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도시이기도 합니다. 연해주의 송화강 인근의 도시로 개인적으로 아직도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도시입니다.

식민도시편의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편은 너무 글이 짧고 단편적입니다. 특히 페낭의 경우는 얼마전 읽었던‘ 아편과 깡통의 궁전( 푸른역사,2019)‘를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영국식민지 페낭의 화교사회와 아편사업, 주석채굴사업 등에 관한 민족지적 성격의 사회사이지만, 페낭의 도시발달 등 산업적인 측면을 이해하는데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문화유산도시로는 일본의 마쓰야마(松山)편이 흥미로웠습니다. 일본의 국민소설가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郞)가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쓴 1969년에 쓴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의 공간적 배경이 마쓰야마입니다. 이 역사소설은 2009년 일본 NHK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이 한국인의 주목을 받는 건 이 소설이 보여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시각 (perspective) 때문입니다. 시바 료타로는 일제가 처음 저지른 두 전쟁을 일본이 제국주의 시대를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두 전쟁을 일으켰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면을 부각한 그의 역사관은 후에 ’역사수정주의‘로 대표되는 일본의 우익 교과서 개정운동으로 이어지고, 한국에도 영향을 미쳐 친일극우적인 ’뉴라이트‘운동이 일어납니다.

전쟁범죄를 저지르고도 사죄를 하지 않는 ’기이한‘ 일본극우들이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서구의 많은 일반인들이 아시아 국가에 관심이 없지만 소위 동아시아 전문가 중에서도 일본이 저지른 ’난징대학살( Nanjing Massacre,1937-1938)‘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미국의 도움으로 미국의 공산주의 봉쇄정책에 대한 필요 때문에 전범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던 일본은 그들이 저질렀던 전쟁범죄를 은폐해서 이런 일이 생긴겁니다.

산업군사도시 편에서는 우선 인천의 부평과 울산이 흥미로웠습니다.
부평은 현재 경인공업단지의 주요한 지역인데, 개발의 역사가 일제시기까지 거슬러올러가며, 최근 위안부 할머니들의 청구권 문제로 뉴스에 나온 미쓰미시(三菱)중공업이 병기창을 만들어 중일전쟁 당시 군수품 보급창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당연히 이곳에 병기창과 더불어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의 패전 후에는 미군이 주둔했던 곳입니다. 부평의 미군부대 반환지인 캠프 마켓(Camp Market)은 토양오염 문제로 역시 뉴스에 나오다가 최근 인천식물원으로 개발된다고 합니다.

일제는 서울과 가까운 영등포에 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인천과 서울 사이에 위치한 부평에도 역시 공업단지를 만들어 수도권의 공장지대를 만든 겁니다. 1960-70년대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은 일제가 만들어놓은 도시계획과 산업화 정책을 이어받은 면이 큽니다.

이런 면에서 현재 석유화학단지로 유명한 울산도 부평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일제는 원산에서 정유설비를 대거 울산으로 이전해 일본과 가까운 울산을 전쟁 병참기지로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패전으로 정유설비는 70% 정도만 옮겨졌고, 박정희 정부는 이를 마무리한 겁니다. 예상과 다르게 박정희 군사정부는 경제개발을 혼자서 다 한게 아닙니다. 이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이 군사정권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도시의 역사가 흥미로운 건 이 도시계획이 경제개발계획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공장 등의 입지조건 등을 따지고 부지를 결정하는 일련의 절차가 모두 지역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결국 경제문제라고 정의한다면 한 지역이 개발되어 공장이 들어서고 그 배후에 주택이 들어서고 도로가 정비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이 바로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열거한 물리적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개개의 물리적 공간을 보는 건축도 결국 살아가는 거주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이를 집합적으로 모은 공간이 또한 도시이기 때문에 결국 건축과 도시와 산업과 생산소비경제는 모두 연결된 겁니다. 어느 하나만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조금씩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 책에 나온 도시들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연구가 수록된 책이 발간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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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청국(大淸國)은 한국인들의 뇌리에 조선 인조 재위시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을 일으킨 ‘오랑캐’의 나라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청국과 관련된 역사서는 대부분 전쟁사이거나 대외관계사 등 정치 군사적인 면에 집중하는 면이 강합니다. 또는 만주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에 살던 여진족( 女眞族)이 어떻게 중원을 정복하고 중국의 영토를 확장했나 하는 점을 강조해서 서술합니다.

장한식,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산수야,2015)
유근표, 인조 1636 (북루덴스,2023)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중국 청대의 경제와 사회를 다루는 한글로 된 단행본은 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번역본이 아니라 국내학자가 저술한 경우는 극히 드문경우라고 봅니다.

책은 서구의 경제성장이론 혹은 산업화 이론과 청국의 실제 사료를 검토해 청국의 경제가 유럽 특히 영국과 아시아의 일본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청국의 경제가 전 왕조인 명과 어떻게 다른지 화폐경제적 측면 (monetary economic perspective) 과 상품경제적 측면 (commercial economic perspective)로 구분해서 살핍니다. 중국 청대가 중요한 또하나의 이유는 이 시기가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와 겹친다는 데 있습니다. 같은 시기 중국과 영국을 포함한 서구가 어떤 경제발전의 경로를 따라왔는지 살피는 건 의미있는 비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비교는 왜 서구에서 산업혁명( Industrial Revolution)이 먼저 일어나게 된 경위에 대한 설명이 될수 있습니다.

또한 서구의 경제발전모델 이외 중국이 어떤 발전경로를 따라왔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쿠즈네츠 ( Simon Kuznets)의 경제성장론과 케네스 포메란츠(Kenneth Pomerantz)의 대분기론도 언급됩니다.

청대의 경제발전 수준을 시기별로 보자면 18세기까지 서구와 별반 차이없는 수준을 보이다가 19세기에 서구에 뒤쳐지게 되는데, 포메란츠가 말한 대분기란 서구와 중국의 경제적 생활수준의 ’격차‘가 급격히 벌어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 경제사가는 18세기 중국과 서구의 격차가 별로 없다는 걸 대분기라는 그의 대표 저서에서 논증합니다. 이책은 별도에 글에서 다시 다룰 예정입니다.

Kuznets,S., Toward aTheory of Economic Growth (W W Norton,1968)

Pomeranz,K.,The Great Diverge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2000)

이론적인 배경에 대한 논의는 여기에서 마치고 청나라의 경제가 도대체 어떠했는지 간략하게 살핍니다.

청나라는 예상과는 달리 화폐경제를 기반으로 한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때부터 유입하기 시작한 멕시코와 일본의 은이 중국대륙에 들어와 있었고, 거기에 청조정과 지방정부에서 동전을 만들어 유동성(liquidity)을 공급했습니다. 명대에 조정이 동전공급에 소극적이었던 사실과 달리 청 조정은 동전을 시장에 공급해 부의 이전이 하층 계급에게도 용이하게 했습니다.

다만 명청시대는 현재와 같이 그리고 서구에서 생각하는 화폐의 본위제(standard system)을 채용해 일정 양의 은과 법화의 가치를 연계시키지 않았습니다. 표준적인 화폐론 교과서에 나오는 금본위제 혹은 은본위제는 그 역사적 연원도 개념도 모두 서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청대 중국은 서구와는 다르게 본위제를 선택하지 않고 다양한 동전을 중앙과 지방정부 그리고 민간업자들이 만들어썼고, 따라서 가치나 규격도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은도 은화를 만든게 아니라 은괴를 무게를 달아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상업거래에 있어 고액결제는 은으로 소규모 결제는 동전으로 하는 복합적 화폐경제체제였습니다.

저자는 청 조정이 18세기 건륭제 제위기에 특히 동전을 대규모로 유통시킨 사실을 현대적 의미에서 중앙은행의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과 비슷한 정책으로 보고 이런 유동성 공급을 통해 인플레이션이 유발되고 부의 집중이 일어났지만 한편으로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어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향성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중앙집권적 근대 국민국가체제에 익숙한 현재 우리가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체제이지만 청대 중국은 예상과 달리 황제의 권력이 지방에 이르지 못했고,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그 지역을 나름의 방식으로 통치하는 분권적 체제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각 지방마다 말도 다르듯 도령형도 다르고 화폐도 다양하게 운영된 겁니다.

북경의 황제가 엄연히 통치하는 황제국이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국 청대의 경제체제는 자유방임( laissez-faire)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경제체제의 제도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보수진영에서 주장하는 ‘자유경제체제’는 말만 들으면 정부는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경제가 잘돌아갈 것처럼 들립니다. 경제에 대해 잘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화폐의 경우를 보더라도 위의 청나라처럼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결제방식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 현재처럼 국가가 법정통화를 발행하고 그 법정화폐의 가치를 정한다는 건 국가가 경제행위에 제도적으로 개입한다는 말이고 실제 한국을 비롯해 자유주의 경제를 지향하는 모든 서구국가들이 이런 제도를 채택합니다. 이 화폐경제 시스템이 전제되어야 자유로운 물품의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현대경제에서 국가는 개입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기본적인 ‘국가의 책무’입니다.

끝으로 이책의 마지막에 나온 ‘선대제 수공업’에 대해 언급합니다.

서구의 산업화이론에 따르면 자금과 장비를 선대업자에게 제공받아 임노동을 제공해 완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초기 생산방식이 공장제 메뉴팩쳐링(manufacturing)으로 가는 전단계라고 해서 선대제 수공업의 존재여부가 산업혁명으로 가느냐 못가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청대 중국의 경우 선대제 수공업이 일반적이지 않아 중국이 산업혁명에서 뒤쳐진 걸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중국의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해석오류였습니다.

서구와 일본의 경우 중앙집권적 권력이 자리하고 자본이 집적되어 자본가층과 노동자 층이 형성되어 시장에서 고립되고 가진돈이 없는 농민들이 선대제 수공업에 참여하여 부수입을 올릴 수 밖에 없었지만, 중국의 농민들은 시장접근이 자유롭고 국가의 통제가 거의 없는데다 독립적으로 수공업을 영위해도 판로가 있기 때문에 굳이 선대제 수공업으로 갈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중국의 상황을 구태여 서구의 산업화이론에 꿔어 맞춰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도 솔직히 의문입니다. 이 케이스는 선대학자들이 역사적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섣부른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근세와 현대 중국에 대한 책을 보면 우리가 현재 표준으로 알고 있는 자유주의 경제체제, 민주주의 경제체제가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18세기 이후에 확산된 새로운 생각이고 그 이전 수천년 동안 서구건 아시아건 모두 전제주의 정치체제에 속해있었습니다.

더구다 청대 중국은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으로 황제가 절대권력을 경제행위에 행사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화폐제도도 정비하지 않고 신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농사짓고 상품거래하는 걸 방임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중국경제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새로운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최소 1842년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은 경제자원이 분권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특별하 산업혁명이 필요한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서구의 눈으로 볼 때 이 상황을 자신의 상황과 비교해 중국이 ‘후진적’이라고 해석할 소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책의 부제에 있는 ‘협치’가 과연 책에서 설명이 되어 있는지 좀 의구심이 있습니다.

청대 중국이 중앙집권적으로 통치된 것이 아닌 것도 맞고 지방의 토호세력들과 사대부들이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건 사실인 듯하지만 이 사실이 바로 북경의 조정과 ‘협치’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결론에서 갑자기 이 용어가 튀어나와 좀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 협치는 좀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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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과 깡통의 궁전 - 동남아의 근대와 페낭 화교사회
강희정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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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당시부터 독특한 내용의 책이 출간된 듯해 관심을 두고 있다가 오늘 책을 다 읽었습니다.

이책은 굳이 풀이하자면 중국인의 말레이반도, 특히 페낭(Penang)지역의 이주사이고 사회경제사입니다.18세기 말 영국의 말레이 반도 페낭점령( Penang occupation)과 싱가포르 식민지 건설 그리고 네덜란드와의 협정을 통한 말레이반도 전체에 대한 식민지 경영이 모두 포괄되기 때문에 영국이 어떻게 동남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정책을 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청나라와 영국이 맞붙은 아편전쟁(Opium War(18040-1842, 1856-1858)이 단지 중국 본토에서만 일어난 전쟁이 아니고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영국이 인도산 아편을 팔아 식민지 통치 재정에 쓰는 동남아시아 아편체제 (Opium Regime)라는 맥락(context)에서 일어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페낭의 화인사회에서 페낭의 중국상인들이 영국이 인도에서 수입한 아편을 사서 가공해 같은 동포들에게 아편을 파는 사업을 하고 그에 대한 세금을 영국 식민당국에 대납하는 아편사업청부제를 통해 부를 축적했고, 이후 말라카 해협의 수마트라에서 주석광산업을 통해 거부로 거듭났으며, 사실상 말라카 해협 북부의 경제력을 장악했습니다. 그 기간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말까지 약 120년간이었습니다.

이들 중국상인들은 출신지역이 주로 중국의 남방지역 출신으로 페낭의 거상들은 주로 복건성(福建省)출신이 많았고 광동성(廣東省)출신도 많았습니다. 이들 중국성인들은 지연과 혈연 그리고 혼맥을 통해 강한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19세기 말까지 말라카 해협 북부에서 강력한 화인경제권을 이루었습니다.

말라카 해협의 말레이 반도에 영국이 식민경영을 했지만 인원도 조직도 아무것도 없던 영국은 이 120여년간 이주한 중국인들에게 경제권을 주고 세금을 대납하게 하면서 사실상 동업관계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20세기 들어 영국과 유럽의 자본가들이 말레이 반도에 고무사업에 투자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인을 이용하던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인종적인 편견( racial prejudice)을 여과없이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페낭이나 싱가포르 출신 중국인들 중 영국국적을 가지고 영국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들도 영국 식민당국애서는 이들이 ‘중국계’라는 이유로 영국제국의 ‘2등 신민’ 대접을 받았습니다. 영국인들은 당시 자신보다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중국인이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유럽인과 동양인 중 유럽인이 우수하고 유럽문명이 선진적이라는 이해가 엘리트들 사이에 일반적이었습니다. 거기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라 동양의 유색인종이 열등하다고 생각했고 말라카 해협의 영국 식민당국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미국과 서구에서 중국과 해외의 화교(華僑)세력이 결합하는 걸 몹시 경계하고 있는데 특히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에 화교 거상(巨商)들이 이미 200여년 전부터 지역의 경제력을 장악해왔다는 점을 보면 그들의 두려움에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제국은 이미 말라카 해협 북부에서 런던자본시장의 규모로 이 지역 화상들의 경제통제권을 빼앗아 온 역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미국과 유럽 서구국가들과 중국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은 서구와 중국사이에 오래된 황화 (黃禍, Yellow Peril)론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업습니다. 황화는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색채를 띄고 있고, 서구인들은 직접적이지 않아도 늘 유색인종을 무시하고 업신여겨 왔습니다.

이제야 새삼 흑인의 삶은 중요하다( black life matters) 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양성(diversity)를 이야기하는 이면에는 일이 언제나 인종주의자이자 유색인종 차별주의자라는 방증밖에 되지 않습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헤게모니를 잡은 서구세력은 그
이전 동양에서 중국이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과 청대 은본위 경제의 규모를 일부러 잊으려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한가지 지적할 것은 이 책의 저자가 역사가이기는 하지만 사회경제사 전문이 아니라 중국미술사 전문가라는 점입니다. 서론에서 밝혔듯 이 책은 페낭의 화인사회의 예술을 개관하기 위한 ‘배경’으로서 사회경제적 조건을 따져보기 위해 집필된 책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미술사가와 문헌과 함께 예술품 실물을 같이 연구하는데 비해 이책은 방법론적으로 문헌학적인 방식에 치중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책에는 주로 중국어와 영어문헌이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책 분량을 보면 본문 약 450여쪽에 달하는 중간 분량의 연구서입니다. 하버드 방식의 문헌 인용에 충실한 책이고, 연구서나 논픽션을 읽는데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용의 밀도는 있지만 단점으로 지나치게 중복이 많다는 점입니다.

내용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으나 좀 더 중복을 줄이면 좀 더 건결하고 밀도있는 책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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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근대문학연구자이신 하타노 세츠코(波田野 節子)교수가 일본에서 출간한 책을 서강대 최주한 교수가 옮긴 책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한국근대문학의 시조(始祖)나 다름없는 소설가 춘원(春園) 이광수의 평전입니다.

여태까지 제가 보았던 정치, 사회, 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이 책은 구한말에서부터 일제의 제2차세계대전의 패전을 거쳐 한국전쟁시기 그리고 1970년대까지 폭넓은 시기를 관통하는 소설가 이광수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본격 문학평전입니다.

본문 300쪽에 이르는 작은 책으로 일본에서는 주코신서(中公新書)로 2015년 출간된 책을 2016년 번역한 책입니다.

흔히 한국근대장편소설을 확립한 소설가로 알려져 왔고 고등학교 필독도서 목록에 그의 대표작 ‘무정(無情,1917)‘이 있고, 저 역시 대입시험을 보려고 그의 소설들을 한국문학전집에서 찿아 읽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 두차례나 유학한 식민지 지식인으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조선어와 일본어로 소설을 쓸수 있는 소설가였습니다.

흔한 편견 중 하나가 일제시대를 살아오신 어르신들이 모두 일본어에 능할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인데, 지금과 다르게 문맹률이 높았던 20세기 초 조선에서 조선어와 또 다른 외국어를 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역관출신이나 천한 신분이어도 외국어를 잘하면 출세가 보장되던 시기가 이미 일제의 조선병합 이전 고종 집권기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아무튼 한줌도 되지 않은 전문학교 학생과 후에 경성제대 학생들 그리고 일본으로 조기에 유학을 떠날 수 있는 소수의 재력가나 유력집안 출신들만 일본어나 중국어 그리고 영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는 일본 유학을 통해 일제의 식민정책에 우호적일 수 밖에 없는 유력인사의 자제들과 자신들과 소통이 가능한 조선출신 엘리트들을 통해 조선을 식민통치 해왔다고 보면 됩니다.

아무튼 이광수의 경우 더욱 특이한 것이 그가 평안도 정주 출신 고아였는데 두번의 도쿄유학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광수 자신의 천재성(天才性)도 있었겠지만 인생의 기회를 잡는데 운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광수는 일본유학을 통해 일본에서 해석한 서구의 문학과 사상을 받아들였고, 조선총독부 산하의 매일신보를 통해 ‘무정’을 발표하는 등 일본의 식민통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즉, 이광수는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에 협력하기로 하기 이전에도 조선어로 소설을 발표하면서 각종 일본 지식인들의 책을 읽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사실상 이중언어 생활을 해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친일 이후 그가 좀더 직접적으로 일본어 소설을 재조(在朝)일본인이나 재일(在日)조선인을 독자로 펴낸 겁니다.

그는 친일이후에도 조선인 독자를 위해 조선어 소설을, 그리고 일본어 소설은 일본어가 이해가 되는 위의 두 독자층을 겨냥해 펴낸 것입니다.

최초의 한국근대장편소설을 쓴 소설가가 일본을 통해 문학을 배웠고, 이중언어를 구사하며 현대 한국의 문학언어를 정립했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입니다.

여태 국문학을 하는 분들이 왜 일본어를 더 공부하시나 했는데, 한국의 근대문학의 태생이 일본과 연관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살펴본 이광수의 삶을 바라보는 저 자신은 이 소설가가 처한 시대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난감했습니다.

이광수는 가야마 마츠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하고 조선의 청년들을 태평양 전쟁의 전사로 나가는 걸 독려하고, 일본어로 소설을 발표하고 다른 친일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영원히 조선을 통치하는줄 알았다고 언급한 걸 보면 분명 친일전력이 있는 문학인입니다. 그건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친일 전력 이전에 이광수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기고를 시작한 것과 일본의 매체에 기고를 한 것들은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겁니다.

시대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해야할지 아무튼 난감합니다.

그가 남긴 조선어 문학, 논설, 수필 등과 더불어 일본어로 남아 있는 그의 글들을 어떻게 봐야하나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일본의 한국문학연구자가 바라본 이광수를 보았으니 한국에서는 이광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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