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 (蕩平) 군주로 알려진 정조 이후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연간의 공론 (公論) 정치와 정치체계를 다룬 논문집입니다.

각 장마다 하나의 독립된 논문으로서 사실 순서에 상관없이 읽어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 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아래와 같은 구성입니다.
1. 영 정조 시대의 공론정치
2.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의 공론정치
3. 세도정치기 이후 대한제국기의 정치

로 일별할 수 있습니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으로 대표되는 순조이래의 세도정치(勢道政治) 시대를 다루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지만 세도정치기와의 비교를 위해 영조. 정조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의 통치체제도 같이 고찰합니다.

따라서 조선 통치체제의 기본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조선의 정치구조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고찰하며 논의를 진행합니다.

조선은 국내정치적으로 국왕이 모든 결정을 단독적으로 내릴 수 없었던 나라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전제주의 국가임에도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이 강했던 나라입니다.

주요 결정사안들은 모두 어전회의와 비변사회의와 경연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사간원과 사헌부로 대표되는 대간 (臺諫)을 통해 인사권 개입이 이루어지는 구조였습니다.

지방의 유생이나 산림 (山林)들도 상소 (上疏) 등을 통해 조정에 직접 의견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애초부터 권신(權臣)들에게 국왕의 정치권력을 위임하는 방식의 통치체제를 가진 조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의 통치방식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 첫번째가 바로 당쟁(黨爭)에 따른 공론정치의 변질입니다. 국왕의 독단적 결정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공론정치체제는 사대부들의 당파로 인해 변질되어 간쟁(諫爭)을 주도하는 청요직(淸要職), 즉 대간(臺諫)의 자리에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을 천거해 반대파 당인들을 탄핵하고 사실상 민생을 도외시하는 폐단이 나타납니다.

지금 자유한국당이 20대 국회에서 정쟁을 일삼으며 민생법안을 전혀 처리하지 않고 발목잡기하고 있는 상황과 똑같다고 보면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인 선조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사대부들간의 당파는 서인과 남인으로 갈라지고 나서 다시 서인세력간에도 노론과 소론으로 그리고 노론도 시파와 벽파로 갈립니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은 사실상 서인세력과 권력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임금들로 서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비극인 임오화변(壬午禍變)도 결과적으로 이런 권력투쟁의 결과였습니다.

특히 정조는 조선의 간쟁(諫爭)제도가 사대부들의 당쟁에 악용되었다고 보고 왕권의 강화책의 일환으로 간쟁제도를 약화시키고 억압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조 자신이 당대 최고의 철인군주(哲人君主)이기에 가능한 왕권강화책이었습니다.

당대최고의 학자인 정조 자신은 노회한 서인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당파이익을 위해 어떠한 간쟁을 하고 상소를 하더라도 이를 논리적으로 막아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권의 강화를 선대왕들의 묘지를 찿아가는 능행을 진행함으로써 이루었습니다. 정조는 능행 행차를 통해 백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민원을 들음으로써 중간의 사대부들이 민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왜곡할 가능성을 차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조 당대에는 공론정치 기능을 약화시키고 왕권강화를 하면서 효과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지만 바로 다음 임금인 순조때부터 공론정치 약화의 폐단이 나타납니다.

군주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철인정치를 전제로 하는 왕권강화책은 임금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순간 약화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임금인 순조때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외척(外戚)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입니다. 정조이후 네 임금이 모두 어린나이에 즉위하면서 대왕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불가피했고 이런 상황은 소수의 외척세력이 국정을 마음대로 농락하는 국정농단(國政壟斷)으로 이어지게됩니다.

비선(秘線)의 실세들이 조선의 정치를 무려 100여년간 주무릅니다. 망국으로 갈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도정치기 조선정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조정은 노론 벽파(老論僻派)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2. 보수적인 원리주의적 성리학을 대변하는 노론벽파는 명이 멸망했음에도 대명사대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중적으로 청나라에도 사대주의를 표방했습니다.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뿌리깊은 인식이 여기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3. 이런 중국우선의 사대주의 외교와 다르게 일본과는 소극적인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했습니다.
4. 서양과의 외교는 중국의 속방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런 사고방식은 쇄국( 鎖國)정책으로 나타났습니다.
5. 서양과의 외교통상을 거부하는 상황과 함께 정조 이전부터 받아들였던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합니다. 특히 프랑스 신부의 죽음으로 프랑스와 외교적 마찰이 생기고 이는 병인양요의 발발원인이 됩니다.

조선은 1800년 정조의 죽음이후 세도정치기를 거치며 조선의 전통적인 경국대전 체제하의 정치도 재대로 실행할 수 없는 상항에 봉착했고 때마침 아시아에 불어닥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의 기미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체 오로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틀에 갇혀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오로지 12세기 송나라 유학자 주희 (朱熹)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았고 국내정치는 외척들의 전횡에 무기력해진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19세기의 민중들은 무능한 조정과 세도정 치가들에게 반기를 들어 수많은 민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정치를 무력화시킨 노론벽파 세력들( 특히 이들 중 왕가의 외척이었던 세도정치가들)아 조선을 국치의 길로 끌고 갔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동 김씨, 반남 박씨, 풍양 조씨 그리고 경주 김씨 가문이 19세기를 풍미한 세도정치의 주역들입니다.


P.S. 이전에 읽었던 안동 김씨 가문에 대한 문중역사서 한권을 같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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