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가볍고, 작고, 귀엽고, 심지어 산뜻하고 예뻐 보이는 책이다. 한 손으로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론 커피잔을 쥘 수 있을 정도의 부피감이어서 맘에 드는 장소를 만나면 불현듯 꺼내어 읽기에 좋을 책이다. 다 읽었더라도 가방 한켠에 넣고 다니다가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지겹지 않을 책이다.



풋풋하고 상큼해 보이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누군가를 우연히 보게 된다면, 그 사람의 표정을 몰래 훔쳐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아마도 둘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상념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지금 막 호감이 가는 사람을 발견한 듯 반짝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거나 말이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유형이라면 골똘히 사색하는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고, 문장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성향이라면 그의 영혼은 이미 다른 장소로 떠나있을지도 모른다. 캘리포니아의 어딘가로, 아니면 그만이 아는 어느 시절의 공간으로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책의 외적인 특징인 '작고, 귀엽고, 예쁘고, 산뜻한'이란 단어들의 느낌은 읽기 시작한 순간 곧 잊힌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쓴 62편의 단편들을 읽는 느낌은 이미지로 가득한 짧은 영상을 이어서 보는 것과 비슷했다. 문장들은 나의 생각을 앞질러 도착했다가 이내 바로 떠나가 버린다. 군더더기 없는 시적 메시지들은 어떤 이미지로 은유되어 잔상을 남긴다. 그리고 또 빠르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일부러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도 보았지만 이 책은 머물기보단 계속해서 읽는 것이 더 좋았다. 하나의 단편을 깊게 사유하기보단 전체를 관망할 때,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시적 메시지를 얻게 되는 것 같다.

 

 

 

"그건 미국의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전의 노래였다. 노래는 하도 오랫동안 돌아다녀서 미국의 먼지에 녹음되었고, 모든 것에 내려앉아서, 의자와 자동차와 장난감과 램프와 창문을 수천만 개의 축음기로 만들어 우리의 찢어진 가슴에 노래를 들려주었다. " -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

 

 

 

설명하는 느낌, 열심인 느낌, 애쓰는 느낌 없이 힘들이지 않고 써 내려간 문장들인데 구차함이 없으니 오히려 말하고픈 이미지만 선명히 떠오른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의 조합인데도 처음부터 그렇게 사용하도록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레 어우러져 삭막한 금속성의 세계에 서정적인 발자취를 남긴다.

 

 

 

"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인지력이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이 두 가지가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상상력과 인지력을 바탕으로 생성되는 이미지와 메타포의 시적 테크닉은 그렇게 해서 쓰인 작품을 다분히 서정적으로 만들어준다. " - 리처드 브라우티건

 

 

 

브라우티건은 발전이라는 이름 뒤에 남겨진 상실감을 논리적인 설명이나 비평 대신 담담하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정'이란 정서의 공유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나누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론 감정의 소통이 더 빨리, 많은 것들을 전달하기도 한다. 주어진 단어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세세히 설명하지 않고도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서정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음악, 그림, 사진들처럼 함축되어 있기에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정서라고 말이다.

 

 

 

"친구의 눈은 마치 물에 젖은, 찢어진 양탄자 같았다. 일종의 이상한 진공청소기처럼 나는 그를 위로하려 노력했다. 우리가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이고 장황한 말로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일한 차이라면 또 다른 인간의 목소리라는 것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말이란 이 세상에 없는 법이다. " - 「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

 

 

 

하지만 브라우티건이 살았던 시간과 지금은 또 달라져 있는 것 같다. 상실감이란 그것을 온전히 가져본 연후에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가져본 적 없이, 머물러본 적 없이, 더 빨리, 더 많은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현재에선 무엇을 상실하고 있는지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말이다. 나의 필요를 앞서는 편리한 물건들이 기다리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은 사람들을 알아갈 수 있는 요즈음이다. 표면을 얇게 스치듯 살아가는 지금, 하루가 다르게 잃어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서정성'이 아닐까 싶다.

 

 

 

"이상하게도 캘리포니아는 다른 모든 곳에서 사람들을 불러서는 예전의 삶을 잊어버리게 한다. 이곳의 에너지 자체가, 혹은 금속을 먹는 꽃의 그림자가 우리를 다른 삶으로부터 불러와 길거리 주차 미터기가 타지마할처럼 늘어선 캘리포니아의 주민으로 만든다. " - 「캘리포니아로 모여드는 사람」

 

 

 

지금 여기는 또 다른 캘리포니아라는 생각이 든다. 캘리포니아가 아닌 다른 장소의 이름이어도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서정성이란 순간을 사색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고, 현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이자 정서라고 생각한다. 서정이란 애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한, 삶에 대한,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애착을 가질 때 잃어가는 것들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것들을 기대하게 된다. 서정을 잃은 세대들은 공허한 것 같다. 공허함으로 마취된 상태에서 깨어나기 위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깨우고, 열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음 안에 있는 너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보아야 할 것 같다.

 

 

 

"내 타자기는 막 마취에서 도망친 말처럼 빠르며, 침묵 속에 빠져 있으며, 밖에서 해가 비치는 동안 내 단어들은 질서 있게 달리고 있다. 아마도 그 단어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 「내가 선택한 깃발」

 

 

 

"때로 인생은 한 잔의 커피 같다. (...) 봄이 되면 젊은 남자는 환상적인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그 남자의 환상에 커피 한 잔의 공간은 있을 것이다. " - 「커피」

 

 

 

"겨울폭풍이 집을 뒤흔드는 동안, 새 라디오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들으며 나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밤을 맞고 있었다. 매 프로그램이 갓 잘라낸 다이아몬드 같았다. " - 「토크쇼」

 

 

 

그런 순간들을 오감으로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우린 어디에 있든 완벽한 하루를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얻는 것만이 삶은 아니다. 상실이 쌓여가는 것 또한 삶의 다른 모습이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변화하는 속에서도 나와 너의 목소리를 켜고 들으며 삶으로 향해 있는 문을 잠그지 않은 채로 머물고 싶다. 브라우티건의 단편들에선 실제로 '''라디오'라는 단어가 종종 언급되고 있다. 그 밖에도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이 있지만 나에게 가장 크게 들린 단어의 목소리는 그 두 가지였다.

 

 

 

때론 잠시 닫아두기도 하겠지만 문의 열쇠만큼은 근처 어딘가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고 싶다. 내가 잘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이 문에서 저 문으로 들고 나서며, 때론 너의 문 밖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거냐며 두드려보고 싶다. 나의 문이 닫혀 있을 때에도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는 늘 곁에 두고 싶다. 같은 주파수에서 공명하는 소리들을 듣는 것은 완벽한 하루에 닿기 위한 '서정성'을 일깨우는 일이다. 나는 계속해서 듣고, 말할 것이다. 상실보다 두려운 것은 공허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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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2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져요. 물고기자리님이 인용한 문장이 좋아요. 커피와 관련된 말을 인터넷에서 떠도는 걸 몇 개 본 적 있는데, 저 문장이 최고예요.

AgalmA 2015-09-21 18:14   좋아요 0 | URL
<커피> 상황은 정말 웃겨요. 블랙유머 시트콤ㅎ 그래서 더 인상적이지만~

물고기자리 2015-09-21 19:09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것은 단편의 첫 문장과 제일 마지막 문장인데 중간에 좀 사연이 있어요..ㅎ 외롭고 씁쓸한 것 같으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이런저런 것들을 겪고, 경험하고 사색할 수 있는, 한 잔의 공간을 갖고 있는 인생이라면 그런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느낌이었어요^^ 브라우티건의 진짜 삶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단편에선 상실이 완벽한 공허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AgalmA 2015-09-2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는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사랑하는 시죠. 네, 시입니다. 어떻게 만들었지 한참 들여다보고 베껴도 써봤지민 완벽히 브라우티건 거여서 에이,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시 감상자 모드로....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지날 때마다 읽고 싶어진다니까요ㅎ

물고기자리 2015-09-21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중에선 제가 인용한 첫 문장이 제일 인상적이었어요. 가슴에 뭔가가 쿵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글 전체가 시였지요^^ <샌프란시스코 YMCA에 바치는 경의>도 웃음과 날카로움이 있어 재밌었고, 인용하진 않았지만 다른 단편들에도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있어서 그 부분은 몇 번씩 읽게 되더라고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