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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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읽은 책의 또 다른 재미라면 책 주인이 읽던 중의 흔적을 만나는 일이다. 땅콩 껍질 같은 것의 좀 큰 눈꼽 크기의 잔여물과 설탕부스러기가 눌러 붙은 작은 흔적, 손톱으로 살살 긁어내며 조금 웃었다. 밑줄을 그을 수 없어 대신 끄적거렸는데, 그조차 꽤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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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느냐 물으면 좀 생각해봐야겠다고 대답하겠지만 작가의 소설을 읽는 시간이 아주 짧게 느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악의 연대기 3부작? 뭐 그 비슷한 이름이었던 책들과는 다르게 어둡지 않았다. 액션 활극이래도 좋겠다. 물론 그 역동적인 상황들에도 그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세계들이 담겨있다. 어쩌면 윤리적인 아니 지극히 사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에 대한 인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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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중심의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유정 작가의 기질이 내 취향이 아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시끄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시끄러운 사람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기질이 너무 닮아서 부담스러운 것이다. 친구할 것도 아니면서도 그렇다. 내 기질과 성향, 나는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가.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타심과는 다른 어떤 슬픔에 기초하면 가능하더라. 아니 나를 사랑할 수 없어서 더욱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몸부림도 가능하더라. 왜 또 전혀 다른 이야기와 주제에서 내 이야기로 흘렀을까, 아직 덜커서 자기중심적이라 그렇다. 나는 대체 언제 자라나, 때를 놓쳐 너무 더디 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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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버지니아 울프 전집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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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작품부터 차근히 읽어갈 생각이다. 550쪽이나 되고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 쉽진 않기 때문에 꽤 오래 걸렸다. 확실히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곤 했다. 작가의 소설이 한 때는 너무 묘사적이라거나 그저 그런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로 매도되었다는데, 나는 이 소설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읽었고 두루 생각해야 했다. 1915년에 씌여진 이야기가 이렇게도 세세한 공감을 준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어쩌면 한 아가씨의 한 때인 이야기에 이렇게 많은 사회를 녹여낸 것에도 놀랐다. 짧게 축약하자면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가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직시하지 못하다가 하나씩 알고 생각하며 변화하는 과정이랄 수 있겠다. 그 안에 무수한 문제 의식 특히 ‘여성과 교육(혹은 지적 능력)’ 부분에 꽤 치중했다 여겨지는 데 그 안에서 작가 자신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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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쪽. 허투루 넘어가지는 부분이 없어 끄적여가며 읽어야했다. 솔직히 누구도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장점과 단점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고 절대적으로 옳거나 바르고 훌륭한 인물은 없다. 모두 서로에게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저마다 갈등한다. 인간의 개별성과 유사성. 뭐라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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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하게 정리해서 규정하기엔 너무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어서 ‘그냥 사는 이야긴데 좀 진지하고 심각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래, 원래 사는 게 다 그렇듯이 말이지’ 정도인데 그렇게 넘어가기엔 너무 할 말이 많고 쪼개가며 분석하고 토론해야할 것도 같고 그런 면에선 또 엘리트주의라는 단어가 꼭 맞기도 하고 일부에겐 젠체하는 관념론자로 여겨질테고 아홉권이 남았는데 모두 다 이런식이면 정리를 위해서라도 ‘버지니아 울프 온라인 독서모임’이 필요할텐데 그렇게 시작하면 버지니아 울프의 글과 삶을 얘기하는 데 몇 년씩 걸릴테니 엄두가 안나고 그래도 무엇이든 하고 싶어지는 것이 역시 글을 써야 하나 책 한권을 읽고 같은 분량의 리뷰를 남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다가 과연 쓸 수는 있을 것인지가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래도 뭐라도 끄적거려보겠다고 마음 먹고 또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가 슬슬 잊고 뭐 그렇게...안 끝나겠다. 쉽게 끝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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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The Summer K-픽션 18
최은영 지음, 제이미 챙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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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iction Series. 예전 영어독해 공부할 때 만났던 영문과 번역본이 함께 실린 책처럼, 한국어 원문과 영어 번역문이 실린 시리즈다. 한국 소설을 외국인 친구에게 선물한다거나 한국어를 영어로 확인하고 싶을 때도 유용하겠다. 일단 이 시리즈가 꽤 반갑다. 한국의 젊은 소설들을 소개할 수 있다는 장점, 내가 배낭 여행을 간다면 이 책들을 몇 권 들고 가서 읽다가 새로 만난 친구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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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었는데, 다시 읽으며 또 새로울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사랑이야기를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뒤에 작가의 말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물론 작가의 말도 번역되어 있다). 타인의 사랑을 자신의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비난하고 조롱할 권리는 없다. 그래도 얼마쯤 감정적인 기준을 적용하게 된다. 내 경우는 다 괜찮지만 미성년자와의 사랑이나 불륜은 용납 못하는 정도인데, 각자가 모두 기준이 다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사랑에까지 그런 것을 적용해도 되는가. 그렇게 핀단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사랑이기는 한가. 사랑, 그 내밀한 감정을 누가 어떻게-라는 마음과 그래도 최소한의 기준은 필요하다는 마음이 늘 함께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사랑이다. 그래서 더욱 계속, 거듭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겠다.

#그여름 #최은영 #K-Fiction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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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눈빛
박솔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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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그만 읽을까’하는 생각을 몇 번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지 않을만큼 여러번이라는 것만 기억한다. 이거, 뭐, 어떻게, 그래서라고 계속 생각해야만 한 문장을 절반쯤 해독할 수 있었다. 명징한 의미는 나중에 찾고 일단 문자 해독을 해야했다. 문장이 통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계속 질문했다. 뭐라고? 무슨? 어? 그래도 잘 안보여서 반만 보고 반은 지나칠 수 밖에 없었고 줄거리도 인물도 기억나지 않는다. 여러 단편을 읽은 게 분명한데 기억나는 것은 부산, 해운대, 광주, 연극, 상수, 모자 이런 몇 개의 단어들 뿐이다. 단어가 들러붙어 있는 어정쩡해서 겨우 굴러가게 생긴 미요한 색과 질감을 가진 구체 비슷한 것이 굴러가는 것을 애써 집중해서 바라본 기분이다. 느낌이 좋은 지 나쁜 지도 알 수 없어서 나에게도 계속 질문했다. 꽃잎을 떼진 않았지만 좋아? 싫어? 좋아? 싫어? 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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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폐서회, 슬쩍 페소아처럼 발음하며 화씨 451 속 인물들을 상상하다보면 어떻게 책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아니 책이라고 예외일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도저히 안되겠어서 고개를 내두르고 만다.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좋아하는 책이든 그렇지 않은 책이든 심지어 쓸모없고 종이 낭비라는 생각에 스러져간 나무와 바쁘게 돌아가는 인쇄기를 떠올린데도 가능할 리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 끌어안고 이고지고 읽고 쓰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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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졸업 - 소설가 9인의 학교 연대기
장강명 외 지음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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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2015년까지의 학교, 청소년기를 다룬 단편들이다. 학교와 학창시절이라는 것에 대해 애증을 갖고 있기도 하거니와 도무지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직접 경험은 멀고도 이상했고 간접 경험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련히 추억삼아 떠올리면 지금의 학교와 학창시절이라는 것은 너무 이상하고 무서운데 또 거듭 생각하며 파헤치다보면 그 때는 그 때대로 이상하고 무서운 세계였던 것이다. 교련을 배우던 시기부터 교권과 학생 인권의 양립을 생각하기에 이른 지금까지. 어쩌면 이상의 학교와는 너무도 멀게 거칠게 말하면 우수한 노동력의 생산 좀 포장하자면 인재양성에 너무 매몰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재는 과연 어떤 인재인가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현재의 지도층 인사들을 보면 자명하지 않은가. 비교와 평가로 점철된 교육으로 만들어진 인재는 인성도 인격도 때로는 인간성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비약이라고? 글쎄- 통탄하는 마음이 불러온 과장일 수는 있겠지만 누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작금의 현실을 비판하다보면 교육이 대체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본질로 회귀한다. 악은 그만 쓰고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지 더 더 더 궁리해야겠다. 근데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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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설들 속엔 한 주제만 담긴 것이 아니라서 교육실태와 현실을 위한 비판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웃기고 어이없고 재미나고 슬프고 안타깝고 무서운 많은 성장기의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 내가 종종 말하지만 너무 잘난 부모보다는 좀 못난 부모가 낫지 않나 싶다. 게다가 사실 중2병은 중2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평생 치유 불가능하므로 이제는 중2병이 아니라 ‘사람병’ 정도로 이름을 바꿔야한다. 그런식으로 치면 16세인 아이나 41세인 나나 똑같이 ‘사람병’을 앓는 중이다. 동지의식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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