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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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짙게 깔린 아침이면 남편은 오늘은 화창하겠는데, 하며 한껏 들떴다. 과연 오전 열시쯤 되면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11)



안개는 밀라노 보다는 영국이다. 스가 아쓰코가 밀라노에 있었던 시절.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았던 런던에서는 산업 혁명 산물인 독극물이 안개 안에 스며있었다. 이탈리아도 공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안개는 산업 뿐 아니라 격변하는 이탈리아 정치를 뜻하기도 한다. 독재와 불안이 혼재하던 그 시기 밀라노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에 있었다. 제목은 아마 그런 깊은 뜻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영국과 한국의 거리만큼 일본과 이탈리아는 너무도 머나먼 나라다. 영국과 일본은 두 나라 모두 섬나라 특성을 갖고 있다. 이들은 섬에서 고립되었기 때문에 이 공간 안에서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 반면 반도 나라인 한국과 이탈리아는 바다가 주는 감성 뿐 아니라 육지로 올라갈 수 있는 대지가 주는 무한한 에너지도 갖고 있다. 어쩌면 영국이 유럽의 일본이라면 이탈리아는 유럽의 한국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1950년대 사랑과 열정을 쏟았던 이탈리아에서의 삶을 일본에서 태어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 온 일본인이 그곳을 추억하며 쓴 에세이다. 이탈리아 사람이 쓴 이탈리아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인 눈으로 본 이탈리아의 소소한 모습이다.


 나 같은 외국인에게 그녀는 상당히 중요한 존재였다. 보통 외부인에게는 빗장을 질러놓은 세계, 역사나 사회학 책에 쓰여 있지 않은 유럽사회의 단면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사람으로서 보편성 뿐 아니라 이탈리아만이 주는 독특한 개성을 엿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누구든 여행을 하면 시인이 된다. 몸 뿐 아니라 감성과 두뇌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촉수가 곤두선다. 시인의 감성은 일반인과 다르다. 시인 윤동주는 잃어버린 나라에서 스치는 바람에도 한없이 아파하지 않았던가.

 

 

나는 어릴 때부터 지나칠 정도로 번역 일을 좋아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따라서 일종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문장을 만들어나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일이다. (80)

 


나 또한 잠시 지낼 이 유럽이란 공간이 새삼스럽고 신기했다. 모든 게 독특하게 보여 졌다. 그 때 그 뿐. 여행이 아닌 삶이 되며 이 공간은 더 이상 미지의 공간이 아닌 게 되었다. 내가 달라졌다고 느낀 건 우리 집을 방문한 시어머니를 보면서다. 끊임없이 여긴 어떻다라고 내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 나도 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그랬었지. 나도 이곳이 이렇게 신기했었어.’ 라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이 공간은 내게 신기한 세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인은 항상 모든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은 마음에 굳은 살이 박혀있다. 보통 사람들이 부드럽다고 생각하는 바닥도 시인들이 살이 닿으면 새빨게 지거나 다쳐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


도로가 경기장이고 상대가 공이라고 보면 무척 단순한 설정이지만, 길 건너기와 축구 경기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판단하도록 학교교육과 시민교육을 통해 길들여진 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 경직돼버린 정신과 육체가 알맞은 대응법을 찾지 못해 일종의 굴욕감에 시달려야 했다.(63)

 


여행자는 낯선 공간에 떨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시인이 되어버린다. 너무 당연하다고 느꼈던 세상이 보호자도 나를 보호해 주는 국가도 없이 여권에 든 신분에 의지해 혼자가 되어버린다. 의도치 않게도, 새롭게 적응해야만 하는 세상을 아주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특히 60년 전, 아주 다른 삶으로 온 저자는 더 심했으리라. 그 때는 예방접종같은 여행 프로나 책자도 변변치 않았을 테니.


내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몇 번이고 우연히 함께해준 마리아가 20세기 아탈리아의 역사적 시간과 사람들과 이토록 긴밀하게, 이름도 빛도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한없이 감동했다.(148)

 

 

더군다나 요즘은 반나절이면 도착하는 유럽을 글쓴이는 한 달을 넘는 항해를 통해 도착한다. 그렇기에 그 긴긴 여행은 더욱 이 새로운 공간을 더욱 시인의 눈을 장착하게 만들었으리라.


저자는 그 공간에 애정 그 이상을 담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밀라노라는 공간은 저자를 통째로 변화시켰다. 그렇게 통과한 공간에서 상실을 경험하고 그 상처 때문에 엄마 품을 찾는 아이처럼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 온갖 사랑과 괴로움을 다 삭힌 후 만들어진 이 글은 국화꽃 앞에 선 누이같이 담담하면서도 긴 여운이 남는다.



그가 남편이 떠난 후 이야기. 이제 세상을 떠나가는 이탈리아에 두고 온 벗들 이야기. 처음 만났던 밀라노에 대한 첫 인상. 이탈리아에서 언어를 공부하며 만난 이탈리아 문학들 이야기를 따라가며 글쓴이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나먼 영국에서 이 책을 만날 수 있는 방법. 비행기가 책도 데려다 준다.


나는 나머지 두 권 책을 주문했다. 주문하며 전자책으로 나오지 않지만 많이 보고 싶었던 책 두 권, 뒤늦게 그녀가 언급했던 인도 야상곡을 추가했다.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과의 만남은 따로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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