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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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가까이 있으나 말이 실현되는 현실은 멀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전장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임금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선봉에 섰던 때가 조선 역사에 있었던가? 임금과 대신들이 궁궐 안에서 무수한 말을 쏟아낼 때 민초들은 전장에서 맨몸으로 말에 밟히며 피를 쏟았다. 민초들이 전장에서 죽어가며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었을까? 청나라 군사가 오면 얼음길을 건네주고 곡식을 얻고자 하던 송파나루의 뱃사공의 고백에서, 조선의 세습노비였으나 청의 역관이 되어 조선을 욕보인 정명수의 말에서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닌 이었음을 깨닫는다.

임금은 살고자 몸부림치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이미 죽어간 자들의 위패를 가지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작은 행궁 안에서 다시 말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말들은 삶이 없는 말이다. 맨 앞에서 성을 지키는 군사들을 직접 보지 못하고, 성 안에서의 말라가는 삶을 보지 못한 채 그저 글과 말로써 보고 받은 것들을 그것조차도 자신들의 생각을 담아 왜곡한 채로 사실이라고 믿었다. 380여년이 흐른 지금이라고 다른가? 지금도 위정자들이 국회의사당 안에서, 자신들의 당사 안에서 쏟아내는 말들 속엔 정치만 있을 뿐 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나날을 촛불로 밝혀 다시 세운 나라, 정권. 그러나 그 속엔 각자의 욕구가 숨어 있었다. 과거에서 미래까지를 아우르는 욕구. 새로운 정권이 세워지면 그 욕구들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삶의 기대. 그러나 역시 그 삶을 이루는데 있어 위정자들이 하는 것은 여전히 뿐이다. 시민들과 함께 걷고, 함께 사진을 찍고, 함께 밥을 먹는다고 해결될 일이었던가?

지금도 그들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만큼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그 곳에서 글자가 적힌 문서를 보내 자신들이 필요한 자료를 조사해서 기한 내에 보고하라고 한다. 그럼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그 문서를 아래 부서로 보낸다.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글들이 적힌 문서가 닿은 최종 목적지에서는 열악한 환경에서 도저히 담당할 수 없는 양의 업무를 할당받았다는 말단 책임자가 기한 내에는 불가능한 일임에도 믿기지 않지만 보고서의 형식을 갖춘 글을 적어 위로 위로 보낸다. 그 문서가 시작되어 끝난 종착지에서는 그것을 삶이라 믿고 다시 말을 한다. 그래서 그 말들은 삶과 닿아있지 않다. 욕구를 채울 수 없다. 그래서 삶은 늘 정치를 의심한다. 그러니 지금도 여전히 삶은 수많은 뱃사공을 낳고 더 많은 정명수를 낳는다.

김상헌과 최명길. 어느 누구를 비난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다. 자신의 가치관을 믿고 지키는 것. 그것이 명분을 지키는 것이든 실리를 챙기는 것이든 잘잘못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김상헌의 길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마저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최명길의 길은 삶을 도모하기 위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는 것이었다. 그러니 둘 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 위에 백성의 삶은 어디에도 없는 느낌이 든다. 백성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쪽이냐는 최명길의 물음에 대한 이시백의 답에 있었다.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p.218)

아무 쪽도 아닌, 그것이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든 치욕을 견디는 것이든 상관없이 백성은 그저 살아남는 것이 길이라고, 내가 맡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삶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살아내야 하고 살아가야 할 삶에서 지켜야 할 자존심과 견뎌야 할 치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멈춘다. 삶은 소설이 아니니까...

아내와의 첫날 밤 아내의 못생김에 놀라 소박을 놓고 쳐다보지도 않다가 아내가 어여쁜 사람으로 변하자 정을 나누고, 아내의 도력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어 청을 무찌른 공을 세우게 되는 외모지상주의 모질이 남편이 등장하는 소설《박씨전》의 인물 이시백은 남한산성에서 누구보다 민초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삶을 온몸으로 느끼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의 등장으로 《박씨전》을 만들고 읽은 백성들의 마음이 조금 더 헤아려졌다. 끝내 이루지 못한 욕구에 대한 원망과 위로... 자생능력.

산천에 봄은 오고 왕은 칸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삶을 구했다. 왕의 식솔들과 척화파 신하가 볼모로 잡혀갔고, 수많은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그리고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전쟁은 끝났고 왕은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것, 그래서 다시 삶을 찾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왕과 품계 높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말만을 쏟아내고 있을 때에도 그들과는 별개로 조선 천지 고을 고을마다 백성들의 삶은 지속되었다. 그러니 서울로 돌아와 다시 삶을 찾았다고 안도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왕과 신하들이 성 밖으로 나가기를 기대한 백성들에게 왕의 청의 칸 앞에서 느낀 치욕이 전달되었을까?

글과 말만으로 삶을 갈구하던 지체 높으신 분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돌아온 서날쇠에게는 왕과 신하들이 떠난 곳에서 맞은 새 날이 다시 삶을 찾은 날일 것이다. 그러니 서울로 돌아온 것은 왕이고 다시 삶을 찾은 것도 왕일 뿐이다. 그 왕은 이제 청을 섬기면서도 청과 가까운 아들이 두려워 아들을 독살하는 아비로 남게 될 것이다. 삶과 닿아있지 않은 말로 이룬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는 속임수...

현대의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국민의 수준이 국가의 수준이라면서...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또한 위정자다.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답답했고 짠했다. 행궁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대화는 답답했고 우스웠으며 안타까웠다. 성첩을 지키는 백성들의 뒷담화에 들어있는 현실에 다가가지 못하는 그들의 말들이 가정조차 하기 싫은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며 랄프 왈도 에머슨의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의 정중한 초대』에 등장하는 문구가 생각났다.

통치행위에 대한 풍자 가운데 정치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에 필적할 만한 풍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 말은 지난 몇 세기 동안 교활함을 뜻했으며, ‘국가는 하나의 속임수라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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