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21
김이듬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년전 봄, 새벽에 일어나 내게 찬합 도시락을 싸준 시인은 이제 음식을 드시지 못한다. 객지에서 잘 먹어야 된다, 이듬아. 사람이 먹어야만 산다는 것이이상하지 않니?˝ 그해 봄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나를 정류장까지 배웅하며 차비를 쥐여주던 시인은 앉아 누우셨다. 믿을 수 없다. 우리는 보리밭길을 걸어얼음 창고가 있던 산마루에 갔다. 산책 중에 언니가내게 물었다. ˝시인이 될 결심을 언제 했니?˝
˝결심한 적은 없지만 자연스레 이리되었네요. 이곳에 와서 언니를 만나겠다고 정한 적 없듯이.˝

나는 뮌스터에 있는 호스텔에서 사흘 머물렀다.
양철 식기에서 스프를 떠내다가 문득 하늘을 보았다. 하얀 침대, 넓은 책장은 없었지만 이젠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속으로 몇 번 중얼거려보니까 진짜로 모든 게 허무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21
김이듬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를 기다리는 건 뜻하지 않은 여행 같다. 덧없는 순간, 아침이 온다. 비가 온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부르지 않아도 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때, 우리는 거꾸로 변할까? 빈 항구에서 물구나무서줄 거니? 끝없이 변하는 날 바라보는 것, 스쳐가며 사라지는 풍경에 관해 원래 없었던 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직 젊었던 술집 여자의 등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등에서 참았던 내 겨울도 보냅니다 나를 아들이라 부르던 손님들의 택시비와 이국땅에서 일요일마다 내게 주어지던 몇푼의 돈도 함께 보내지요 나는 꼭 저금을 하는 기분입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기록들을 한 줄 한 줄 짚어 봅니다만 아마 실수로 빠진 내 이름이 오늘도 없습니다 요즘 당신은 통 편지를 보내지 않지요
어릴 적 공터에 뛰던 플라스틱 말들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위에서 견디었던 내 예감도 보냅니다 먼 나라에서 한번 당신을 본 적이 있지요 새벽이었고 당신은 내 가슴을 열고서 울기만 했습니다 결국 유사한 아침을 맞이하며 나는 사과나무 사이를 뛰어다녔습니다 종종 나무의 배후에서 당신을 봅니다만 그것은 비밀에 부칩니다 나는 말을 못하는 일에 익숙하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금방 비밀로 삼았습니다

- 「묵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똑같아지려고 교회를 다닙니다 주보로 비행기를 접으면 엄만 속상해하셨지만요 거기 적은 소원은 지킬 만한 비밀 치마를 뜯어 만든 내 바지엔 주머니가 없습니다

붉은 얼굴로 손에 쥘 수 있는 것들만 생각합니다 소문으론 허기를 감추지 못해서요 버짐이 정오 수돗물로부터 집요하게 전염됩니다 아이들은 돌려 말할 줄을 몰라나를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언 손으로 책장 넘기며 그립던 빼빼한 여름, 종이마다 검은 곳은 내가 넘어진 자리구요 저녁 어스름이 악어 눈을 뜰 때까지 나는 구름 쳐다보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내색하는 건

무서우니까 오늘 밤에도 기도를 해야지 종일 정글짐이
나 오르내리면 아무리 추워도 죽을 만한 겨울은 없고 운동장은 왜 얼지 않을까, 혼자 소매로 모래를 쓸며 궁금합니다 미친 여자 가랑일 봤어, 낄낄대는 소년들 나는 문득 태어난 일이 쑥스럽습니다.

- 「홍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 - 피나, 당신의 카페 뮐러 활자에 잠긴 시
안희연 지음, 윤예지 그림 / 알마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필 그날은 꽃샘추위가 찾아온 날이었고, 오들오들 떨며 오지않는 버스를 한참 기다렸으며, 기다린 보림도 없이 만원 버스에 실려 덜컹덜컹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신발에 밟히고 가방에 치이면서 생각했다. ‘너 시 쓰는 거 정말 좋은 거 맞니?‘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곧자 빵집으로 들어가 쟁반 가득 빵을 골랐다. 종이봉투에 한가득 빵을 사 들고 온 내게 남편은 웬 빵이냐고 물었다. 눈물 젖은 빵이라고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게 무슨 빵인지도 모르고 맛있게 먹는 남편을 보는데 이상하게 미움이 녹았다. 빵으로 달랠 수 있는 마음이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물론 빵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도 있다. 시는 그런 마음들을 고요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좋은 게 좋은 거야, 단순하게 생각해, 그런 말들에 쉽게 지배당하는 세상에서 그렇게 단순하게 문제를 뭉뚱그리지 마, 대충은 없어, 정말 그게 네가 원하는 삶이야? 긴 창을 들고 파수꾼처럼 나를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