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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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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드 비강, <실화를 바탕으로> 리뷰

 Image ⓒ 김영사


글쓰기의 아이러니는, 그것이 작가의 현실을 면밀하고 세세하게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못내 불편해하면서도 열광해마지 않는 독자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데 있다. 책이라는 종잇장을 통해 넘겨 보던 허구같은 이야기가 사실은 작가라는 현실의 존재를 통해 노랫말처럼 흘러나온다는 점은, 언제나 독자들을 궁금증에 빠지게 만들어버린다. "그 작가, 정말 그런 삶을 살아낸 거야?"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아무리 봐도 책 속의 이야기가 작가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는 걸 느낄 때 독자들은 내심 불안하면서도 호기심을 느낀다. 문학이라는 우울과 근심, 자기고민의 장르 속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내는 저 주인공이 사실은 작가 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점은 타인의 삶에 대한 동경과 연민을 가진 보통의 인간적인 마음과, 내가 쉽게 알 수 없는 타인의 삶을 아무도 모르게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관음증적인, 조금은 인정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마음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대한 판타지는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들으면 즐겁고, 때로는 위안이 되며 교훈까지 얻을 수도 있는 그저 남의 이야기같은 허구의 세계가, 사실은 내 앞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실제 삶이었다는 서프라이즈. 그건 종이 안에서만 움직이던 인형들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마법같은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별도의 기교나 장치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그저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라는 거짓말같은(가끔은 정말 거짓말이다!) 몇 마디를 적어주면서 말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대한 판타지

델핀 드 비강의 책 <실화를 바탕으로>는 픽션이 어디까지 진짜를 담아낼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작품이다. '델핀'이라는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은 전작의 성공 이후 글쓰기에 무력감을 느낀 주인공이 L이라는 미스테리한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냈다. 소설가인 주인공의 생활 전반이나 인생 경로는 실제 작가인 '델핀 드 비강'의 그것과 빼곡히 닮아있다. 어머니의 자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출간해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 남편과는 이혼해 쌍둥이 아들 둘을 데리고 산다는 점, 동시에 문학 관련 방송을 진행하는 저널리스트 남자와 연인관계에 있다는 점 등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이 '픽션'인지, '자서전'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들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과 놀라울 정도로 빼닮은 소설 속 주인공의 삶에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이게까지 느껴지는 L이라는 여성이 스스럼없이 녹아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L은 아주 빠른 속도로 주인공 델핀의 삶을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신작이 출간되고 몇 달 후, 나는 글 쓰는 일을 중단했다.

그로부터 삼 년 남짓, 나는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과

장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한 줄도. 공문서에 대한 회답, 감사카드, 휴가지에서 보내는 엽서,

하다못해 쇼핑 목록 몇 줄조차 쓰지 않았다.

어떤 모양새든 형식을 갖춰 써야 하는 글이라면 한 줄, 한 마디도.

노트와 수첩과 메모지만 봐도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

나는 더는 글을 쓸 수 없었다.

글쓰기, 그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었다.


- p. 7

​글쓰기에 진척을 낼 수 없는 작가 델핀에게 L은 인생의 동반자이자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델핀을 완전히 꿰뚫어보고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며, 그녀가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를 잘 하는 L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자서전을 써주는 대필작가다. 단지 사교계의 친구처럼 델핀의 인생에 등장한 L이라는 이 매력적인 여성은, 점차 델핀의 소설 집필을 비롯한 생활 전반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며 두려움에 자꾸만 숨어버리는 델핀에게, L은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진실된' 이야기의 집필에 대해 그녀의 생각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그리고 점차 L은 델핀의 삶 전반을 대체하려 한다. 알게 모르게 이루어지는 L의 공작에 델핀의 생명조차 위험해질 무렵, 가까스로 델핀은 L로부터 도망친다. 하지만 그 땐 이미 델핀의 삶 일부가 공포와 자기혐오의 감정으로 얼룩진 이후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떠올리게 하는 철저하게 짜여진 '심리스릴러'

책 <실화를 바탕으로>가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흥미로운 스토리에 있지만은 않다. 제목 '실화를 바탕으로'가 의미하는 것처럼, 작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가져다 넣은 것 같은 소설 속 수많은 배경과 장치들. 그리고 주인공 델핀과 L이라는 여성이 주고 받는 대화에, 실제 작가인 델핀 드 비강이 평소 가지고 있었던(것처럼 보이는) 소설가로서의 고민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실된 글쓰기에 대하여' '소설가는 픽션을 통해 진실을 추구할 수 있는가' 등 책을 읽는 독자마저도 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고민을 빠지게 만든다. 실제 줄거리 상 델핀은 픽션을 다루는 소설가, L은 진실(자서전)을 다루는 대필작가라는 점을 들면 이들의 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교하고 가치 있다.


 Delphine de Vigan 델핀 드 비강​

Image ⓒ parlerdamour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책이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이유는, '심리스릴러'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L의 집착일 수도, 혹은 델핀의 편집증적인 환각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 두 여성의 기묘한 만남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결말을 읽어버린 지금도, 과연 L은 델핀의 삶에 정말로 존재했던 인물인가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 때문. 책을 덮고 난 이후 등 뒤가 서늘해지는 건 이 책이 실제로 델핀과 L이 그토록 주장하고 싸웠던 픽션과 진실 그 무엇도 아닌 어떤 곳에 머문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이 소설의 막을 내리는 인물이 결국은 델핀인지, 아니면 델핀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린 L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책의 마지막 줄을 읽을 때면 더 이상 이 책이 얼마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심리스릴러를 꼽는다면 이 작품이 단연 최고일 거라 생각한다.


몇 시간 동안 나는 이 가설에서 저 가설로 옮겨다녔다.

결론을 말하면 어떤 가설도 진정으로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어쩌면 L은 정말로 그 모든 장면을 체험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L의 삶과 책꽂이의 책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 건 기이한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현실은 픽션을 능가할 뿐 아니라, 픽션을 병합하고 편집한다......

만일 그렇다면, 현실은 누구 말마따나 픽션보다도 훨씬 멀리 갈 배짱이,

제대로 즐길 배짱이 있는 것이다.

 

- p. 393



* 덧붙임

쓰다보니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많이도 읊었다. 실제로 저자와의 만남 자리에 다녀온 독자로서 느끼는 건, 이 책에는 작가의 거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물론 L이라는 여성은 예외다. 아닌가?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작가는 끊임없이 이 책이 실제를 바탕으로 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일관하는데, 독자로서는 작가가 교묘하게 설치해 둔 덫에 계속해서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다.

서평 같은 거 읽지 말고, 그냥 한 번 책을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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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스
에마 클라인 지음, 정주연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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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클라인, <더 걸스> 리뷰

 Image Ⓒ 북21

 유년시절의 아이러니는 누군가가 인도해주는 올바른 생활이 아닌, 평소 안 하던 비행을 일삼으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생각보다 크다는 데 있다. 곧이곧대로 수업을 듣고 착실하게 과제를 마치는 평탄한 삶보다는, 주어진 일상에서 엇나갈 수만 있다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멋져보이던 그 때를 생각해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때로는 초라하게만 느껴졌던 그 시절의 치기어린 마음은 10대의 나를 계속해서 초라하고 외롭게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저 아이들과 내가 조금이나마 같아질 수 있을까. 이유없는 작은 일탈도 우상처럼 보였던 당시를 기억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질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에마 클라인의 장편소설 <더 걸스>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외로움의 나날을 보내던 한 10대 소녀가, 온갖 비행을 저지르며 거리에서 살아가는 소녀 무리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비야." 나는 손을 내밀었다. 수전은 악수가 나쁜 일이란 것을 나에게 이해시키려는 듯 웃었다. 악수가 정상인들의 세상에서나 하는 무의미한 상징이란 것을. 나는 얼굴을 붉혔다. 평범한 예절과 형식을 전부 빼고 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것들 대신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침묵이 있었다. 나는 침묵을 메우려고 허둥댔다.

- p. 82

'우리.' 수전은 '우리'에 속했고, 나는 그녀가 느긋하게, 주차장 너머 목적지에 대해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 부러웠다. 공원에서 본 수전과 함께 있던 애들, 수전과 함께 사는 모든 이들이. 수전이 없다는 걸 알아채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 p. 84

"그해 여름, 나는 열네 살이었고 수전은 열아홉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이 부러웠다."

이 소녀 무리는 히피 그룹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대마초를 피우며 자유로운 복장으로 거리를 누비는 아이들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 소녀인 '이비'가 살아왔던 평탄하고 조금은 풍족한 삶과는 180도 다른 삶. 어쩌면 굉장히 위험하고 부도덕한 삶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가족과도 별다른 정을 붙이지 못하고 외로움에 허덕이던 이비는,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매력을 지닌 검은 머리의 '수전'이라는 여자아이를 따라 히피 소녀 그룹에 합류하게 된다. 자유롭고 때로는 방탕하며 세상의 다른 무엇도 걱정하지 않는 그들의 알 수 없는 여유에 이끌린 이비는 서툴게 그들과 동행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 그룹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남게 된다. 방탕한 생활은 물론, 급기야는 살인까지도 저지르는 이들을 보며 이비는 어린 마음에 더욱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책 <더 걸스>는 지금은 성인이 된 이비가, 당시 열네 살에 만났던 수전과 다른 히피 소녀들과의 삶을 회고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일이라는 건 알았다. 최초의 섬광만을 흘긋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출구를 찾아헤맸다, 숨겨진 비빌 문이라도 찾으려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수전이 그 집단과 관계를 끊었는지도 몰라. 어쩌면 수전은 연루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 모든 미친 듯한 소망은 계속 똑같은 대답을 가져왔다. 수전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그 일을 저질렀다.

- p. 366

 저자 Emma Cline 에마 클라인​

Image Ⓒ wmagazine

이비는 수전에게, 세상에게, 무언가 갈구했다.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그리고 아마 수전도, 그 소녀들도 모두 무언가를 갈구했다. 자기 인생을 내던질 만큼 무모하게도. 어른이 된 이비의 삶도, 환멸, 분노, 외로움이 가득한데, 어느 날 어린 시절의 자신 같은 소녀를 만나게 된다. (...) 인생의 여름을 지났지만 세상과 불화한 끝에,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던 불행의 덫을 밟아 그 여름이 남긴 상처를 안고 사는, 하지만 아마도 결국 세상과 화해하게 될 것 같은 한 여자의 이야기로.

- p. 398, <옮긴이의 말>


* 덧붙임

마지막에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책 줄거리와 실제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줄거리가 허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밝혔지만, 조금 무시무시하기도 하다. 그렇게까지 유쾌하거나 감동적인 포인트가 있는 게 아니라 성장소설로 볼 수 있을지, 공감가지 않는다. 결국은 마약과 살인에 휘말린 비행청소년 집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고개를 든다.


솔직히 번역이 그렇게 매끄러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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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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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드 비강, <길 위의 소녀> 리뷰


  Image Ⓒ 김영사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통의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전세 자금이나 결혼식 비용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여느 보통의 이성애 커플들에게,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커플들의 사랑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취업난에 학자금 대출을 갚을 일까지 더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보통의 20대 대학생들만을 비추는 기성 언론에게, 대학에 가지 않은 20대는 20대가 아닐 것이다. 재개발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부동산 투자자들에게는, 매일같이 높은 언덕을 오르지만 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 달동네 사람들의 삶은 안중에 없을 것이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결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삶. 공생과 연대를 말하는 교과서의 몇 줄로밖에 환원되지 않는, 잊혀지고 희끄무레해져서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눈 앞에 보이는 이들을 두고 눈감아 버리는 게 더 쉬운 일이라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문이 열리면서 차가운 바깥바람이 순식간에 현관까지 들이닥친다. 아빠가 얼른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아빠는 벌써 하나도 춥지 않다. 우리 가족은 등 따듯하게 지낸다. 노가 생각난다. 내가 모르는 그 어디에서, 어느 거리에서, 어떤 공기를 숨 쉬고 있을지 모르는 그 아이가.

- p. 85

사회는 이토록 발전했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어가도록 그냥 내버려둔다."

델핀 드 비강의 <길 위의 소녀>는 거리에서 살아가는 어린 여성 노숙자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그러나 현실감 있게 담아낸 성장소설이다. 아이큐가 160이 넘을 만큼 지적으로 조숙한 아이 '루'가 어느 날 거리에서 노숙하는 '노(No)'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모양을 하고 있음에도 지나치게 서정적이거나 비현실적이지 않다. 13살 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사회의 부조리함은, 주인공인 '루'에 비해 겨우 몇 살 많지만 오랜 시간 거리 생활을 한 '노'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통해 그대로 드러날 뿐이다. '노'의 도움을 받아 여성 노숙자의 삶을 주제로 한 발표를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끝마친 '루'는 이후에도 '노'를 계속해서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노숙자였던 '노'는 '루'의 집에서 생활하며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겨우겨우 돌아오려 한다. 하지만 중학교도 겨우 졸업한 노숙자 출신의 미성년 아이에게 주어지는 자리는 사회에서 아주 비좁기만 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에 '노'는 이전의 방탕한 생활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주인공인 '루'는 '노'를 완전히 잃어버릴까봐 별다른 제지도 못한 채 그저 모든 걸 껴안으려 한다.


우리는 초음속 비행기를 띄우고 우주에 로켓도 발사한다. 머리칼 한 올이나 미세한 살갗 부스러기 하나로 범인을 잡아내고, 삼 주나 냉장고에 처박아두어도 주름 하나 잡히지 않고 싱싱하게 유지되는 토마토를 만들어내며, 손톱만 한 반도체 칩에 수십억 가지 정보를 저장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어가도록 그냥 내버려둔다.

- p. 93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던 두 여자 아이의 첫 만남은 그 대조적인 출신만큼이나 초반에는 삐걱거린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될수록 서로를 있는 그대로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이 아이들의 모습보다 더 대조적이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싸늘한 사회의 시선이다. 모든 집이 거리 위의 노숙자들을 한 명씩만 도와주어도 '노'와 같은 아이들이 지금보다 조금은 줄어들거라 말하는 주인공의 목소리는, 때문에 더 진실되고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길 위의 소녀>는 아무도 주목하거나 관심 갖지 않는 이들에 대한 대변의 목소리다.


 ​film 'no et moi'

Image Ⓒ Zabou Breitman


책에는 주요한 순간들을 구분하는 장들이 있어서 시간이 흐르거나 상황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때로는 부로 나뉘어 그림에 붙은 제목처럼 '만남' '희망' '몰락' 하는 식으로 어떤 전망이 실린 제목이 붙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에는 그런 게 없다. 제목도 없고, 플래카드도 없고, 표지판도 없다. '위험하니 조심하시오' '붕괴사고 자주 일어나는 곳' '실망 임박'을 가르쳐 주는 표시는 전혀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옷 한 벌 걸쳤을 뿐이지 완전히 혼자요, 행여 그 옷이 완전히 누더기일지라도 별수 없다.

- p. 225



* 덧붙임

성장소설인 동시에 사회비판적인 면모가 곳곳에 잘 드러난다.

가끔씩, 날카로운 아이의 시선이 읽는 이의 마음을 따끔거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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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린트 -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구글벤처스의 기획실행 프로세스
제이크 냅.존 제라츠키.브레이든 코위츠 지음, 박우정 옮김, 임정욱 감수 / 김영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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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 냅, <스프린트> 리뷰

  Image Ⓒ 김영사

​'인간이 어디까지 나태해질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순간은, 마감을 앞두고도 결과물 완성은 커녕 시작도 하지 못한 내 모습을 발견할 때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렇다(이 서평은 10월 31일 할로윈을 마감으로 두고 있었지만, 게으른 필자로 인해 11월의 첫날에 겨우겨우 작성되고 있다. 죄송합니다, 김영사님...).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출석을 채워가며 따라갔던 수업의 어느 교수님께서 무지막지한 레포트를 내주셨을 때나, 학교에서 취재기자로 활동하며 빡빡한 일정과 함께 편집장의 압박에 밀려 기사를 작성할 때. 그리고 서평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항상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마감'이다. 어느 곳이든 결과물을 내야하는 조직에서 '마감'이란 정말 마술같은 존재다. (글쟁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요술!) 한 간담회에서 만났던 작가나 메이저 언론사에서 매일같이 기사를 쓰는 기자에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했던 나같은 꼬맹이에게, 하나같이 다들 '마감'이라고 대답했던 것은 지금도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아이디어를 더 빨리 테스트하고, 더 나은 결과를 얻으려면

마감날이 다가올수록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이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일에는 항상 '끝'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마감'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물론 따로 통계자료가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 하지만 애초부터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해결했으면 되었을 일들을 하루 이틀 사이에 몰아서 한다는 건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설사 마감을 지켰다 하더라도 결과물의 질까지 보장된다는 법도 없는 것이 현실. 마감날을 간신히 통과한 우리들에게 남은 건 뻐근한 어깨와 부족한 잠으로 10년쯤 늙어버린 거울 속의 내 모습일 것이다.


제이크 냅의 저서 <스프린트>는 이처럼 일을 하면서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효율적인 일처리'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다. 구글의 수석디자이너인 제이크 냅과 그의 동료들은 무슨 일이든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업무 방식과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아이디어를 짜는 기획 회의에서는 왜 다들 '브레인스토밍' 방식을 사용하는가에 대한 고민부터, 결과적으로 더 나은 아이디어는 공식 회의 시간이 아니라 샤워하는 시간이나 집에서 혼자 가만히 시간을 보낼 때 더 쉽게 떠올릴 수 있다는 작은 생각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을 가장 잘했던 때는,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는데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을 때였다는 사실들이 이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고안된 것이 바로 <스프린트>다.

나는 이러한 팀 워크숍에 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런 마법 같은 요소들 - 개인적으로 작업에 집중하기, 프로토타입 제작, 피할 수 없는 마감 시간 -을 팀 워크숍에 추가하면 어떨까?

나는 이 워크숍을 '스프린트'라고 부르기로 했다.

- p. 14

 ​스프린트는 우리 스타트업들에 슈퍼파워를 부여했다. 기업은 비용이 드는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훌쩍 미래로 날아가 완제품과 고객의 반응을 볼 수 있다. 위험요소가 있는 아이디어가 스프린트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의 보람은 엄청나다. 하지만 스프린트에서 아이디어가 실패했을 때는 실망스러워도 투자 대비 효과가 가장 높다. 단 5일간의 작업으로 치명적 결함을 발견한다면, 능률 면에서 최고가 아니겠는가. 이처럼 스프린트는 '힘들이지 않고' 비싼 교훈을 얻는 방법이다.

- p. 31


 Image Ⓒ 김영사 네이버 포스트

구글 벤처스에서 고안해낸 <스프린트>는 아이디어 기획부터 실행까지 5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효과적인 업무 방식이다. 이들은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에 실현가능성 측면에서 위험 부담이 수반되는 몇 가지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면서 마주할 수 있는 비효율적인 방식들을 모두 소거해나간다. 또한 일을 끝마치기까지 가장 효율적으로 업무를 분배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 5일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얻어냈다. 구글 벤처스의 <스프린트>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어지는 단 5일이라는 시간동안, 프로젝트의 바탕이 되는 아이디어 기획부터 솔루션 스케치, 모의 실험을 위한 프로토타입 제작부터 실제 고객과의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혁신적인 방식이다. 이 책은 구글 벤처스 팀이 여러 개의 스타트업들과 만나 <스프린트> 방식을 도입해보면서 얻은 그간의 경험들을 녹여낸 결과물이다. 갖은 시행착오로 수많은 위험 요소들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스타트업들이 조금 더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손실없이 원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해낼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을 눈으로 지켜볼 수 있다.

​이 방해요소들이 불러오는 손실에 관한 연구도 많다. 조지 메이슨 대학교 연구원들은 사람들이 한창 리포트를 쓸 때 어떤 방해를 받으면 더 짧고 수준 낮은 리포트가 나온다는 걸 발견했다. 또한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 연구원들에 따르면, 사람들이 일하다가 딴 데로 주의를 빼앗기면 본래 하던 일로 되돌아가는 데 평균 23분이 걸린다. (앗, 문자메세지가 왔네? 그럼 나머지 연구들은 이 문자에 답을 보낸 다음 알려주겠다!)

- p. 60



* 덧붙임

개인적으로 여러 개의 일들을 동시에 해치워야하는 요즘 같은 때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다만 구글벤처스의 <스프린트> 방식을 내 삶에도 함께 적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협업을 통해 대부분의 일을 수행하는 회사원들에게 더 적합한 책이다. 또한 읽다보면 다들 알고 있는 얘기를 하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다.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게 아닌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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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산 형사 베니 시리즈 1
디온 메이어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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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온 메이어, <악마의 산> 리뷰

 Image Ⓒ 북 21

영화를 볼 때마다 언제나 속이 시원해지는 포인트는 주인공이 사회의 악의 무리들을 잡아다가 벌을 주고 세상의 끝까지 쫓아가 악을 완전히 소탕해버리는 장면일 것이다. 악을 처벌하고 선이 이기는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는 항상 사람들로부터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왔다. 법을 다소 무시하고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나쁜 사람들의 재산을 훔쳐다가 착하고 약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의적 홍길동 이야기만 봐도 그렇다. 사회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문제들을 개인이 직접 나서서 해결한다는 나름의 통쾌한 스토리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입에서 끊이지 않고 오르내려 왔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해결의 주체가 되는 그 개인이 의로움을 행하기 위해 기존에 마련되어 있는 법이나 질서를 무시한다는 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은 편이다. 다시 말해,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히어로 주인공일지라도, 도시 곳곳을 헤집어 놓으면서 죄 없는 사람들의 재산이나 물건들을 파괴해도 괜찮냐는 이야기다.


아동 대상 범죄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살인자의 충격적인 실체,
시신에 남은 단 하나의 표식은 아프리카 전통 창 ‘아세가이’의 상흔뿐!

디온 메이어의 추리소설 <악마의 산>은 바로 '악을 처벌하는 악'에 대한 작품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아동성폭행범들을 보이는 족족 살인하는 한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불신과 비리로 점철된 허술한 사법체계에 넌더리가 난 시민들은 급기야 연쇄살인범을 옹호하고 지지하기까지 한다. 사회가 법적인 사각지대를 해결하기는 커녕 방치하고 있는 환경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살인'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탈출구를 택한 개인과 이를 쫓는 형사 '베니'라는 인물의 대립은 여태까지 보아 왔던 캐릭터들과는 달리 새롭다. 소수자 우대정책이라는 불합리한 사회시스템으로 인해 수년간 승진은 물론 변변찮은 대우도 받지 못한 채 미결 사건들을 처리해 온 형사 베니가 사건 해결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과정은 섬세한 동시에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다.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악을 악으로 해결하려는 살인마의 스토리와, 가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 형사 베니의 이미지는 묘하게 겹친다. 그 가운데서 독자는 어느 무엇 하나 옳거나 그르다고 쉽사리 말할 수 없다.

“경찰에서 26년을 일했는데 남은 게 없습니다. 술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경위 신세를 못 벗어나는 게 술 때문인 줄 아십니까? 총경님도 아시잖아요. 이건 소수자 우대정책 때문입니다. 제 인생을 바쳐서 생고생을 했는데 돌아온 건 소수자 우대정책입니다. 이게 벌써 10년입니다. 차라리 디콕이나 렌스나 얀 브루크만처럼 때려치우는 게 나았어요. 그놈들은 경비 회사로 갈아타서 돈을 쓸어 담고 있다고요. BMW를 몰고 5시 땡 하면 집에 갑니다. 그런데 저는요? 미결 사건 몇 백 갭니다. 마누라한테는 쫓겨났고, 알코올중독도 왔습니다….

그래도 난 여기 있단 말입니다, 맷 총경님. 난 아직 버티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기운이 동나서 그리설은 차에 기대 머리를 푹 숙였다.


“난 아직 이 빌어먹을 놈의 경찰을 그만두지 않았단 말입니다.”


- p. 62


​* 덧붙임


​책이 꽤나 두껍다. 하지만 내용이 흥미진진하고 번역이 매끄러워 읽는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는 추리소설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새롭게 느껴진다. 이런 작품들이 많이 번역되어 국내 출간되길 바란다.

표지 그림은 생각만큼 잘 와닿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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