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02 - 김사과 소설집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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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영이를 읽었었다. 작품의 원 제목이 영이이다. 그런데 표제는 숫자 02이다. 내겐 영이라는 한글 제목이 더 나을 것 같다. 영이라는 작품이 주는 충격과 그 이름이 주는 소박함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영이를 읽은 당시의 인상은 개성적이고 독특한 문체와 어조와 어투가 신선하면서도 불온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02를 읽어보니 특이하다는 데에는 여전히 공감하지만 난해하지도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감정이 지나치게 과잉되어있고 폭력이 난무하지만 작금의 현실이 그러니 그때보다 훨씬 수위가 낮게 느껴진다. 갈수록 현실이 극악무도하니까 점점 무디어지고 웬만해선 놀라지도 않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는데 내가 이런 영이 류의, 김사과 류의 글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폭력적인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분노와 울분을 승화시키기보다는 폭발하는 이 작품들이 오히려 정직하게 느껴졌고 점잖게 대응하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점점 단순화 또는 노골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화, 승화, 이성과 논리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지성이 이제는 되려 짜증이 나기 때문이다. 당장 이 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이 그렇고 사람들끼리의 그악한 혐오가 그러하니까 말이다. 


  영이

  영이는 2005년 창비 신인소설상 당선작이다. 그때 엄청난 문제작으로, 화제작으로 작가는 단숨에 스타가 되었다. 지금 봐도 여전히 영이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초등학생인 영이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또다른 자아를 만들어낸다. 일종의 분열이고 정신적 해체이다. 

  영이는 그러나 '나의 영이라는 말이, 혹은 영이의 영이라는 말이 성가시고 헷갈려서' 자신의 분열된 자아를 순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순이가 영이 대신 부모의 싸움을 보고 또 마지막에는 영이를 지켜본다. "피투성이가 된 영이가 흙먼지 가득한 황갈색 땅에 혼자 누워 있었다. 남김없이 짓밟힌 영이는 빨갛게 웃고 있었다. 다음 순간 짙은 노을이 순식간에 영이를 삼켰다."


  과학자

  고추장을 연구하는 나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고추장을 연구하느라고... 나는 매일 고추장을 먹고 여전히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 계속 고추장을 먹고, 여자친구인 한나에게 고추장을 잔뜩 바르고... 여자친구인 한나는 거식증에 걸려 있었다. 불쾌해지고 역겨워지는 이야기라 읽고 나서도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나의 좁고 긴 방

  젊은 세대의 절망과 욕망이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이었다. 물질적인 욕망은 현대인에게 있어 저주스런 주문과 같다. 이나는 옷이 필요하다. 옷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한다. 이나의 부모는 공장에 나가지만 생활은 늘 어렵다. 이나도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원하는 옷과 구두와 가방을 사려면 어림도 없다. 이나는 승용차 아래에 떨어진 지갑을 주우려는 할머니를 돕는 척하다가 그 할머니를 죽이고 지갑을 가로챈다. 겨우 칠만오천원이 들어있던 할머니의 지갑.

  이나에게는 야망이나 비전이 없다. 4년제 사립대학에 다니는데도 왠지 자신의 미래는 강남의 번쩍이는 빌딩에 있는 고급스런 사무실이나 집이 아닐 것 같다. 자신은 고소하면서도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경기도의 쇠락한 소도시에서, 두부공장에서 장화를 신고 일하고 있을 것만 같다. 이나는 죽은 할머니와 매일 대화를 한다. 환하고 밝은 햇살 비추는 저 밖의 세상은 이나의 세상이 아니다.  


  한편한편의 내용들이 폭력적이고 참혹해서인지, 내가 지금 피곤해서인지 계속 쓰고 싶지 않다. 그만 눕고 싶다. 벌써 새벽 두 시가 되어간다. 대강... 비슷한 내용들이었고 작품 자체는 다 좋았다. 하지만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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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장편을 읽게 되면 리뷰 쓸 거리가 많아서 무조건 소감을 주르르 남기게 된다. 한데 단편모음집이나  한두 편의 단편을 읽고나면 쓸 거리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넘어갈 때도 많다. 이 책도 그랬다. 사실 몇달 전에 읽었는데 그때에는 리뷰 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이 작가의 문체가 대부분 현재 진행되는 사건이기보다 어떤 일이 지난간 후의 일상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보니 굉장히 잔잔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쉽게 쓴다는 인상이 들었었다.  

  한데 어제 오늘에 걸쳐 다시 세 편의 단편을 읽어보았다. 내가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정말 아무나 작가가 되고 책을 내는 것은 아닐텐데,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지 않나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내 의문과 궁금함이  풀렸다. 

  이주란 작가는 편하고 일상적인 단어로  슬슬 이야기를 풀어낸다. 특별하거나 기이한 것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차츰 차분하게 물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봄햇살 같기도 하고 여름의 이슬비 같기도 한, 열정적이거나 놀라운 일로 독자를 사로잡기보다는 그냥 읽다보면 어느새 사소한 일상이 나름의 의미있는 시절로 바뀌어 간다. 작가마다 색깔이 있다고 하는데 여린 노란색이거나 연한 연두색쯤 되는 빛깔이 어울릴 법한 작품들이 이어진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죽은 언니의 딸(조카)과 어머니와 나(이모)가 살아가는 이야기. 조카 송이는 아이답지만 조금 어른스럽고 나는 어머니와 조카에게 책임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부담스럽지만은 않다. 어버이날에 송이는 죽은 언니의 사진 앞에 카네이션을 놓고 세 여자가 운다. 

  죽은 언니를 그리워지만 어둡기보다 따스하고 밝은 햇살이 이미지로 다가오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넌 쉽게 말했지만 

 서울에서 업무에 시달리며 자신을 잃어버렸던 시간을 뒤로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어머니와 둘이서 산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친구와 1박2일 여행을 하고, 남이 아닌 자신과 살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주인공의 평범하면서도 절박하고 진솔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

 얼마나 재미있고 유머스러운지,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십분 공감이 되었다. 중간에 엄청, 소리나게 낄낄낄 웃었다. 165쪽이 특히 그런데, 조지영이" 여러 경우에 이렇게 생각하면 좀 편했다." 아래에 그 여러 경우가 나온다. 그 중. 

  "3. 운동을 하기 싫은데 해야 할 때는 '나는 김연아다' (이것도 연기의 일종이었다.) 4. 어떤 식으로든 이별을 하거나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죽었다.'(다른 설명이 필요 없음.)" 재미있는 걸 지나치지 못하는 나는 여기서 자지러졌다. 

  참 좋은 작가다. 나는 유머가 있고 조크가 있고 개그를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지영의 조금은 어리석고 너무나 인간적인 면에 마음이 짠했고 그 엉뚱해보이는 특이함이 이해돼서 마음이 아팠다. 세상을 견디기 힘든, 심약하고 솔직하고, 자신을 위장하는 게 괴로웠던 조지영은 그래서 죽었다. 그 조지영을 참 잘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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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초판본, 양장)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6월






   불볕더위와 습한 대기로 8월 내 괴로웠다. 스토너를 읽는 중에 쓰고 수정하고 침 맞으러 다니고 금욜 저녁엔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어쩌면 쓰는 중에 스토너를 읽었다라고 할 수도 있고 일상이 우선인 가운데 가끔 스토너를 읽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두권씩 읽고도 리뷰를 멋지게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아주 느리게 밑줄을 긋고도 소감을 쓸 땐 첫 문장이 막힌다. 그렇다해도 스토너는 내게 일용할 만한 양식이 될 정도로 배울 게 많았다. 물론 나는 언제나 배운다. 무지가 나의 토대이니 그럴밖에, 잊어먹어서 탈이지만.

  

  일단 스토너는 영웅적인 인간이 아니다. 또한 루저도 아니고 특이한 인물도 아니다. 스토너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우연히 영문학을 접하게 되고(2학년 학부 교양과목으로 영문학 개론 강의를 듣게 된다) 괴짜인 아처슬론 교수의 관심을 받게 된다. 교수가 스토너에게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한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스토너는 농부가 되려던 길을 버리고 영문학자가 된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일견 고지식할 정도로 학자로서의 삶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그는 평생 조교수였으며 어떤 권력이나 특별한 특혜도 없는, 성실하고 충직한 생활인으로써 살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의 인생엔 특별한 반전이나 빛나는 상찬이 주어지지 않았다.

  첫눈에 반한 이디스와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냉랭하게 시작되었으며 둘은 어떤 우정이나 사랑도 나누지 못했다. 이디스는 스토너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그를 비판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는 것 같았다. 작가는 스토너의 심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었지만 그 외의 인물들은 존재하는 것 자체로만, 표피적으로만 다루었다. 이디스가 왜 그렇게 처음부터 꼬여있고 못되게 구는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누구나 나 아닌 다른 이의 마음을 알기는 어렵다. 또 이디스의 마음까지 일일이 서술했다면 400페이지의 장편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이디스의 책략으로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와도 멀어지게 된 스토너는 대신에 맹렬히 학문에 정진하며 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낸다. 학교에서는 로맥스 때문에(영문학장) 불공정한 일을 당하고 집에서는 아내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스토너는 그러다 캐서린을 만나게 된다.

  둘의 사랑은 온전히 일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간이었으나 로맥스는 스토너를 몰아부친다. 스토너는 캐서린과 헤어지게 되고, 갑자기 늙어버린다. 완고하면서도 학문에의 열정만 남은 조금은 기괴한 교수가 그는 되어가고 있었다. 점점 구부정해지고 늙은 스토너를 스토너 영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학교 안에서 자기들끼리 뒷담화를 한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학생들의 과제를 일일히 살펴보고 그것에 일일이 의견을 달아준다. 그리고 로맥스가 주도한 만찬에서 그는 퇴직하는 명예교수로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된다. 

  이디스는 그가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눕게 되자 그의 곁을 지키며 안타까워 한다. 그레이스가 찾아와 아주 어릴 적, 서로 친밀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던 그 눈빛으로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의식의 끝에서 자신의 저서인 책을 들고 숨진다. 

   인내와 성실로 불공평한 삶을 견뎌낸 사람이라는 점에서 스토너는 평범한 사람들의 대표자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 불가능한 일을 도모하거나 용기로 자신의 처지를 바꾸는 사람도 위대하지만 스토너처럼 자신의 일에 헌신하기를 열정적으로 그치지 않은 사람도 위대하다. 또 그 위대함은 안타까움과 슬픔이 깔린 위대함이고 패배를 전제한 승리라고 할 수 있어 마음 아리다. 

  

  스토너의 삶은 가치있는 것을 향한 여정이었지만 이유없이 배반당하고 무시당하면서 얻은 실패 또한 그만큼 컸다. 

  신형철 문평가는 이렇게 썼다.

 "스토너의 삶은 뜻밖의 '기회'와 그에 따르는 '대가'에 언제나 공평하게 점령당한다. 그런 그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대'와 '실망'의 총합은 결국 0이다. 이 계산 과정은 경이롭도록 정확해서 어떤 아름다움에까지 이른다."

  많은 스토너의 삶이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으며 다시 다른 스토너들이 대물림을 하고 있으리라. 


  소설 말미에 스토너의 죽음에 이르는 혼미하고 아득한 의식의 과정이 아주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죽어가는 스토너의 의연하면서도 평안한 정신이 감동적이었다. 빨간펜으로 밑줄을 그었고 몇 페이지에는 붙이는 메모장을 뜯어 붙였다.  이 책이 작가 사후 50년 뒤에 유럽에서부터 인기를 얻어 재평가되었다는 일화가 사뭇 이 작품의 경이로움을 말해준다. 주인공의 심리가 완벽하게 묘사된 책이라서 심리묘사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할 만한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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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저자 리베카 솔닛, 그녀의 책은 200종을 넘긴다고 한다. 맨스플레인이라는 새로운 어휘가 유행하게 된 책이 바로 <남자들은....>이다. 나는 시간상(?) 그 책까지 볼 여력은 없지만 보통의 독자로서는 따라하기 힘든 사유의 대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을 읽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된다. 나중에 이 책의 어느 부분인가가 내가 쓸 글에 힌트를 줄 것만 같다.  

 이 책은  '문장의 소리'에 초대받은 한 작가가 평소에는 그렇지 않는 편인데 연필로 밑줄을 그으면서 읽은 책이라고 해서 맘에 새겨놓았다가 이틀 뒤인가 구매한 책이다. 밑줄을 원래 그으면서 책을 읽는 나로서는 그러니 책의 반 정도에는 밑줄을 그을만 했지만 자제하고 자제해서 십 분의 일쯤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일종의 생활에세이인데 보통의 에세이와는 확연히 다른 사유와 지식과 경험이 녹아있는 글들이었다. 

  글의 구조는 이렇다. 

  살구-겨울-얼음-비행-숨-감다-매듭-풀다-숨-비행-얼음-겨울-살구

  이렇게 되돌아오는 구조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솔닛은 이야기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이야기는 세계를 이해시키고 연대하게 하며 성장시키는 도구가 된다. 

  단점이라면(물론 이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한문단 한문단이 너무 구체적이고 새로운 지식이거나 정보여서 오히려 이야기로써의 순환이나 되돌아옴의 형식을 잊어버리고 부분부분이 통으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살구는 어머니가 키운 살구나무에서 수확한 과일이다. 쌓인 살구 더미를 바라보며 살구를 나누는 작업으로 시작된 글은 어머니와 자신의 과거를 거쳐 체 게바라의 여정을 따라가고 아이슬란드의 풍광으로 이어지며 <프랑케슈타인>의 작가와 작품을 거쳐간다. 자신의 집 안에 쌓인 살구로부터 세계의 여러 곳과 인물들을 횡단해 극지방까지, 그리고 현재의 어머니와 작가에게서 이야기는 맺어진다. 좋은 문장을 고를 수가 없을 정도로 사유 깊은 글이어서 한편으로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아 독서가 오래 걸렸다. 마지막 '살구'의 장에서 좋았던 몇 문장을 옮겨본다.


"물리치료사가 내게 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만성 통증 같은 경우에도 환자가 그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도록 훈련시키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단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352쪽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늘 우리 주변에, 모든 방식으로 존재한다."-356


"명심하자,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허술한 배처럼 물 샐 틈이 많고, 삶의 대부분을 다른 누군가로 살아간다. 오래전에 죽은 사람,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사람,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낯선 이로 살아간다."-361


"에세이 작가 역시 깔끔한 결말을 제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배를 해변으로 올려 선창에 묶고, 드넓은 바다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다. 끈을 잘라 버리고 그 끈으로 리본을 만들어 모든 것을 단단히 묶고 포장하면 끝이다. 결말을 포장하기는 쉬운 일이고 나는 어려 번 그렇게 결말을 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앞에 있던 복잡한 내용을 배신하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했고, 또 어떤 때는 내가 아니더라도 편집자가 선물 포장과 리본을 요구하기도 했다."-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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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증언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이 두 권의 책은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시녀이야기>는 1985년에, 그 후속작이랄 수 있는 <증언들>은 34년만인 2018년에 출간되었다. 작가는 캐나다의 마거릿 애트우드 여사. <그레이스>나< 눈먼 암살자> 등의 어마무시한 작품들을 빚어낸 소설가이시다. <증언들>을 출간한 2018년도에 애트우드는 79세였다.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시녀이야기>가 오브프레드를 주인공으로 하는 길리어드에서의 시녀의 삶을 다루고 있다면 <증언들>은 '아주머니'인 리디아와 소녀인 그레이스와 니콜이 엮어가는 이야기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연상된다. <1984년>이 전체주의 국가에서 공무를 집행하는 남자가 기록한 소설이라면 시녀이야기와 증언들은 지배체제의 핵심 세력인 '아주머니'리디아와 소녀들이 기록한 이야기다. 

  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길리어드는 신정국가이면서 전체주의 국가이다. 그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아주 낮고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 국가를 위해, 국가의 핵심 세력인 일부 남자들에게 할당되는 존재가 여자들이다. 그들은 여자들의 역할을 극도로 선명하게 분리시켜 놓고 그 역할에 충실하도록 어려서부터 교육시킨다. 

  그래서 여자는 아내와 시녀, 하녀,진주소녀 등의 신분으로 묶어 조종하고 필요에 따라 희생을 강요한다. 상징적이면서 실제적인 장치는 시녀가 빨간 드레스를 입고, 하녀는 녹색의 옷을 입으며 아내는 파란 드레스를 입는다는 식의 룰이다. 이 강렬한 색상 때문에 <시녀들>을 읽으면서 저절로 이미지가 형성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핸드메이즈 테일>로 드라마화되었을 것같기도 하다. <시녀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당장 이 시리즈를 찾아보고 싶었으나 넷플릭스에는 걸려있지 않았다. 웨이브에 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 찾아가서 몇 십회의 드라마를 보는 건 지나치게 시간을 잡아먹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나 인간을 색깔이나 옷으로 규정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체계는 무너지게 되어있다. 그리고 34년 만의 후속작인 <증언들>은 정말 길리어드가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는지 단초가 되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잊혀지지 않을 독서였다. 마거릿 애트우드 여사의 상상력과 지성과 패기에 기립박수를 보낸다. 


* <핸드메이즈 테일> 시리즈를 찾다가 비슷한 테마의 <그레이스>를 보게 되었다. <그레이스>도 애트우드 작가님의 또다른 작품인데, 하녀인 그레이스라는 여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근데 이게 또 너무나 흥미롭다. <그레이스>는 실제 캐나다에서 하녀였던 어린 소녀 그레이스가 주인 부부를 살해하고(물론 단독범행이 아니고 직접 살인한 남자와 공범이다) 구속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실화에서 출발한 이야기이다. 한데 실화라고 생각하니까 더 마음이 아팠다. 하녀인 어린 소녀의 하루하루의 삶이, 자신을 위해서는 단 몇 시간도 살 수 없고 오직 주인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는 작고 여린 소녀의 일상이 비전없이 평생 계속된다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또 그레이스를 탐하는, 하녀를 함부로 물건짝마냥 탐하다가 잔혹하게 내버리는 남자들의 행태가 구역질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작가의 심리묘사가 드라마 가운데에서도 돋보였다. 그레이스를 속으로만 사랑했던 상담의사와 나중에 만나게 된 남편조차도(작품에서, 실화 속의 그레이스는 결혼하지 못했을 것) 그녀의 불행을 자신의 쾌락을 위한 일종의 변태적인 상관물로 여긴 셈이니까. 으, 인간의(특히 남자)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태도는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고,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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