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역사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여름방학 짬을 내어 8박 9일 일정으로 딸과 함께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역사 기행을 겸한 답사를  중국으로 다녀왔다. 동북아공정으로 우리 역사를 중국 것으로 만들고 우리의 흔적을 지우려는 의도가 곳곳에 드러나 씁쓸하면서 중국이 저러고 있을 때 우리는 뭘 했는지 반문할 정도로 회의가 들었다. 중국에서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기행 단체가 심양을 기점으로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국내성, 5호묘가 있는 집안을 거쳐 영광탑이 있는 장백을 지나 발해 유적지를 찾아 나서니 늘 공안들이 일행에 따라 붙어 감시의 눈초리를 보냈다. 현장 답사 후 매일 밤 진행되는 역사 강의는 우리의 역사를 새롭게 작가하는 계기가 되어 그동안 무심히 살았던 날들을 반성하고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역사에 관심을 더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다 새롭게 만난 유홍준 선생의 한국 미술사 강의Ⅰ은 술술 읽어 미처 챙기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금 인식할 수 있게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미술사를 이해하는 데는 예비지식이 필요한 점을 간파한 저자는 각 장의 첫머리에 시대의 역사적 개관, 불교의 전래 과정 등을 미리 설명해 뒀다. 한국 미술사의 통사(通史)인 점에 착안하여 동아시아 미술사 전체의 흐름 속에 한국 미술사를 이해하여 포괄적으로 다뤄 동양적인 문화 속에 깃든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방편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하여 저자는 기술하였다. 한민족의 원류인 한반도 선사 시대에서부터 발해의 미술까지 아울러 통시적인 관점에서 살피고 공시적인 관점에서는 당대의 유물과 유적지를 살펴 그 속에 깃든 이야기까지 책 속에 담아 풍부함과 충실함을 더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 된 구석기 시대 유적은 평양시 상원군 검은모루 동굴에서는 뗀석기와 50만 년 전에 멸종된 동물 화석이 발견되었음을 밝혔다. 정착을 바탕으로 농경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는 간석기를 사용하였고 잉여 농산물 저장을 위한 토기를 제작하여 가히 혁명적이었다. 신석기 시대의 조형 활동은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 발견은 어로에서 수렵으로 바뀌어 풍요로운 사냥을 위해 그림을 되풀이한 획기적인 문화의 한 양상이 조각들에 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무늬토기, 청동기 사용, 고인돌 장묘 문화로 대표되는 청동기 시대는 농경과 목축으로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서서히 군장사회로 발전해갔다. 청동 검은 제관이나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기로 파형동검에서 한국식 세형동검으로 변화해 갔다. 삶의 규모가 커지자 여러 기형의 생활 토기가 만들어졌고, 제의 용기에는 엄숙한 격식이 들어가 제의 분위기를 투영했다. 이 시대에는 고인돌을 축조할 정도로 사회 구성이 컸고, 부족끼리 협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와 삼한 지역의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 낙랑은 철기문화가 급속히 퍼져 여러 부족들이 고대국가로 나가는 기틀을 마련했다. 평안도 석암리 무덤에서 출토된 금허리띠장식은 금속 공예에 발전의 물꼬를 터 나갔다. 원삼국시대에는 철을 사용하고 장묘 풍습이 다양해져 생활문화의 변화가 거세졌다. 권위와 상징적 신비감이 더한 와질도기, 오리 모양에 계관 같은 볏을 덧붙인 도기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낮은 화도에서 구워낸 대표적인 고구려 도기인 네귀항아리에는 힘이 강하게 느껴진다. 백제 도기는 우아한 곡선미와 부드러움, 신라의 화려함을 도기 사진과 함께 기술하였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거대한 돌무지무덤인 장군총을 찾았을 때 규모와 그 위용에 놀랐다. 죽음 이후 영혼의 안식을 위해 장엄한 고구려 고분 벽화는 초상화에서 생활풍속화로 변화해 가다 후기에는 장식 무늬와 사신도로 옮겨졌다. 장식무늬 벽화가 가장 먼저 나타난 동명왕릉은 연꽃무늬를 600개 이상을 그려 간결하면서도 입체적인 느낌을 살렸다. 외래문화 수용에 적극적인 백제는 창의성을 토대로 외래문화를 토착화해 나갔다. 사비시대에는 고분미술은 약화되고 불교미술이 일어났다. 미륵사 창건과 미륵사 출토 사리함,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 뛰어난 불상 조각들이 만들어졌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하고 칠지도와 상아 바둑알 같은 공예품을 전했다. 신라 시대에는 묘제를 간소화한 대신 사찰 건립과 불상에 열정을 바쳐 고분미술에서 불교미술로 미술사적 관심도 옮아갔다. 신라 고분 미술에 나타난 순금 공예품은 뛰어난 누금 세공 기법으로 금관에 샤먼 신앙을 투영한 산(山) 자 세움 장식에 사슴뿔 모양 장식을 덧붙여 장엄한 형태미를 갖추며 정형화했다. 금관의 화려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관테에 드리개를 장식으로 장려(壯麗) 취미를 드러냈다. 이외에도 신라인은 달 모양의 곡옥을 가장 많이 아름답게 사용하였다.

 

 

  낙동강 유역에서 독자적 문화를 갖고 있었지만 신라에 병합되면서 역사 속에 사라진 미완의 나라 가야는 굴곡 많았던 역사만큼 쉽게 와해되고 말아 가야 고분 발굴은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을 강화하기 위한 도굴이라 더욱 안타까웠다. 부흥했던 국가가 망하자 융성했던 문화까지 무상하게 사라져 폐허 속에 남은 주춧돌과 석조물을 통해 가늠할 수밖에 없는 과거 역사다. 고구려의 궁성은 왕궁과 산성이 한 조를 이뤄 전쟁을 대비하는 체제를 갖췄고, 신라의 산성은 평시에는 비워뒀다가 전쟁 시에는 적의 공격을 막고 기습공격을 하는 진지다. 그래서인지 신라의 성은 공격하기 좋은 곳에 자리하여 조망이 넓고 경관이 수려하다. 낙랑은 삼국의 서예와 금석문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고, 금석문인 광개토대왕릉비에 거대한 규모의 비에 예서체로 대왕에 대한 존경과 예를 극진히 표하기 위한 의도였다니 고구려의 웅혼함이 느껴진다. 백제의 금석문으로 최고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에서 나온 은제도금 금강경판은 각필로 눌러 새긴 유려함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신라의 금석문인 진흥왕 순수비는 비로소 법도에 맞는 문장과 글씨로 질박함과 왕의 순수성을 표현했다.

 

 

  불교는 고대국가의 이념으로 종교의 역할에 가장 잘 부응하는 종교여서 탑과 사찰이 많이 세워졌다. 고구려 가람은 목탑이 팔각목조건축으로 되어 있고, 부여의 사찰들은 1탑1금당식 가람배치를 보인다. 미륵사는 1탑1금당식 양 옆으로 날개 건물을 단 명쾌한 배치로 삼각형 구도로 안정감을 보여준다. 불교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신라는 불교 공인 이후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호국사찰의 상징이자 신라의 국력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황룡사는 1탑3금당식으로 병렬식 가람배치로 아늑함을 더한다. 불구와 사리를 장치하는 사리장엄구 중 백제 금동대향로로 삼국시대 불교 공예의 진수를 보여준다. 삼국시대 불상은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보편적 흐름을 형성하는데 이바지했다. 고구려에서 불교는 민간의 구복 신앙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기에 백제와 신라와는 달리 불상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백제는 석불과 마애불을 조성하여 창의적인 조형능력을 발휘하여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태안 마애 삼존불을 조성했다.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던 신라의 불상은 현세적 친근성이 더하고, 미륵신앙이 불상에 반영되어 미륵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다.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고구려 정신을 이어 영토 확장으로 거대한 국가로 성장하며 문화를 형성해 갔다. 무덤 위에 전탑을 세운 분묘 형식으로 독특함을 더했고, 벽화에는 저승에서도 피장자를 변함없이 모시려는 소박한 마음을 담았다. 흑룡강성 영안 발해진 흥륭사에는 연꽃 돋을새김 위에 올려진 석등은 규모가 거대하고 형태가 장중하여 고구려의 기상이 역력해 보인다. 길림성 장백시에 영광탑은 발해의 유일한 석탑으로 각 층에 창문을 나타내 전탑의 답답함을 벗어난 디자인이 독창적인 탑이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니 더욱 찾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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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0-11-25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자성지님. :)
리뷰를 페이퍼로 작성해 주셨네요.

이후로는 '마이리뷰' 메뉴에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성실한 리뷰 고맙습니다.

이 리뷰는 '한국 미술사 강의'에 대한 리뷰이지요?

알라딘신간평가단 2010-11-2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찾았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