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유영익 지음 / 청미디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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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만큼 한국 근대사에 왜곡된 인물이 없다.왜 그가 건국의 아버지인데도 대우를 못받는 것일까?
그의 측근기용과 국내정치의 실패때문이지만 한편으론 근대 대한민국국민의 정치의식부재도 큰몫을 한다.
그가 태어난 19세기말 조선의 사정을 보자.당시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였다.척족정치와 매관매직에 젖은 고종이나 민비같은 위정자들은 근대화를 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서양이나 일본은 19세기 민족주의의 각성아래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화에 매진했고 일본이 메이지유신후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근대국가를 확립하는데 톡톡히 이용했는데 왜 조선은 그렇지 못했을까?조선의 권력자들은 오직 양반 지배층만을 위한 관습과 전근대사회에 집착했다.그들에게 입헌정치란 권력을 내놓는 것이었기때문이다.아니 개화에대한 의지자체가 없었다.
이승만과 서재필이 주관한 독립협회가 군주전제정치를 비판한 최초의 민간조직이었다.아이러니는 매국노로 유명한 을사5적중 하나인 이완용이 이 협회의 부단장이었다는 것이다.변절자였는데도 젊을 적에 개화사상을 접해 개화를 위해 서재필과 합세하여 계몽을 해나간 전력을 보더라도 그의 사고는 보수적이거나 전근대적이지 않았었다.문제는 그후였다.고종과 수구정치의 조정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이승만이나 개화사상가들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려했으니..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이승만이 보수적유생에 가깝던 그가 선교사의 세례로 신문물을 접하고 열성개화파가 되었다.문제는 그후였다.
배화학당시절 이승만은 조선왕족의 방계후손이었는데도 이미 불온분자로 찍힌 사람이었다.이승만의 조선정부비판활동을 역적으로 몰아 사형선고와 종신형까지 받게 한 이 사건은 그에게 고종에대한 배신감과 충격을 주었을 것이고 결국 훗날 왕정을 없애고 공화정을 설립하게 했다.고문과 투옥 5년간의 감옥생활후 미국특사로 풀려난 이승만이 고종을 위해 일할 마음이 있었을까? 개화운동의 가장 큰 박해자가 고종이었으니 당시 조선은 근대화의 가망이 없었다.
미국으로 특사를 간후 약소국의 호소는 소용없다는 걸 그는 눈물겹게 깨달았다.세계는 이미 제국주의의로 가고있어서 조선이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일본만해도 메이지유신후 부국강병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쇄국의 조선은 무지몽매했다.
애국지사들 그들에게도 근대화란 개념은 낯설었을 것이다.유길준과같이 유학파가 아니고는 입헌왕정이든 민주공화정이든 받아들이기가 쉽지않았을 것이다.시대사조에 앞서간 이승만은 평생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을 추구한 것과 별개로 그들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젊은들이였다.
어찌보면 모두 우울안 개구리처럼 국제정세에 시야가 좁았다.일본의 위정자들처럼 영국이나 외국에서 유학을하고 세계열강의 제국주의의 흐름을 알아챘더라면 생각이 달랐을까?
이토히로부미나 후쿠자와 유키치같은 사가현의 정치인들이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처럼 근대화를 할 영민한 정치인들이 없었던 데다 오히려 조선조정이 개화운동을 핍박하는 구한말의 상황에서 이승만같은 이들은 무엇을 할수있었을까?일본이 제국주의의 옹호자로 동양평화를 위해 영국과 결탁해 조선을 보호국화하겠다는 명분으로 한일합방을 하게될때까지 고종은 유유부단했었다.
이것은 일본뿐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유사한 제국주의의 명분이었다.
일본처럼 부국강병과 사민평등은 고사하고 조선은 여전히 전근대적 존왕양이적 사고에 매여 무지했다. 자유민권사상은 근대문명에서 가장 이른 민중계몽운동이자 입헌정치의 척도이나 조선의 지식인들조차 그걸 받아들일 사고가 준비되어 있지않았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악랄했지만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식민지가 된 원인은 조선을 근대화못한 고종과 유교에 젖은 대신들이 좌지우지하던 조선조정이 자초한 것이었다. 구한말 피폐해진 백성을 생각하기보다는 군주독재와 왕권의 유지에만 급급했던 조선왕조는 개화보다 외세에 기대어 왕조의 안위만 생각할만큼 한심했다. 민비에게 휘둘리며 매관매직을 일삼은 고종은 개화는 생각지않았고 황국협회따위나 만들며 군주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없었고 조정대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할때 문명개화에 앞장선 것은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같은 선각자들이였다.양반관료들은 파벌다툼에만 열을 올리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러일전쟁이나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사이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유리걸식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한일합방이후 일제에의한 의병들의 토벌로 조선이 초토화될때 고종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궁중에서는 굿을 하며 이승만같은 개화사상가들을 투옥하여 죽이려한 것외에는 없다.
그나마 이승만이 국제관계의 역학을 깨달아서 조선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이다.그것도 조선정부의 핍박에 결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해야했으니 얼마나 기구한가..,...
미국망명후 국제법을 전공하며 국제간에 힘외에는 법이 없다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절감했을 것이다.하와이에서 그가 ㅡ당시 밀입국이나 노예계약으로 이민온 조선인들이었던 ㅡ한민족을 계몽하려한 노력은 눈물겹다.강대국들의 외면속에 그는 투옥과 가난과 좌절을 수도없이 겪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팔순이 넘도록 조국독립의 염원에 인생을 바치고 결국 조선은 용케 독립하여 이승만은 신생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하지만 대한민국의 앞길은 험난했다.
이내 6.25전쟁이 터지고 이기붕같은 그의 측근들은 부정부패에 휘말렸다.권력이 마약이라고 청렴결백했던 측근들의 변절과 배신은 그의 정치에 오점으로 남았다.결국 그의 국내정치는 독재라불릴만큼 문제가 많아서 정적을 양산했다.
그의 반려자인 프란체스카여사에대해 한줄 안쓸수없다.비록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으나 일국의 퍼스트레이디로 책임감이 강하고 훌륭했다.누덕누덕 기워입힌 이승만의 내의나 일국의 안위를 책임지는 남편대신 집안일을 챙기라며 장인이 보내준 망치와 공구를 보면 가문의 가정교육이 드러난다.그녀가 쓴 6.25전쟁당시 맥아더에게 쓴 편지를 보면 눈물겹다.ㅡ존경하는 장군.부디 우리 국민을 불쌍하게 여겨 도와주십시요.ㅡ그녀가 하와이망명지까지 동행하여 권좌에서 밀려난늘그막의 남편을 보살핀 것을 보면 보통 헌신적인 여인이 아니다.
훗날 부정부패와 비리로 시끄러워지지는 한국의 어느 영부인과는 비교할수없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6.25전쟁이후 한미안보협정이 대한민국국민의 운명을 갈랐다.강대국 미국을 노예계약으로 얽어넣을만큼 이승만같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외교관도 드물다.그 안보조약으로 대한민국이 근대국가로 도약할 발판을 닦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사랑 한반도야...하와이 망명중에도 불러댄 평생 그의 사모곡이었다.
정렬적인 독립운동에비해 이승만의 말로가 불운한것은 측근을 잘못 쓴 탓도 있지만 당시 한국의 국민의식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무지한 탓이 크다고본다.왕정에서 식민지 그리고 갑작스런 민주주의는 친일이 친미가 되며 혼란을 야기했다.근래 이승만을 삼류독립운동가니 독재의 시초니하며 폄하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그렇다고 이승만이 민족의 도살자인 김일성이나 핵으로 동족을 위협하는 북한의 공산당수뇌인 김정은보다 괄시받는다는건 이해가 되지않는다.
그는 엄연히 독립의 영웅이고 건국의 국부이다.그가 제시한 자유와 평등, 반공을 위시한 민주주의국가는 대한민국의 국시이다.
공은 공이고 실책은 실책이다.시대를 앞서간 한 인물의 객관적평가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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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의 반란
임소장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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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흙수저탈출기..
작자는 경제투자를 공부하며 일생의 전환를 따라가게된다.물론 성공이 쉽지않다.한국에서는 인텔리라도 부모배경에따라 대우받는 일이흔하고 대한민국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가난과 차별과 냉대받는 작자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전문성을 표방했지만 외면당한 가진자의 만행과 이중성을 드러낸다.
미국인들처럼 사고하길 원했던 주인공은 당찬 성격이 아니면 버터나질 못했을 것이다.결국 경제적 자립과 성공이 인생을 보장한다.
결국 그는 성공한다.
하지만 공짜는 없으니 이를 따라하려면 진취적 사고는 많은 것들을 감수하게한다.
우선 경제공부를 해야지.
영어는 필수.
인맥과 경험을 쌓아라.
그처럼 맹랑하고 저돌적이지않으면 성공은 힘들다.
작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평등과 자유는 저절로 이루어져 실행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자신이 노력하지않으면 높은 차별의 유리벽을 깨기 힘들다.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존중하고 자신의 존엄을 자각하지않는다면 출세도 자신의 꿈도 실현되지 않는다는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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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 킨 #5 - 12g, 1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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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맛이 입안에 돌면서 향긋한 향을 남깁니다. 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를 손쉽게 즐길수 있어서 좋아요.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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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멸망사 - 개정판 한말 외국인 기록 (개정판) 1
H. B. 헐버트 지음, 신복룡 옮김 / 집문당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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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폐쇄된 나라였다. 문제는위정자들이 근대화를 할 의지가 없었다는 데 있다.
서양이나 일본은 부국강병을 위해 학문과 기술을 근대화에 톡톡히 이용했는데 왜 조선은 그렇지 못했을까?조선의 권력들과 학문은 오직 지배층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아니 기술개발 자체가 없었다.
독립협회가 군주전제정치를 비판한 최초민간조직이었다.이완용의 유년기에 개화사상을 접해 개화를 위해 서재필과 합세하여 계몽을나간 전력을 보더라도 그의 사고는 보수적이거나 존왕양이적이지 않았었다.파란은 그후였다.조정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이승만이나 개화사상가들에게 누명을 씌워 죄를 물으려했으니...이 사건은 그에게 고종에대한 배신감과 충격을 주었을 것이고 친일파로 변절하게 했다.
보수적 유생이든 선각자들이든 그들에게도 근대화란 개념은 낯설었을 것이다.비록 입헌왕정이든 민주정이든 정치사상의 자유를 추구한 것과 별개로 그들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젊은들이였다.
어찌보면 모두 시야가 좁았다.일본의 위정자들처럼 영국이나 외국에서 유학을하고 세계열강의 제국주의의 흐름을 알아챘더라면 생각이 달랐을까?
이토히로부미나 후쿠자와 유키치같은 사가현의 정치인들처럼 일본에서 근대화운동을 펼친 영악한 정치인들이 없었던 조선이 무엇을 할수있었나?일본이 제국주의의 옹호자로 동양평화를 위해 영국과 결탁해 조선을 보호국화하겠다는 명분으로 한일합방을 하게될때까지 고종은 유유부단했었다.이것은 일본뿐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유사한 제국주의의 명분이었다.
일본처럼 부국강병과 사민평등은 고사하고 조선은 여전히 유학에 매여 무지했다. 자유민권사상은 근대문명에서 가장 이른 민중계몽운동이자 입헌정치의 척도이다.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런 근대정치를 근대화에 이용못한 건 고종과 머리가 굳은 대신들이 좌지우지하던 조선이 자초한 것이었다. .구한말 피폐해진 민생을 생각하기보다는 전제왕권의 유지에만 혈안이 된 조선왕조는 구태의연했다. 대원군에 떠밀려 왕위에 오른 고종은 국가안위는 생각지않았고 황국협회따위나 만들며 군주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없었고 조정대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할때 문명개화에 앞장선 것은 선각자들이였다.양반관료들은 굶지는 않지만 동학운동이나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사이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유리걸식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김옥균이나 서재필같은 이들이 국제관계를 깨달은 인간이어서 개화를 주장한 것이다.그것도 갑신정변실패이후 고종이 개화당에게 취한 냉혹한 자세가 얼마나 개화파에게 매몰차고 외세에 비굴했는지 알수있다.외국학자의 연구에는 조선의 혼란이 서글프게 묘사되어있다.
고종과 민비처럼 무능한 군주들이 제 자신의 치부와 권력에만 욕심이있으면서 근대화의 필요는 절감못하고 오직 사리사욕만 채우려했다는 것이 서글프다.
유교의 악습은 왕권신수설처럼 군주독재정치를 옹호하는 것인데 시대가 변해도 이를 타파하려는 노력도 하지않을만큼 경직되어 근대화에 실패했다.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를 비롯해 갑신정변직후 수십명의 개화파인사들을 무참하게 처형한 조선을보면 당시 권력층이 악랄하고 개화에 무지했는지 드러난다. 그만큼 개화가 일이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고도 조선황실은 일제에 병합후 일제에 순응하며 호사하게 사는 삶을 택했다.망국의 책임은 아무도 지지않았다.
외국인들도 조선의 한심함을 느끼고 있었을까??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하고 병합당하게 된 조선의 사정이 안타깝다.어느 나라도 조선의 억울함을 인정치않았다.뿐만아니라 제국주의의 정당함을 옹호하는 시대사조는 아무도 조선을 동정하지않았다.선각자들도 그한계를 분명히 느꼈을까?
분명한 건 역사는 세계는 아무런 호응도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의 현실도 녹녹치않다.일본과 한국의 쌓인 문제들.., 정신대부터 근래 미국을 위시하여 태평양방어선을 구축하며 일본의 보통국가화문제까지, ...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현재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란 걸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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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길을묻다 2023-03-25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열이의 구한말 觀과는 정말 다르네요 역사를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효기심의 권력으로 읽는 세계사 : 유럽 편 -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이해하는 가장 솔직한 안내서 효기심의 권력으로 읽는 세계사
효기심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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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가 아는 역사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쓰여지고 그들의 논리를 정당화하기쉽상이다.왜?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
하지만 그 이면에 진짜 진실이 있다.
고고하게만 여겨지는 서양문명의 뿌리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도 내막을파헤쳐보면 그리 성스럽지않다.왜나면 종교를 통일하여 황제독재를 강화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였으니 알고 보면 종교의 권위로 황제의 위상을 강화한 국교가 생기게된다.
신성로마제국의 성립도 카롤루스 1세가 교황 레오 3세으로부터 (서)로마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이며 이는 정치적타협의 산물이었다 .훗날 이 제국이 황제권력이 약화되어도 명맥을 유지할수 있었던 것도 고만고만한 제후들과 타협과 정치적 배분의 결과이었다.당시 독일제후들은 상당수가 자유도시에서 바치는 무역에대한 세금으로 부를 축적했지만 권력은 누구도 압도적인 이가 없었다 .한사람의 권력독점에 반발하여 제후연합인 신성로마제국이 유지되었다는게 정설이다.. .
이제 영국을 보면 의회가 왜 국민을 호구로 만들었나를 알수있다.국왕이 좋아서 자신의 힘을 견제할 의회를 선택했을까?최고의 잔머리로 세금을 승인해주는 도구로 의회를 만들어 역사에 이름남긴 것이다.영국역사를 보면 민주주의의 효시라지만 글쎄?그들이 남긴 행적은 계산적인 치밀한 행정가라고 봐야 맞다.마그나카르타를 보면 제후들이 왕의 소질이 없는 존왕을 강요하여 서명하게한 것이었지만 결국은 세금 때문이었다.중세의 제후들도 충신도 아니었다.아마 엘리자베스같이 역량이 넉넉한 왕이면 시녀의회를 조정할수있었겠지만 찰스2세같이 무능하면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었다.

유럽인들이 유태인 싫어하는 건 뿌리깊은 일이지만 그중에서도 역병에 미움을 받은 이유가 유대인은 페스트에 잘 안 걸려서인데 문제는 유럽인들이 너무나 더러워서였다.잘난 척하는 콧대높은 유럽인들이 향수가 필수인만큼 유럽인들이 더러워서였다.그러고도 유색인종을 경멸한다니?자기들도 잘난척할거없는데 아직까지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걸보면 우습다.왕들은 희생양으로 유대인들을 선택한건지도....
이러한 상황은 훗날도 반복된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등장하여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부흥을 이끌겠다고 하면서, 우리가 힘든 건 유대인 때문이니 탐욕스런 유대인들을 청소하여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공약을 하니 독일 국민들이 많은 지지를 보내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민족주의, 유대인 혐오, 국가가 국민들을 책임지겠다는 공약까지, 이 모든 것들은 대공황으로 온갖 재난으로 삶이 팍팍했던 독일 국민들에게 너무나도 유혹적인 말들이 아니었을까?
왜 신교가 생겼을까?
평민들뿐만 아니라 왕과 귀족, 영주와 같은 권력자들까지 왜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지지했을까?1302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황제와 왕과 같은 군주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로마 교황의 직접적인 권위 아래 있으며, 현 세상의 모든 권력과 영적 권력 모두 교황에게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의 모든 권력과 돈이 로마 가톨릭교회로 몰려갔으며, 왕과 귀족보다 ‘교황’과 ‘성직자’라는 존재의 권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졌다. 당연히 유럽의 민중들에겐 자신이 사는 국가의 왕보다 교황의 말이 더욱 중요했다. 신의 대리자였던 교황의 말은 곧 신의 말씀이었고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단이자 사이비였다. 교황의 한 마디에 특정 국가의 왕이 이단이 되고, 그 왕을 몰아내기 위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756년부터는 교황이 직접 관리하고 통치할 수 있는 교황령이란 영토 개념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교황에게 재산을 갖다 바치며 교황에게 인정받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했다.경제적 착취도 따르는 것이 당연지사..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부패한 로마 가톨릭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 아니라 교황에 대한 귀족, 제후, 왕들의 반항이었던 것이다.
키예프 루스에서 형제간의 왕위 분쟁이 일어나면서, 980년경 블라디미르가 다른 형제들을 모두 정리하고 키예프 루스의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블라디미르가 키예프 루스의 권력의 정점에 서기는 했으나, 내란의 여파로 나라 안은 아직 혼란스러웠고, 나라 밖에서는 이민족들의 위협에 놓여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정교회가 탄생했다.당연히 정치와 종교의 결합이다.
요즘 우크라이나사태를보면 우리나라 6.25전쟁때 저모양이 아니었을까싶다.무능한 정치인과 분열된 국민의 국론,외세의 간섭으로 엉망이된 나라에 미래가 있을지...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푸틴까지 닮은 점이 전쟁을 원치않는다고하면서 결국 전쟁을 일으켰다는것이다.히틀러가 뮌헨협정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안심하게만들고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것같이 지금 푸틴이 하는 짓이 비슷하다.평화는 힘으로 지키는 것이지 구걸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처칠의 말처럼 세계가 신냉전으로 다시 전환하는 시대에 우크라이나처럼 비극을 겪지않으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할지 역사를 보고 교훈을 얻어야한다..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유화정책에 말려들었다가 지금 처참한 꼴이 된걸보면 북핵때문에 대화하자는 누구말이 얼마나 위선인지 알게된다.즉 후회할 때는 늦었으니 그전에 정신차려야하는데 우크라이나처럼 비참하게 당하지않으려면 우리도 각성해야한다는거다.지금와서 미국과 유럽이 처절하게 저항하는 우크라이나를 돕는다지만 승산은 별로 없어보이며 이긴다해도 엄청난 댓가가 따른다.대한민국이 6.25동란을 전혀 예상못하고 당했던 것과 달리 일년남짓 러시아의 군사적인 시위에 우크라이나는 대응했어야했다.
근래 정치인들이 검은 정치자금에 이용당하며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우습게 여기고 국가의 국시를 혼탁하게 했는데 심히 경계해야할 문제다.자유도 민주주의도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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