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라는 시대 2 - 유신과 천황 그리고 근대화 메이지라는 시대 2
도널드 킨 지음, 김유동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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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만큼 한국인들이 부러워하면서 제대로 이해못하는 사건이 없다.왜 조선은 그런 근대국가로 건국도 못하고 열강에 뒤쳐져 오늘날까지 한국이 일본보다 대우를 못받는 것일까?
그것은 한편으론 19세기조선의 국내개혁정치의 실패때문이지만 주원인은 근대일본국민의 서구화를위한 노력과 근대정치의식이 큰몫을 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태어난 19세기말중반 일본의 사정을 보자.당시 일본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서 낙후된 나라였다.쇼군정치와 다이묘들의 구습에 젖은 일본의 위정자들은 근대화를 할 의지가 거의 없었다.
저자는 조슈와 사스마번의 하급사무라이들이 중심이된 메이지유신이 서양을 모방한이래 일본은 어떻게 19세기 민족주의의 각성아래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화에 매진했고 일본이 메이지유신후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근대국가를 확립하는데 톡톡히 이용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당연히 쇼군은 권력을 내놓지않으려 발악했고 사무라이들은 보신전쟁같은 내전으로 패를 갈라 싸웠다.
하지만 일본의 위정자들처럼 난학을 보급시키고 포루투칼등의 통상을 통해 세계정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막부파와 반막부파가 각기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치열하게 싸운 걸보면 외세에 무지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페리제독에의한 강제적 문호개방후 맺어진 불평등조약으로 약소국의 호소는 소용없다는 걸 일본인들은 눈물겹게 깨달았다.세계는 이미 제국주의의로 가고있어서 일본이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위정자들이 근대화없이는 생존이 불가함을 깨달은 것이 천운이라고 볼수있다.개항후 일본도 당연히 물가폭등과 사회불안이 따라왔고 민심이 동요했다.
위정자들은 상대를 멸문시키는대신 정적들과 타협하여 천황파들이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를 죽이지않고 유형보내고 천황을 복권시킨 건 유혈사태를 피한 지혜이기도하다.뒤따른 폐번치현과 사민평등,소학교설립등등 서구문물의 도입으로 일본인들은 서구화에 눈을 떴다.
하지만 1973년 11월의 징병 조서(詔書)가 공포될시 민란이 일어난 걸보면 일본인들도 신체제에대한 저항이 만만치않았다.사무라이들의 신분도 없어지고 촌락의 천민들과 구분이 없어진 평민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돈으로 징병을 면제받는 세태의 심각성을 자각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제개혁뒤 그가 총리대신으로 일본이 강대한 군국주의 국가로 출현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걸보면 시류를 잘탔다고 할수있겠다.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 뒤에는 이런 인물이 있었다.당시 태평양전쟁의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청년장교로서 러일전쟁에 종군할만큼 일본은 인재풀이 형성되어있었다.
그당시 일본만해도 메이지유신후 부국강병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쇄국의 조선은 무지몽매했다.그래서 만만한 조선이 일본의 눈에 띄인 것이다.
하급 사무라이인 메이지의 주역인 그들에게도 근대화란 개념은 낯설었을 것이다.당시 일본인들도 이토 히로부미같이 유학파가 아니고는 입헌왕정이든 민주공화정이든 받아들이기가 쉽지않았을 것이다.시대사조에 앞서간 이들은 평생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을 추구하다 비명횡사한 것과 것과 별개로 그들은 천황을 옹립하여 민심과 대의명분을 얻는 지혜를 짜냈다.
그들도 일본의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젊은들이였다.
반면 조선은 모두 우울안 개구리처럼 국제정세에 시야가 좁았다.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이 열강의 제국주의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자신들도 그렇게 변모해야한다고 여긴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까?
당시 영국이나 외국에서 유학을하고 생각이 서구화된 정치인들은 로쿠메이칸같은 문화시설을 짓고 서양의 문물에 익숙해져 일본이 문명국임을 과시하며 서구 선진국의 인정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소국가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유럽인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근대 국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일리가 있었다.
가장 부러운 것은 이토히로부미나 후쿠자와 유키치같은 사가현의 정치인들이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근대화에 성공할 영민한 정치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다루히토가 초안하고 이토가 공포한 제국헌법을 보자.
1889년, 제국 헌법은 아시아 제국의 어떤 헌법보다 진보해 있었다. 그리고 유럽 제국의 몇몇 헌법보다도 자유주의적이었다. 하지만 이 헌법에서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의 천황 및 천황에 부여된 주권의 강조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헌법의 수여는 일본에서의 대의(代議) 정체의 개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날 공포된 상유(上諭)는 제국 의회가 1890년에 소집되면서, 의회 개회로 헌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또한 메이지시대에도 특히 하루코황후같이 신분높은 이들이 나서 여성에게도 전문역할을 부여하고 교육을 중시하는 풍조가 유행했다.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레 일본에도 근대식 학교들이 세워졌고, 특히 이전과 달리 여성교육도 시작되어 여학교들도 세워졌다. 당연히 여성이 산업화에 동참하기시작한 후 사회변화가 생겼다.
왜 조선은 그렇지 못했을까?조선의 권력자들은 오직 양반 지배층만을 위한 관습과 전근대사회에 집착했다.그들에게 입헌정치란 권력을 내놓는 것이었기때문이다.아니 개화에대한 의지자체가 없었다.
이승만과 서재필이 주관한 독립협회가 군주전제정치를 비판한 최초의 민간조직이었으나 박해로 해산했다..
서글프게도 동시대의 조선은 근대화에 가망이 있었을까? 개화운동의 가장 큰 박해자가 고종이었으니 당시 조선은 근대화의 가망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조정이 개화운동을 핍박하는 구한말의 상황에서 이승만같은 이들은 무엇을 할수있었을까?김옥균의 시체를 부관참시할만큼 야만적인 조선정부에게 근대화는 꿈같은 일이었다.가령 이노우에가 조선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었을시 그는 일본 정부의 개화 정책과 같은 방식으로 조선 정부를 개혁할 생각이었으나 조선 정부가 비협조적이며 재정적 개혁 등에 반발했다고한다. 이노우에의 일본인 재무고문관은 예산을 정하고 지출을 제한하려했다. 그러나 이것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조선 국왕은 무시했다.무능한 군주인 고종은 책임감이나 국가와 백성을 위한다는 의무감따위는 없었고 일신의 안위만 꾀해서 한일합방이후 자신대신 오명을 뒤집어쓴 을사오적을 위로했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옹호자로 동양평화를 위해 영국과 결탁해 조선을 보호국화하겠다는 명분으로 한일합방을 하게될때까지 고종은 유유부단했었다.이것은 일본뿐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유사한 제국주의의 명분이었다.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저격했을시 그가 동양평화를 위협한다고 고발했다지만 실상 이토가 조선을 합병하는 걸 반대했다는 건 아이러니다.
러일전쟁후 일본이 조선을 한일합방한 것에는 이런 열강들의 묵인이 있었다.륀순학살로 여론이 악화되자 노기 마레스케가 순사(殉死)할만큼 러일전쟁의 피해는 막강했지만 이 전쟁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우위를 결정지었다.거기에 러시아에게서 배상금을 톡톡히 받아내어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을 자극한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일본처럼 부국강병과 사민평등은 고사하고 조선은 여전히 전근대적 존왕양이적 사고에 매여 무지했다. 자유민권사상은 근대문명에서 가장 이른 민중계몽운동이자 입헌정치의 척도이나 조선의 지식인들조차 그걸 받아들일 사고가 준비되어 있지않았다.
한편으론 저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사의 다른 면도 기술한다.그의 동양평화와 일본제국주의에대한 인식이 지금까지 독자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것도 눈에 띈다.
ㅡ안중근은 반일주의자가 아니었다. 안중근이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인물은 의심할 나위 없이 메이지 천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안중근의 가장 통렬한 고발 가운데 하나는, 이토가 의도적으로 천황을 기만했다는 것이다. 안중근에 의하면 천황이 바라고 있었던 것은 한국의 예속 따위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이었다. 안중근이 천황의 생각을 알게 된 것은 1904년, 러일 전쟁을 선언한 선전 포고서에서였다. 안중근은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수많은 승리 기사를 읽고 기뻐했다. 백화의 앞잡이인 러시아의 패배를 한국과 청나라 동포들은 마치 자신들이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함께 기뻐했다고 안중근은 말하고 있다. 안중근이 오직 하나 유감스럽게 여겼던 것은 러시아가 전면 항복하기 전에 일본이 전쟁을 중단한 일이었다. 책속에서 p710ㅡ
일본의 식민통치가 악랄했지만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식민지가 된 원인은 조선을 근대화못한 고종과 유교에 젖은 대신들이 좌지우지하던 조선조정이 책임져야하는 것이었다. 구한말 피폐해진 백성을 생각하기보다는 군주독재와 왕권의 유지에만 급급했던 조선왕조는 개화보다 외세에 기대어 왕조의 안위만 생각할만큼 한심했다. 황후에게 휘둘리며 매관매직을 일삼은 고종은 개화는 생각지도않았고 황국협회따위나 만들며 군주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없었고 조정대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할때 문명개화에 앞장선 것은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같은 선각자들이였다.양반관료들은 파벌다툼에만 열을 올리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러일전쟁이나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사이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유리걸식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한일합방이후 일제에의한 의병들의 토벌로 조선이 초토화될때 고종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고종은 러시아에 줄을 잘못 선지도 모르고 궁중에서는 굿을 하며 이승만같은 개화사상가들을 투옥하여 죽이려한 것외에는 없다.
반면 일본의 위정자들은 당파를 막론하고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해 고분군투한걸보면 부럽다못해 존경스럽다. 이토 히로부미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우리에게는 원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애국자이자 선각자들이였다.미국인인 저자가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토록 상세히 이해하고있다는 것이 놀랍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동전의 양면같은 이중성도 있다.메이지유신을 잘 이해한다면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미묘한 국제관계를 타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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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향방을 가른 금융의 힘 - 금융은 어떻게 한 나라의 운명과 세계사의 판도를 재편했는가
천위루.양동 지음, 하진이 옮김 / 사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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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한두해사이 은행금리가 고금리로 올라 가계가 힘들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하지만 이건 개개인들이 금융에대해 무지한 결과다.다소나마 거시경제를 이해했다면 대한민국국민들이 이렇게 언론들과 건설사들의 빚얻어집사라는 매스컴의 보도에 이용당하지않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역사를 보면 기근과 전쟁의 기억이 가장 참혹했다지만 인간은 망각이라는 게 있어서인지 기억은 쉽게 희미해진다.하지만 이미 수메르시대의 고대에도 금융과 은행자본가는 존재했다.
우리 어릴적 금융이란게 낯설고 어렵던 기억이 생생한데 젊은이들은 요즘 금융에대해 벌써 달관한 듯 하다. 작자는 이제 역사를 뒤흔든 금융의 역사에 대해 이책에서 기술한다. 무엇보다도 고대그리스시대부터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제압한 것이 금융의 힘이었다고 기술한다.솔론의 개혁으로 채무노예를 자유시민으로 되돌린 경제개혁이 아테네황금기의 초석이 되었다.이를 로마가 모방해 12표법에 평민들의 채무노예화를 금지시켰다.
고대의 로마정치인들도 빵과 서커스라는 포퓰리즘을 남발하는 것이 시대적유행인데 통화남발없이는 비용을 댈수없었고 건전한 재정이 오래갈수는 없었다.
지금도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문제가 되는 통화팽창은 네로가 포퓰리즘을 시행하면서 금화와 은화의 순금 순은함량을 줄여 잔꾀를 부림으로써 필요한 경비를 착복하여 로마시대에도 자행되었는데 군인황제시대에는 더욱 극심해져 물가상승을 견디다못해 통제가격정책을 시행할 정도였다.지금도 문제가되는 금융정책이다.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솔리두스금화를 발행하여 통화가치를 안정시킬때까지 로마가 인플레이션으로 멸망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닐만큼 로마의 경제는 통화붕괴를 겪었다.이런 혼란은 대공황이후가 아니라 역사에도 이미 반복되었던 것이다.
중세는 금융이 붕괴된 암흙시대라지만 약탈자로 알려진 바이킹이 해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중세의 주요한 무역상이었다는 것도 부정할수가 없다.대신 카톨릭교회가 멸시한 유대인들이 천대받는 고리대금업을 차지했다.
희안한 일은 중세기 십자군운동이 발단되어 창단된 템플기사단이 대금융자본화되어 본업인 순례자보호보다 주업이 은행업이 된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인지..종교를 빌미로한 인간의 영악함이란 중세에도 속일수가 없나보다..
그와중에 레반트무역이 활성화되며 이탈리아인들은 유태인들의 금융의 단맛에 눈을 떠 메디치가같은 대금융자본이 나타났다.현대적은행의 시작이었는데 영국은 오히려 금융산업의 발달이 늦었다.이유인즉 세익스피어가 샤일록에대한 일화를 쓰기전에 이미 유태인들은 추방당했기때문이다.결과적으로 영국은 유럽본토와 동떨어져 양이나 키우는 후진국가로 남게되었다.
1차 인클로저운동으로 양이 사람을 경작하던 땅에서 몰아낸 것이라며 당시 영국의 사회문제를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신랄하게 지적하고있다.그당시 영국은 이미 산업혁명전 젠트리와 부유한 시민의 자본축적을 부채질하고 있었다.산업혁명은 영국을 제국으로 만든 주동력이었지만 세계를 지배하는데 영국중앙은행의 역활도 지대했다.국채의 세계적유통이나 금본위제를기반으로 대영제국의 금융업은 신대륙으로 전파되었다.
미국이 자본주의의 성지이며 세계금융업의 아성이라고들 평하지만 역사를 보면 그럴만도 하다.
영국과의 독립전쟁도 세금때문에 시작된 것이며 남북전쟁도 그뒤에는 남부의 대규모플렌테이션장원식경제와 은행업을 장악하려는 북부은행들의 치열한 경쟁과 음모가 있었다.링컨이 남북전쟁의 전비를 대기위해 발행한 그린백이 악화로 치부되다가 상업은행의 도움을 받아 결국 미국의 본원통화로 자리잡은 걸보면 금융의 성공도 인간의 노력에 달린 것같다.휼륭한 대통령들의 노력으로 반독점법을 통과시킨 후 미국은 모건과 록펠러같은 대기업의 독점카르텔을 붕괴시키고 자유경쟁시장구조를 만들어 자본주의의 천국으로 발전했다.
미국은 그뒤로도 여러번의 금융위기를 겪고도 살아남아 명실상부 금융천조국으로 부상했다.그들의 번영이 공짜로 된것이 아니다.
대공황은 아마 미국금융에 닥친 최악의 위기였지만 루즈벨트의 뉴딜정책과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국은 결국 금융업에 있어 지구최대의 승자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돌아보자.금융위기와 코로나팬데믹이후 장기간 누적되어온 부채로 온 국민은 부동산 빚더미위에 올라앉고 저금리 정책으로 웬만한 가계와 기업들이 감당못할 부채를 지고있다.지금이 금융 위기보다 더하다고 평한다.국제화시대에 금융에 무지한 대한민국국민의 갈길은 무엇인가?
ETS 공매도 코스닥 ...온갖 금융용어가 난무하지만 금융의 본질을 모르면 21세기에 살아가도 애궃게 피해를 당할 수있다.
무엇보다도 스테그플레이션뒤에 통화남발로 하이퍼인플레이션과 통화붕괴가 따라올수있다.부동산거품은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캐나다 호주 심지어 중국도 골칫거리다.
이제 금리를 올려 남발한 통화를 거둬들이는 긴축의 시대이다.공짜점심은 없다.덕분에 여기저기에서 은행이자를 감당못한다는 곡소리가 들려온다.하지만 그런 빚장이들은 세계경제나 거시경제를 한번 읽어나 보았는지 의문스럽다.카드를 현금처럼 이용하고 주택구입시 은행빚을 얻어쓰는 걸 당연히 여기는 세태이다.하지만 대한민국국민들은 자신의 재정상태를 점검해보면 전재산이 90%가 부동산에 몰빵되어있다는게 얼마나 위험하다는걸 몇명이나 자각할까?미국은 재산의 포트폴리오가 현금성 금융재산이 70%이상이다.아시아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의 부동산집착이 금융에 무지한 것이다.일본이 90년대 부동산거품을 키우다 몰락한 것을 기억해야한다.
부채문제가 심각한 건 대한민국뿐아니다.부동산거품으로 골머리를 앓는 중국도 부채한도로 셧다운까지 거론되는 미국도 세계적 문제이다.거기에 그 빈집들을 받아줄 출산율이 심각하게 저조한 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조선시대 가체가 가수요가 생겨 집한채값이 된적도 있어서 그 까닭에 영정조시대는 가체금지령까지 내린 기록이 있는걸보면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버블이 있었다는 뜻이다.마찬가지로 서양에서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버블,존 로의 남해주식회사의 국채버블파동처럼 지금의 집값폭등도 21세기버블파동의 한 에피소드인 것이다.버블의 끝은 결국 폭락인데 그걸 예측한 이가 정말 없었을까?
작자는 금융에대한 이해없이는 아무리 벌어도 빈곤을 탈출못하고 경제상태를 더욱 악화시킬수 있다고 경고한다.
베이비붐세대는 2차대전후 엄청난 물질문명의 풍요와 유례 없는 경제 성장으로 혜택을 누렸지만 21세기 중반이후의 노동층들에게는 선진국들도 저성장에 진입하여 더는 경제가 성장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 암울한 현실이다.
금융지식도 거시경제를 읽지못하면 소용없다고 작자는 지적한다.
경제든 안보든 세계적 협력이 없다면 어느 나라도 안전할수없다.
70년대이래 다시 떠도는 유류파동의 망령아래 전세대같은 고성장시대의 경제성장은 없을 것이라는 게 경제학자들의 암울한 전망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imf의 치욕스러운 신탁통치를 거쳤지만 노숙자가 범람하던 그시절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않도록 얼마나 경각심이 있는가 묻고싶다.
ㅡ금융시장에는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명언이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것은 언제나 위기뿐이다. 매번 각기 다른 이유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면서도 매번 똑같은 이유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p161ㅡ저자의 주장이다.
종종 영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지만 FOMC나 월가는 태평양건너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의 곡성은 들으려고도 않고 이제서야 빚끌어들여 부동산을 산건 개인의 책임이라고 정부는 말하고 있다. ..언론에서 이제야 다소나마 보도하는 경제위기의 실상을 연구하고 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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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새콤한것이 커피맛이 참 특이하네요.손님맞이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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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처럼 향이 청량해요.손님접대에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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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통령 : 역사의 기초를 다진 위대한 리더들 미국을 만든 사람들 1
한솔교육연구모임 지음 / 솔과나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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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흔히 대통령이 모든 권위와 권력을 갖는 문화라고 생각하기쉽다.하지만 미국도 엄연히 삼권분립이된 나라고 지금도 법원은 트럼프의 유죄성를 주장하고 통치자에게 엄격한 자질을 요구하며 도덕과 여론의 잣대를 들이대는 나라다.미국이 왜 지도자의 축복받은 나라인지 했는지 이 책을 읽어보면 안다.
리더의 자질에는 요즘의 리더쉅,관용,화합,포용,책임감모두가 포함된다.역대제왕학의 교육에 수신과목이 포함된게 우연이 아니다. 지금도 역사에 이름남긴 대통령들은 자신을 단속하며 부단히 노력을 한 이들이다.

전통적인 덕목이 오늘날에도 대통령이나 각계각층의 리더들에게도 요구된다. 대통령의 아들들이 감옥에 간 일이나 자신이 구속된 일이 흔한 대한민국은 깊이 돌아볼 일이다.

미국대통령들이 명문가출신이 대부분인데 그런데도 초대대통령들이 자신뿐 아니라 친인척들의 단속에 가혹했는지 소문난 사실이다.역대 대통령들 국부라는조지 워싱턴같은 대통령들도 공직기강을 세운다는 목적으로 청탁금지법이나 공무원들에게 선물받기금지를 통해 주위를 정화한 걸보면 권력에 대한 경계가 굉장히 강했다. 근래 악질적 엽관주의로 퇴색되었다지만 아직도 미국공무원들이 10달러이상의 선물을 받지않는다는 전통이 남아있다.
요즘 대한민국대통령들이 친족에게 이렇게 엄격했으면 그 흔한 신문지상의 비리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워싱턴처럼 초대 대통령이 스스로 권력을 버리고 낙향하여 독재정치의 싹을 경계한 것도 미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업적이었다.
연방주의자인 존 애덤스나 해밀턴이 지방분권주의자인 제퍼슨과 그렇게 대통령직을 놓고 다투었지만 그들과 토마스제퍼슨도 정적임에도 미합중국연방을 위해 협력한 걸보면 상대를 존중하는 미국의 정치문화가 그들에게서 시작된 듯하다.
그가 영국을 따라잡기위해 시작한 미국의 산업화와 중앙은행의 건립은 미국의 국가적 부의 초석을 놓았다고 할수있다.식민지잔재의 농업위주의 경제에서 벗어나려한 제퍼슨의 식견은 시대를 넘어 미국을 산업화하게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근래 미국의 트럼프대통령도 일가회사나 측근들의 비리가 살살 불거져 나오고 있다. 끝을 보면 알겠지만 정치인이었는지 장사꾼이었는지 그의 처신에 달려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수백년전 미국 대통령들에게도 같았다.
링컨은 가정적으로도 불우했고 남북전쟁의 내전중 대통령이니만큼 권력이 약했으나 공화당관료들을 키우며 남과 북의 조화를 모색했다.요즘 말하는 민주주의의 화합형 리더이다.그가 남부에 관대했고 정치보복을 거의 않은 걸보면 합중국의 화합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수있다.정권만 바뀌면 적패청산이니 정적제거니 정치보복이 흔한 대한민국은 각성할 부분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도 실리형대통령이였다. 19세기말 세계가 제국주의의로 가는 시대에 외교적으로나 알래스카를 제정러시아에서 구입하여 국토를 넓히고 파나마운하개통에 개입하고 백색선단을 건조하여 천연자원을 확보하는등 현실적으로 그렇게 국제감각이 있는 이는 드물다.그의 재임시절 미국이 제국주의의로 나가게되었다는 비판도 있으나 국제정세에는 탁월한 안목이었다.요즘 중국과 미국의 알력에서 갈팡질팡하는 한국이 숙고할 부분이다.지난 정권들에서 대통령이 철학이 없어보이니 외무부장관도 중심이 없어보였다. 중국시진핑에 줄섰다가 미국에 괄시당하고 이제 트럼프이래 시작된 미국의 압박아래 인도태평양방위문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대한민국..며칠전 북한이 미사일발사로 북한의 압박은 더 거세어졌다. 하지만 분명한 건 미국도 중국도 영원한 내편은 아니란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들의 조약돌이고 잇권대상일 뿐인 게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특히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소아마비와 2차세계대전의 비극을 겪은 대통령이다.그러나 승리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연합국과 관료들을 포용했다.그는 뉴욕월가를 주름잡는 은행가출신의 명문집안의 아들이었다.그러나 기득권계층인데도 금융에 통달한만큼 금융재벌들의 편을 안들고 개혁의 칼을 휘둘러 혼란을 가라앉히고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을 잘 극복했다는 평가가 대세다.굉장한 노력파인만큼 노력을 안해도 될 일도 손수 책임지고 나서는 모습을 보인다.징집나가는 청년들에게 손수 부두에서 차를 건낸 이가 대통령이였다는걸 몰랐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맥아더와의 불화에도 파면않고 계속 장군으로 쓴 일이나 사기꾼이란 비난을 듣는 요제프 케네디를 증권감독관으로 기용한 것을 보면 요즘으로 말하면 여론포용형 대통령이라고 해야겠다.
여담으로 클린턴도 링컨처럼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대통령의 권좌에 올랐다.요즘말로는 자수성가형 출세한 사람이다.괄시받는 출신을 극복하기위해서 유권자의 호감을 얻기위해 얼마나 빡세게 노력했는지 그의 의료보험개혁이나 세금정책을 보면안다.

미국대통령들도 국민의 민심을 끌어안고 관료들의 지지를 얻기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역사를 보면 안다 .물론 권력의 중심 , 일인위주의 독재정치는 현대의 민주주의와 거리는 멀다.하지만 대통령으로 산다는 것이 권력의 정점에서 쉬운 일도 아니고 책임과 중압감이 얼마나 막중한지 미국만 봐도 안다. 현대 한국의 대통령들에게 책임감이란 있었을까? 서민들보다 재벌들의 배만 불리던 대한민국정치이들은 미국의 대통령들을 돌아봐야할 것이다. 독선과 불통의 얼룩진 현대 한국의 대통령들..결국 한국의 대통령들은 다수가 수감자가 되었다.천재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미국의 평범한 대통령들만큼만 되었더라면 이런 불상사들이 없었을까?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리더쉽이 없이 표류한 적이 여러번이었던 대한민국,어쩌면 한국의 대통령은 과도기적인 성격의 정치인인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와 전근대적 왕권정치와 유사한 성격의 징검다리노릇을 해야하는지도...그렇다면 자신의 주위와 친족부터 단속해야 할 것이고 더 넓게는 돈있는 사람들, 재벌보다 빈자와 서민들의 입장에 서야할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권력형비리는 모두 잇권과 결탁된 돈때문이었다.이때문에 계층간 갈등도 극심했고 지역간감정도 골이 깊었다..독선 , 아집, 물욕..지저분한 선거운동과 흑색선전중의 한국정치에서 대통령들은 미국의 대통령들처럼 책임감위에서 화합과 포용의 정신을 본받았으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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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5-1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이유도 있겠지만 먼저 국민들의 평가 잣대가 건전하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을 정치지도자로 뽑는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대통령을 우리 국민들의 손으로 뽑는데 왜 거짓말쟁이를 뽑아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