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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셜록 1
박상규 지음 / 후마니타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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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나온 초판을 정말 감명 깊게 읽었는데, 개정판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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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자의 고심 - 기자는 많은데, 언론은? 우리의 자리
믿기자 지음 / 편않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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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언론 기자 이야기라니, 너무 기대됩니다. 시리즈 내 어우러지는 색깔들도 멋지고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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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
금정연 외 지음 / 편않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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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필진들도 대단한데, 표지도 대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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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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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나처럼 읽으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은 재수없거니와, 그런 주문은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은 재수없다. 다분히 출판사의 의도가 느껴지는 이 책의 제목을, 이 책의 저자조차 언급하기 쑥스러울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원래 한겨레신문 토요판 2면 오른쪽에 세로로 놓여 있던 '독후감'들이다. <어떤 메모>라는 몹시 '겸손'하고 '얌전'한 코너명으로, 그러나 굉장히 '도발적'인 내용으로(지금도 연재 중이다). 나는 이 글을 매주 '챙겨' 읽었다(新문과 뉴new스는 더 이상 내게 새롭지 않다. 이런 '다른 시각'을 맛보는 것만이 내가 요즘 신문을 뒤적이는 이유이다). 챙겨 읽었으므로,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이 눈에 익었다. 그러나 꼼꼼히 다시 읽었다. 저자의 도발은 여전히 유효했고, 나의 시선도 그동안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이 '달라짐'은, 정희진의 표현에 따르면 '통과'의 산물이다. 오이는 피클이 될 수 있지만 피클은 다시 오이가 될 수 없다. 그렇듯 독서 이전과 독서 이후는 같을 수 없으며, 가역적이지 않다. '오이와 피클'은 그가 에필로그에서 든 예인데 새로운 것은 아니다. 누가 그랬더라. 책을 읽어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안 읽느니만 못하다고, 그것은 제대로 독서하지 않은 탓이라고.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독서가 곧 혁명이다."(*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독서에서 그치는 것이 혁명은 아니다. 독서에서 비롯된, 독서로부터 촉발된 급진적인 변화가 혁명일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 <이 치열한 무력을>, 안천 옮김, 자음과모음, 2013. 참고)

 

  이런 변화가 순탄할 리 없다.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혁명에 어찌 '피 냄새'가 나지 않을 수 있으랴! 텍스트와, 나아가 저자와, 결국엔 자신과 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선 대상과 갈등하며 읽어야 하는데, 지식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저자 말대로, 자신의 위치성에 대한 '정치적 자각'이 필요하다. 다르게 읽으려면 먼저 자신을 살피라. 논어 어딘가에서 먼지 쌓여가고 있는 切問而近思라는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그러니,

 

  정희진처럼 읽지 말라. 정희진도 정희진처럼 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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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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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동서양의 구분을 도식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편리한 만큼 위험한 방법이다. 가령 서양은 이성 중심이지만 동양은 감성 중심이라는 둥, 서양 사람은 자연을 극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봤다면 동양 사람은 공존 혹은 순종의 대상으로 봤다는 둥. 주류와 경향이야 있을 것이지만 그게 다일 리도 없는 노릇. 주변 상황을 자의적으로 배제하고 이해하는 것은 오해와 착각의 지름길이다.


  상징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대학교 때 만난 두 중년 여교수는 각각 동양철학(유교를 배웠다)과 서양철학(중세철학이었던 것 같다)을 담당했다(전자를 A, 후자를 B라 하자). 내 선입견이 작용한 결과이겠지만 A는 인자해 보였고, B는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로 보였다. 편견은 얼마 못가 깨졌다. A가 수업 중 결혼에 대해 한 말 때문이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은 인륜이고 천륜이다." 유교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때 A는 뭔가 비장하면서도 비정했다. 나는 '비혼'인 B를 떠올리며 질문했다. "그렇다면 학문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인륜을 저버린 것인가." 단호한 답변. "그렇다." A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남자든 여자든 사람 구실을 잘 못한다고도 말했다. 나는 그 학문이 인륜을 중시하는 유교 철학이어도 그러하냐고 물어봤다. A는 동양 철학은 조금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양 철학에 비해 동양 철학은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도 나처럼 B를 떠올렸던 걸까. 어쨌든 그때 나는 인격 수양은 B보다 A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 2004.)을 읽기 전에도 약간 걱정했다. 흔히들 말하는 '동양의 가치'를, 그것도 '고전'을 통해 다시금 듣는 일은 얼마나 하품나는 일인가. 익숙함은 악이다. 아무런 새로운 자극이 없음은 생각과 몸이 썩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선생의 높은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그래서 더 불안했다. 시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기우였다. 선생의 '강의'는 신선했다. 익숙했던 텍스트도 다시 읽혔다. 그의 관점 덕분이다. 선생은 서양 사상의 경향을 존재론적으로 동양 사상의 경향을 관계론적으로 파악한다. ​모두에 언급했듯 이런 이분법은 위험하다. 그러나 대가는 대가이다. 선생은 그런 이분법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고전을 끌어와 쓴다. 그러니까,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관계론이지 동양 고전이 그대로 관계론인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다르게' 읽어도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무엇을 읽고 보든 관계론적인 측면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다. 중요한 것은 '동양'도 '고전'도, 심지어 '나'(신영복)도 아니다. 결국 방점은 '독법'에 찍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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