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천재작가와 평범한 작가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천재작가란 이야기가 저절로 굴러가게끔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작가중에서는 김수현의 작품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그녀의 작품은 마치 어떤 가정 혹은 어떤 연인들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대로 보고 있는듯하다. 억지로 사건을 꾸며대거나 에피소드를 쥐어짜내느라 전전긍긍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으며 바로 이런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서는 내 삶에 대해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된다.

하진은 미국문단에서 천재작가로 불린다고 한다.
<기다림>을 읽으면서 나는 김수현의 드라마를 볼때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모든 인물들이 살아서 펄떡거리며 스스로 이야기를 전개해하고 있었다.
고로 나는 그를 천재작가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기다림>은 불륜이라는 통속적인 소재를 쓰고 있지만 이 작품은 절대 통속소설이 아니다.
중반부까지 린과 우만나가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의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 그들의 안타까운 인연이 거듭 이어질때 나는 작가의 의도가 인간의 자유본능을 억압하는 시대의 잔혹함을 고발하려는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린의 아내 수위의 존재는 만나의 라이벌인 하나의 인물이라기보다는 그저 가부장적 시대배경정도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니 그들의 17년간의 사랑은 결국 허무함만 남았고,가장 가슴에 남는 인물은 뜻밖에도 수위였다. 작가의 궁극적인 의도는 제목 그대로 아름다운 기다림을 말하고자 한게 아닐까?


린과 만나에게 기다림이란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희생한 행위였다.
현재의 행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미래의 행복을 기대한다는것은 어리석다.
만나는 기약없는 기다림에 지쳐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갔고 ,린은 그토록 오랜시간을
기다려온 만나를 얻고 나서도 행복하지 않다.

반면 수위는 린을 기다리는 나날들의 매순간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녀는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 주어진 상황에 순순히 따를뿐이다.
그리고 결국 오랜 기다림의 결실을 맞는다. 하지만 굳이 린이 수위에게 돌아오지 않았어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을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그녀에게는 더할수 없는 기쁨이었으니까.
기다림의 순간 자체를 즐길수 있는 사람에게는 지난 날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없을것이다.
시간은 사랑도 변색되게 하지만 기다림의 행복을 아는 이 앞에서는 무력할뿐이다.

이 소설에서는 기발함과 화려함으로 독자를 잡아끌려는 기교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작가의 담백하고 깊이있는 시선이 느껴진다. 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고 장인의 손맛으로만 맛을 낸 음식을 맛본듯한 느낌이다.
통속적인 설정으로 사랑과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 작가의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천재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무척 기대가 된다.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련한 여운이 꽤 오래 남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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