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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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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심한 역사, 그 추상의 칼날

역사라는 거대하면서도 고집스러운 흐름 속에서 수많은 개인의 삶들은 한 점을 향해 휩쓸려 내려가면서 흐름 그 자체로 추상화된다. 마치 중력이라는 하나의 힘에 의해, 지구 중심이라는 한 점을 향해, 단 하나의 목적성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 흐르는 수많은 물방울들의 집합체이자 일원체인 '강'처럼.

 

흐름 그 자체는 흘러가는 속성에서 기인하는 독자적인 힘을 갖는다. 즉, 흐름은 흐름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입자의 운동성과는 무관한, 압도적으로 흘러가는 힘 그 자체에 의해 흐름의 방향이 결정된다.  역사의 흐름은 개인의 삶에 대해 압도적으로 무심하다.

빈곤이라는 역사는 허삼관 가족의 빈곤을 포함하면서 또 배제한다. 허삼관의 빈곤은 역사 속에서 빈곤이라는 하나의 관념을 구성하는데 일조하지만, 허삼관의 빈곤했던 그 개별적 형태는 역사 속에서 배제된다.

 

그렇게 배제된 개인의 삶은 문학(예술) 속에서 되살아날 수 있다. 무심한 역사의 칼날에 의해 마모되는 개인의 삶은 문학(예술)을 통해 확장되고 본래의 삶의 형태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현재의 개인의 '생'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들을 관통하는 생의 아픔은 동일하다. 그 생의 아픔을 매개로 수많은 우리들은 문학(예술) 속에서 깎이고 패이고 상처입은 각자의 생을 확장시키고 회복한다.

 

내 삶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순간순간들이 무심한 역사의 추상, 그 칼날을 견디어낼 수 있을만큼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고된 담금질이 필요하다. 생의 의미를 녹이고 두들겨서 아주 단단해질 수 있도록, 많이 읽는 것, 많이 생각하는 것, 많이 쓰는 것, 그것이 역사를 대하는 나의 보잘 것 없는 생이 취하는 오롯한 삶의 태도이다.

 

2. 행위의 근원

허삼관은 피를 팔기 전에는 꼭 물을 사발째로 8사발을 들이키고, 피를 팔고난 후에는꼭 돼지간볶음과 향주를 시켜먹는다. 처음 피를 팔러갈 때 방씨와 근룡이로부터 그래야한다. 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경험으로부터의 권위에 의한 지식은 어떤 합리적 사고보다도 강한 힘을 가졌으며 수명도 길다.

우리는 허삼관을 보며 웃을 수 있지만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합리적인 근거에 근거해 행위하고 있을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생각들은 합리적인 근거 위에 세워진 '진리'들인가? 우리 역시 그저 다른 어떤 권위에 의해, 맹목적 믿음에 의해, 혹은 무지에서 오는 단순함에 의해 믿게 된 몇몇 사실들에 근거해서 여덟 사발의 물을 마시고 두 사발의 피를 뽑고는 돼지간볶음 한 접시와 황주 두 냥을 데워먹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3. 피의 상징성

피는 보통 남성적인 힘, 혹은 생명을 상징한다. 허삼관에게는 그 의미가 더욱 특별했다. 노동을 통해 번 돈과 피를 팔아 번 돈의 가치가 다르다. 이 돈의 차이는 아들인 일락이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친자식이 아닌 일락이에게 누에고치를 길러 번 돈으로 음식을 사주는 것은 괜찮지만, 피를 판 돈으로 일락이를 위해 쓰는 건 좀 그렇다. 고 하는 허삼관의 말에서 드러나듯 허삼관에게 피를 파는 행위는 생명을 돈과 교환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피를 판 돈은 곧 목숨값인 셈이 된다. 이 목숨값을 쓰는 방식에 의해 허삼관이 삶과 세계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결국 허삼관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피를 팔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마치 돼지간볶음과 향주를 먹기 위해서는 꼭 먼저 피를 팔아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으로 돼지간볶음과 향주를 '먹기 위해서만' 피를 팔려했을 때, 더 이상 피를 팔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존재 양식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부정되는 경험일 것이다.

한 존재를 지탱하는 삶의 조건이 무너지는 경험은 그로 인한 생의 허무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다만 허삼관의 경우, 그가 피를 팔아 지키고자 했던 가족들에 의해 돼지간볶음과 향주를 먹게 되었고, 그 과정을 통해 그는 피를 팔 필요가 없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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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Rosso & Blu 세트 + 2011 다이어리 - 전2권
에쿠니 가오리.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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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가장 뜨거웠던 시간들도 인생의 다른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생의 흐름 속에서는 일정한 속도로 흘러 지나간다. 결국엔 과거 속으로, 기억이라는 형태로 박제되고 점점 희미해진다.

그 열정적이었던 시간들도 현재라는 흐름에 밀려 생의 왼편으로 흘러서 더 이상 손으로 움켜쥐고 있을 수 없게 되면, 열정의 남아있던 온기가 점점 식어가기 마련이다. 사람의 체온이 늘 36.5도를 유지하듯 '현재'라는 일상의 온도 또한 일정한 온기를 유지한다. 하지만 인생이 가장 화려하게 비등하던 시절의 뜨거움을 잊지 못하고 비등점 온도의 기억에 잡혀 살아가면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되는 일상의 온도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즉 일상의 체감온도가 비등점과 실온의 온도 차이만큼 뚝 떨어지게 된다. 아주 차가운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냉정의 시간, 현재이되 현재가 아닌 죽은 시간들을 보내는 이들은 준세이처럼 과거를 지키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가거나(마치 그가 살던 도시 피렌체, 과거를 지키기 위해 현재를 희생한 도시처럼) 혹은 아오이처럼 과거의 비등하던 시절 이후로 시간이 멈춰버린, 온기를 잃은 현재를 살아간다(내가 보기에 그녀는 아주 팔팔 끓어오르는 것이 두려워서 팔팔 끓기 바로 직전, 잔공기방울이 수없이 올라오지만 끓지는 않는 상태에 머무르기를 차라리 선택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비등점 이상의 온도로 끓어오르기를 동경하는 사람이다).


과거의 열정을 각자의 방식대로 품고 현재를 죽은 시간으로 살아가는 두 남녀가 극적으로 다시 만난다고 해도 과거의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 글쎄, 과거를 품어왔다고 해서 현재를 과거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치한 말대로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니까.

과거에 한 번 끓어올랐던 물이라고 해서 더 빨리 끓어오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아니 과거의 뜨거웠던 시간에 생의 초점이 맞추어져있는 모든 이에게는 냉정에서 열정 사이까지의 온도차만큼이나 아주 정직한 가열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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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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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를 '딸칵'하고 돌리면 저항할 틈조차 주지 않고 광원인 백열전구로부터 전방위로 찔러들어가는 수용한계치 이상의 빛을 대할 때 겪는 아찔한, 순간적인 눈의 마비 상태. 그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맥없이 당한 이라면 누구나 그 순간적이면서 강렬한 간이 실명 상태가 나아지기를 무장해제된 상태로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그제서야 드러나는, 인간의 시각이라는 감각의 사각지대에 감추어져 있었던 폭력성으로 인해 시각의 부재는 불편함을 넘어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더욱이 백색 실명이라는 상태는, 단지 시력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순수함과 어떤 성스러움까지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인 색인 '흰색'의 장막이 인간 본성의 추악한 실체와 이기심을 덮고 있어 보이지 않게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마치 눈만 가리면 발가벗고 거리를 활보해도 상관없다는 불편한 익명성의 역설(즉, 내가 발가벗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누구도 발가벗고 있는 것이 '나'라는 것을 보지 못하므로 발가벗고 거리를 활보해도 된다는 역설적 도덕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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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 24시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느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느낀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순간, 어떤 계기가 되는 사건과 사물에 내 속에 있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투사할 때(아니, 정확히는 내가 투사하는 게 아니라 투사하도록 그쪽에서 요구당한다는 느낌이다.) 불현듯 무언가를 '느낀다'고 깨닫는다.

그러한 순간들은 무언가를 '느낀' 순간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 해야 맞지 않나 싶다. 어떤 한 가지 사건이나 사물 때문에 그런 폭발적인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사건들, 사물들에 우리는 이미 수많은 것들을 '느껴오고' 있었고, 그런 수많은 일상적인 느낌들이 교차되는 교차점에 위치한 특정 사건과 사물이 우연히도 그런 감정적 폭발을 일으키는 촉매가 된 것일테다. 마치 쾰러의 통찰 이론처럼 일상의 감정적 깨달음도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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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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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날 아침, 참에서 깨보니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어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제, 그저께와 전혀 다름없는 아내, 딸, 하루였다. 하지만 휴일에 울리는 자명종, 내 잠옷을 입고 있는 아내, 내가 즐겨쓰던 스킨의 부재, 일상의 이런 사소한 부분들의 변화가 주위 모든 것들을 '가짜'라고 느끼게 한다.


어찌보면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익숙함은 굉장히 치밀하게 우리를 위해 준비된 상황들로 인해 느끼게 되는 주인공적 편안함은 아닐까. 마치 연극무대의 모든 소품들이 주연 배우를 위해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듯, 개인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가 개인의 삶을 위해 모두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삶에 조금은 둔감해진다. 반대로 무대 위에서 합의되지 않은 소품, 합의되지 않은 상대 배우의 변화는 배우를 당혹스럽게 하고, 극 전체에 긴장감을 만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과는 격리된 채 살아가기 때문에, 개인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가 곧 개인의 세계의 범위가 된다. 인간의 자기 중심적 인식 범위, 그 범위의 외부의 것에 대한 실존적 경고메시지가 바로 '낯설다'는 느낌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닐까



2. 아내는 겉모습도 똑같았고, 목소리도 같았다.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감각인 시각과 청각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극히 사소했던 일상의 변화를 바탕으로 우리가 느끼지 못했던 어느 신비로운 감각 기관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냈다.

내가 서있는 무대 위의 변화(내 의지와는 상관없는)는 곧 나의 실존적 위기를 뜻한다. 나의 실존을 유지시키는 어떤 신비로운 감각 기관은 내 삶의 실존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해 최선을 다해 진짜와 가짜 배우, 소품을 골라 경고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오감이 보내는 자극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K가 기억하지 못하는 금요일 밤 한 시간 반 동안의 시간에는 인간의 오감에 의해 K에게 닿지 못했던 신비로운 감각 기관의 신호가 증폭되는 어떤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낯섦을 느끼지 못했던(평소의 감각으로는 구별해내지 못했던) 주위 것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의 실존, 즉 나의 존재를 가장 나답게 유지시켜주는 나의 세계(사람, 공간, 시간 등)에서 우리는 만족감, 행복감을 느낀다. 어느 특정한 이성에게서 나의 실존을 유지시킬 수 있는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내 신비로운 감각 기관은 최선을 다해 메시지를 보낼 것이고, 그것은' 행복'이라는 감정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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