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균 사망 사건에 대한 원청 책임을 부정한 대법원판결이 나왔다.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런 비판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하청부(下請負-이하 그 준말인 하청)라는 시스템 자체가 원청 책임을 피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하청 시스템 전체가 착취적 본성을 지니는지도 모른다. 하청 업자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웠다고는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실형을 받은 하청 업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다. 그렇다면 하청 자본주의, 궁극적으로 하청 제국주의 체제를 정조준한 사회적 담론이 나와야 할 시점인데 어디에서도 그런 움직임을 찾을 수 없다.

 

하청은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 낸 공급 사슬이다. 원말은 したうけ/下請. 하청 시스템은 일본 경제가 한때 미국을 위협할 만큼 잘 나가다가 쇠락 일로를 걷게 만든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다. 일본 하청 시스템은 9차 하청이 있을 정도로 모질다. 전 기업 99.7%가 하청 회사라 30년 동안 임금이 오르지 않았다고 하니 일본에 대한 국가는 부유한데 국민은 가난하다라는 표현은 빈말이 아니다. 하청 자본주의는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경제 구조도 타락시켰다. 직접적인 피해는 물론 대한민국이 입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말 심대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은 세계 끝의 버섯이라는 책을 통해 이 문제에 다른 관지로 접근한다. 일본식 하청 시스템을 공급 사슬로 부른 이가 바로 그다. 자본주의 시장 안팎을 넘나드는 공급 사슬을 통해 송이버섯이 지구 여러 곳에서 일본으로 흘러가는 현상을 자본주의가 만든 폐허 넘어 인간과 곰팡이(송이버섯)와 소나무가 더불어 엮어가는 경이로운 서사라고 본다. 포스트 휴머니즘에 터 잡아 다종 민족지 쓰기라는 인류학적 관지를 잘 드러내 준다. 나는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역자 <해제> 또한 다른 말을 암시조차 해 주지 않는다.

 

인류학자라면 특히 제국주의를 근원 범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학문 본성에서도, 지구 위기 상황인 시점에서도 그렇다. 몰살·제국주의·식민지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칭은 대체로 자본주의를 범주 삼아 이해한다. 제국주의를 직시한 내용은 찾기 어렵다. 심지어 일본 식민지였던 한국 관련 이야기를 할 때조차 피상적이다. 결정적인 대목은 공급 사슬을 자세하게 말할 때다. 그것이 일본식 하청 시스템임을 알면서, 그 시스템이 무역상을 축으로 자본주의 돌연변이종을 만들고 그 방식으로 부역 집단을 통해 식민지를 수탈한 역사의 소산임을 알면서, “창발이란 찬사로 경이로움을 돋을새김한다.

 

1970~80년대 일본과 미국이 경제적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스스로 일본식 하청 자본주의, 아니 하청 제국주의 길로 들어섰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까닭을 칭은 자본주의 범주에서 설명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미국은 정착 식민주의 경험을 토대로 그때까지 세계 지배를 추구해 왔다. 생산자이므로 체제 비용이 필요하다. 이와 달리 일본은 금융 패권을 통해 하청 식민주의로 제국을 경영해 왔다. 장사꾼이므로 체제 비용이 필요하지 않다. 미국이 금융 제국으로 돌아서면서 흑역사를 은폐했지만, 실은 일본식 장사꾼 제국주의 숙주로 전락했다. 이를 분명히 해야 참된 창발이 틈탄다.

 

김용균 재판을 다시 생각한다. 대한민국 하청 시스템이 그러하듯 대법관들이 지닌 관련 법률적 지식과 판단력은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 일제에서 발원했다. 저들은 특권층 부역자로서 대한민국 사회와 시민에게 애정을 품지 않은 종자들이다. 대한민국은 허울뿐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제국 논리를 기쁘게 하청받는 엘리트 계층”(칭의 용어)이다. 작금 대한민국 엘리트 계층이 하는 짓을 보면 일제에 나라를 가져다 바친 대한제국 엘리트 계층과 똑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원청이 무죄란 대법원의 선고는 일제 지배가 감사할 일이라는 천공의 개소리와 같은 본성을 지닌다. 문제는 제국과 그 하청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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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생각 끼어들 여지 없는 아침, 나는 육상궁으로 향한다. 눈에 한껏 진심을 담아 초군초군 살피고 조용히 서서 역사 속 숙빈을 현실로 모셔 온다. 정중하게 고한다: 신덕왕후께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비원 머금어서 다시 한번 궁을 향해 묵념하고 나온다.


 

육상궁을 끼고 백악정으로 가는 가장 서쪽 길에 들어선다. 이 경로는 처음이다. 60대 초반 대여섯이 왁자지껄 떠들며 내려온다. 신라 사투리를 장전한 울대 하나가 소음들을 압도적으로 거느리고 있다. 그 개소리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청와대 전망대 근처도 고요에 금이 가 있다. 연방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과 멀찌막이 떨어져서 나지막이 축원 주()를 낭송하고 표표히 떠난다. 오늘따라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길목 길목 둘러앉아 숲을 흔들어 댄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는 숲에 사과한다.

 

숲에서 나와 성북동 골목을 더듬으며 나아간다. 지도를 보고 등성이 작은 골목 골목을 살핀다. 빈곤의 고고학이 여러 층위를 이루어 쌓여 있는 지붕이며 담벼락이며 널린 빨래며 깨진 화분이 초겨울 햇살에 바래고 있다. 건너편 저택들과는 돌아앉아서.


 

해가 제법 기울어진 시각 정릉에 들어선다. 능침 진입을 막아 놓았으므로 금천 건너편 언덕에 서서 고한다: 숙빈을 모셔 왔습니다. 나는 두 분을 현실에서 이어드린다. 두 분께서 일제 부역 정권 암괴가 빙의한 사령을 거두어 주십사 간곡하게 빌어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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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하순 풍경이다.




2023년 같은 시기 풍경이다.



다른 나무들도 거의 비슷하다. 단순히 작년과 올해 기후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기후 위기 증거인지 아직 단언할 수는 없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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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월 마지막 일요일 아침, 아무런 계획 없이 집을 나선다. 버스 타지 않고 걸어서 관악에 들어가기로 정한다. 수많이 걸었던 그 길을 천천히 따라가며 어제 인연 짓기와 오늘 인연 짓기를 엮고 얽는다. 어제와 오늘 이야기가 맞물면서 역사는 현실로 부활하고 현실은 더욱 중후해진다. 여기서 미래가 창발한다.

 

보고 듣고 맡고 만지는 일이 서로 넘나들며 걸음 속도를 갈래 지게 한다. 가을 끄트머리라 갈래는 비교적 단출하다. 까치산길을 조금 걷다가 인헌공 강감찬 길 안내판에 눈길이 가닿는다. 그 길을 걸어 강감찬 장군 사당인 안국사로 가 볼 생각이 불현듯 든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인헌공을 잠깐 본 탓이리라.


 

원작자 의도를 정확히는 모른다. 드라마 의도는 더욱 모른다. 중국과 한껏 척지고 있는 현 상황, 정치 문외한 대통령, 그리고 아버지 놀이하는 법사를 떠올리면 딱 맞아떨어지는 알레고리가 대뜸 들이닥치니 아연 심사가 날카로워진다. 묵념하면서 간절히 빈다: 장군이시여, 당신께서 그리 소비되는 일을 막아주소서!

 

묵직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채 백악 남서쪽 끄트머리 칠궁으로 향한다. 후궁이면서 임금을 낳은 일곱 분을 모신 사당이다. 흩어져 있던 궁을 여기로 모았는데 그 본궁이 육상궁이다. 육상궁은 우리가 다 아는 최숙빈을 모신 사당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 현액이 연호궁 현액 뒤에 숨겨져 있다. 언제 누가 이래 놨을까.


 

다시 정치적 알레고리가 들이닥친다. 서인 최숙빈: 남인 박정희. 현재 내 능력으로는 안국사 서사도 육상궁 서사도 내막을 알 방법이 없다. 내 음모론적 상상력은 나 하나 인생에 영향을 미칠 따름이지만 권력이 알게 모르게 꾸미는 음모 실재는 사회 전체를 뒤틀어 버린다. 이런 일을 무수히 겪으면서도 설마한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설마 했던 이승만이, 설마 했던 박정희가, 설마 했던 전두환이, 설마 했던 이명박이, 설마 했던 박근혜가, 설마 했던 윤석열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잡았는가. 관악 발치에서도, 백악 발치에서도 나는 죽임당한 자들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숲이 품고 있다가 들려주는 명징한 웅얼거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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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지하철.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일찌감치 듬성듬성 자리가 빈다. 임산부 배려석 옆에 앉는다. 잠시 뒤 장년 여자 사람이 그 앞에 선다. 머뭇머뭇하더니 이내 앉기를 포기하고 옆 기둥을 붙잡고 선다. 다음 정류장에서 비슷한 연배 여자 사람이 탄다.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그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다. 그 자리 앉기를 포기한 여성이 옆에 서 있는 사실도, 임산부 배려석인 사실도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다.

 

내가 내리려고 일어서 한 걸음 채 옮겨 디디기도 전에 그는 내가 앉았던 자리로 이동한다. 두 사실 모두 알고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서 있던 여자 사람은 그 자리에 앉으려 몸을 움직이다가 또다시 포기하고 선 자세로 되돌아간다. 어찌 보면 그는 같은 사람한테 두 번씩이나 양보하기를 당한(!) 꼴이다. 이들이 기울어진 까닭은 견지한 명분이 아니라 명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서다. 명분을 사유화하면 앉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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