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계곡 순례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는데 좋지 않은 소식이다. 오늘(115) 한때 멈추긴 해도 종일 비가 온다는 기상예보다. 가려고 했던 길은 숨은 계곡에서 들어가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 험한 능선을 넘어 하루재를 거쳐 도선사 계곡으로 나가는 경로라서 비가 오면 힘들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다음 주로 미룬다.

 

느지막이 집을 나서 광화문 교보를 향한다.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이 지은 숲에서 우주를 보다를 보기 위해서다. 교보를 떠날 무렵부터 빗줄기가 가늘어진다. 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백악산 정도라면 몰라도 두 배 이상 더 높은 북한산을 넘지는 못하겠구나 싶어, 이내 백악으로 들어간다. 늘 걸었던 그 길을 따라간다.



청와대 전망대에서 제의를 수행한 뒤 전에 걸어본 적 없는 길을 따라 숙정문으로 간다. 한양 도성길을 가로질러 삼청각 쪽으로 내려간다. 성북설렁탕에서 점심 식사하고, 맞은편 언덕 좁은 골목길을 걸어 길상사를 향한다. 길상사 분위기가 전과 다르다.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손길이 더해진 느낌이 들어서 총총히 떠난다.

 

북악산로를 관통해서 정릉 숲 서쪽 경계를 따라 난 소로로 접어든다. 숲이 끝나고 잠시 동네 길을 걸어 정릉에 당도한다. 나무 한 그루마저 정겨운 60년 인연 이 숲은 내게 그리움이자 아늑함이다. 동네 사람 관지에서 보면 그저 산책하기 좋은 곳이나 내겐 고향 한 모퉁이를 떠다 놓은 곳이다. 무심히 다시 오는 까닭이다.



오늘 무심히 다시 왔으나 와서는 유심히 생각한다. 이성계와 더불어 조선을 일으킨 신덕왕후 강() 씨가 영면에 든 정릉은 조선을 팔아먹은 부역 집단 계열 윤석열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팔아먹는 중인 김 씨가 들락거리는 청와대와 대척을 이룬다. 제의를 수행할 지성소로 인식하는 순간이다. 오늘 비가 내린 곡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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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내내, 오늘 아침 일어나 북한산 계곡 순례 일정을 점검하는 내내, 같은 고민을 되풀이한다. 그동안 숲 걷기에서 길 잃고 길 내며 간 적이 허다하지만, 이번은 좀 다르다. 어떤 경로를 택하든 지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검색해 보니 무슨 보호 구역이어서 출입 금지라는 이야기도 분명하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오늘 가고자 하는 길은 북한산 북동쪽에 있는 안다래골에서 들어가 육모정 고개를 넘어 사기막골로 직접 들어가는 경로다. 고개라는 이름이 있는 이상 없을 수가 없는 길이 없다. 크게 우회하는 경로도 창릉천 상류 지점 이상은 길이 끊어져 있다. 보호 시설은 보안상 표시하지 않으니 그 또한 어디쯤 있는지 모른다. 계속 망설인 까닭이다.

 

어떤 불안은 감행을 독려하기도 한다. 나는 북한산 우이역에서 내려 거침없이 안다래골로 향한다. 안다래골은 처음부터 물길을 따돌리며 좁고 가파르게 이어진다. 골이 깊지 않은 대신 기암괴석이 군데군데 있어 짧아도 풍경은 나쁘지 않다. 재 마루에 육모정이 있었으니 이름이 그리 붙여졌고 도봉산 남쪽과 사기막골을 잇는 요로였으리라.



능선에 이르니 과연 출입 금지 표시판이 걸려 있다. 사기막골 쪽도 왕관봉 쪽도 모두 가지 못한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물 한 모금 마시고 이내 목책을 가로질러 길 지워진 숲으로 들어간다. 지도상 등고선과 실제 물길을 살피며 나아간다. 물길이 어려우면 벗어나 어슴푸레 인적 남은 길을 더듬는다. 2시간 뒤 창릉천 합류지에 다다른다.



창릉천은 바위 위로 층을 이루며 흐르는 작은 폭포를 포함해 풍경이 맑고 아름답다. 자기 굽는 가마터, 또는 절터에서 유래했다는 사기막골 이전에 본디는 청담(淸潭)이었는데 계곡물이 맑은 못을 이루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청담초당, 와운루, 농월루 같은 건물도 있어서 도성 인근 명승지로 뜨르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계곡 입구에 송시열 글씨로 보이는 <청담동>이란 각자가 있다. 도봉산 문사동 계곡에 있는 <도봉동문>과 체가 비슷하다. 실제로 청담동 계곡은 서인 노론 패거리가 송시열을 기리는 장소였다. 청담초당을 지은 사람이 그 제자라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도봉산 문사동 계곡과 이 청담동 계곡 사이 육모정고개가 우연만은 아니구나 생각한다.

 

작심하고 찾아온 여기서도 유서 깊은 부역 패거리 흔적과 만나다니. 분노와 허탈이 함께 들이닥친다. 하기야 어디 이뿐이랴. 청담동 계곡 아름다운 풍경을 점령한 부역 집단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강남구 청담동을 점령하고 있다. 아름다운 한강 풍경을 거느린 그 청담동과 이 청담동은 한자마저 똑같다. 이 청담동을 떠나는 발길이 천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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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1021) 오후에 브런치 북 하나를 만들었다. 아직 하나를 더 만들 시간이 남아 있다. 일요일 아침 잠시 고민했다. 숲 걷기를 중단하고 한의원 가서 브런치 북 하나를 더 만들어 출판프로젝트에 응모할까? 이내 숲 걷기로 정한다. 일주일 동안 쌓여 일요일 아침에 스멀스멀 스며 나오는 도시 독을 빼는 일이 더 중요하다.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삼천사 계곡에서 들어가 비봉 능선을 거쳐 구기 계곡으로 나오는 경로를 택하고 간다. 은평구 쪽으로 북한산에 접근한 경험이 여러 번 있어 그렇겠거니 하고 버스를 탔는데 잘못이었다. 연서로와 진관로를 확실하게 구별하지 않아 노선버스 번호를 착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가 내리려던 정류장이 두 길이 만나는 곳 가까이 있어 조금 더 걸었을 뿐 갈아타지 않고도 목적지에 도착했다.


 

삼천사 계곡은 물길도 사람 길도 돌투성이다. 복류하는 경우가 많아 물길은 말랐고 돌과 돌을 딛고 가야 하는 사람 길바닥은 시선을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는다. 잘 알려진 길인지 사람이 많다. 둘러앉아 먹고 마실 만한 곳은 벌써 시끌벅적하다. 숲에 오는 인간적 목적, 그 너머 숲에 갖추어야 할 도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있을까.

 

얼마쯤 들어가자 길이 둘로 나뉜다. 마침 지나는 중년 여자 사람이 있어 두 길 가운데 어느 길이 멋진지 아느냐고 묻는다. 좋으냐고 물으면 편한 길을 알려주지 않을까 해서 그리 물은 것이다. 그는 서슴없이 자신이 가려던 길과 다른 길을 가리킨다. 걸으며 보니 과연 멋진 길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 대부분은 아까 그 다른 길로 가고 나만 이 길을 걷고 있을까? 이유는 아마도 숲에 드는 목적과 맞닿아 있으리라.

 

능선에 다다라 사모바위를 거쳐 걸었던 적 있는 비봉 능선에 잠시 몸을 맡긴다. 곧 승가사 앞을 지나서 구기 계곡으로 들어간다. 그다지 큰 계곡은 아니나 1급수에서만 볼 수 있는 버들치를 많이 품은 물이 흐르고 있다. 상류 작은 웅덩이에서 시작해 버들치 교라는 다리가 놓인 제법 큰 물길을 지나도록 사람들이 버들치 이야기를 한다.


 

여러 사람이 하는 버들치 이야기는 대개 매운탕이나 어죽으로 마무리된다. 저들이 숲에서 부동산·주식 투기 떠벌이고, 부역 정치 쉴드치는맥락과 같다. 그런 이야기를 하필 숲에 와서 하는지 숲에서조차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숲을 야외에 있는 트레드밀로 여기고 인간적 탐욕을 가감 없이 배설하는 부박하며 파렴치한 행위가 숲을 오염시키며 모독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각하다. 자해며 자살임을 모르니 말이다.

 

사죄와 속죄 제의로서 숲 걷기를 마치고 구기동 큰길로 내려와 음식점을 찾는다. 계곡에서 먼 탓만은 아닌 이유로 손님이 거의 없는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혼자 들어오는 손님에게도 손을 내젓지 않는다. 잘 먹고 나오면서 주인한테 맛있는음식이라 하지 않고 좋은음식이라 감사를 표했다. 맛있다는 말은 달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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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과 관악산에 이어 북한산 계곡 순례 마무리에 들어간다. 북한산은 규모에서 앞 두 산을 압도한다. 관악산은 일상적인 지성소를 찾느라 소곡까지 톺아 스물이었지만 북한산은 이름있는 곳만 챙겨도 스물이 넘는다. 다섯 번에 열두 곳으로 들어가게 일정 잡는다. 큰 눈 내리기 전에 마쳐야 한다. 오늘은 구천 계곡으로 올라가 소귀천 계곡으로 내려온 다음 진달래능선길로 잠시 올라갔다가 백련사 계곡으로 내려올 생각이다.

 

구천 계곡에서 발원한 대동천을 따라 난 길을 걷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난다. 지도를 확인하고 되돌아 나와 건너편 시가지 길로 들어서려는데 곧바로 백련사 계곡에 닿는 길을 본다. 경로를 바꾼다. 거꾸로 백련사 계곡으로 올라가 구천 계곡으로 내려오련다. 백련사 계곡은 작지만, 비가 좀 내리면 풍경이 알뜰할 곳이다. 쩌렁대는 독경 소리가 더없는 소음이다. 백련사 계곡이라는 이름이 야속하다 싶은 찰나 나타나는 무덤 하나.



심산 김창숙 선생 유택이다. 독립운동과 해방 후 정치 활동을 통해 나타난 반제국주의 인생은 물론이려니와 말년에 박정희가 예의상 찾아왔을 때 인사받지 않고 돌아누웠다는 일화가 내게 깊은 인상으로 각인돼 있다. 선생 유택이 여기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모름지기 숲이 이 근처를 지나는 내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알려준 덕에 여기 설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숲에서 만난 그 많은 무덤 가운데 처음으로 극진하게 예를 갖춘다.

 

심산 선생 유택을 둘러보면서 든 생각은 정성스럽게 격조 높게 기려지고 있지 않다.’. 봉분은 물론 주위 조경이 엉성하고, 심지어 멧돼지가 훼손한 부분은 보수 중이라는 알림 글이 무색하게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다. 차마 그곳에 앵글을 맞출 수 없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면서 또 생각한다. 반제국주의 전사 김창숙을 여기 방치한 자들이 바로 특권층 부역자 박정희를 국립묘지에 모신 자들이며 저들이 현 지배집단이다.

 

옹골진 사죄와 속죄를 걸음마다 심으며 계곡 길을 오른다. 능선에 오르니 소귀천 계곡으로 가는 소로를 막아 놓았다. 무시하고 직진하려는데 마침 어린아이를 포함한 한 가족이 그 앞에서 휴식을 취하는 바람에 우회해 능선 길을 따라 내려온다. 다른 소로가 지도에 그려져 있어서다. 거기도 역시 막아 놓았다. 이번에는 바로 직진한다. 길이 아리잠직하고 고요하다. 좌정하면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가 보이는 지성소도 있으니 좋다.


 

소귀천 계곡 물소리가 청량하다. 골이 깊고 갈래가 많아선지 수량이 실해 보인다. 인기가 많은 길이라 끊임없이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버섯과 인사를 나누는 틈틈이 단풍을 눈에 담는데 내 또래 남자 사람이 내려오면서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이상하게 올해 단풍은 예쁘지 않네요.” 그 말 듣고 살펴보니 미처 푸른 물을 비우지 못한 잎과 이미 검은 물이 가득한 잎이 한창 붉은 잎에 과연 어지러이 섞여 있다.

 

건강한 활엽수는 그렇지 않은 나무보다 조금 늦게 일제히 색을 바꾸어 아름다운 단풍을 빚어낸다고 한다. 이를 두고 번성하기 위해 세운 전략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무리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올해 단풍이 이런 이치에서 벗어나 있다면 어떤 기후 문제와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후 문제 또한 여지없이 제국주의 체제 소산이므로 단풍 상태만 보더라도 숲은 반제국주의 으뜸 전사여야 하지 않나.

 

소귀천 계곡 끝에서 만난 진달래 능선 따라 대동문을 향하지 않고 반대로 구천 계곡을 향한다. 구천 폭포 때문에 구천 계곡인지 알 수 없지만 구천은 높은 하늘이란 뜻인데 이름 대로 계곡이 가파르고 낙차 큰 바윗길로 덮여 있다. 위험해서 긴장하는 시간이 길지만 그만큼 기분은 고조된다. 거의 다 내려와 촉촉하고 비옥한 부엽토를 조금 담는다. 도봉·관악과 합토해 집, 한의원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나무와 풀을 응원하려 함이다.



, 한의원에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여남은 분() 식물 생명은 거의 아내나 내가 선물로 받았다. 그런 분 식물은 대부분 일 년 안에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내 한의원 분들은 13년째, 집 분들은 7년 이상 살고 있다. 이런 차이가 사람을 아껴 사람이 된 나무라고 생각하며 사는 내게서 연유한다고 주위 사람들은 말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숲을 반제국주의 전쟁 전우라고 생각하는 일은 결코 신비주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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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구도 수행을 좇아 온 내게는 단학(丹學), 참선, 방하(放下), 좌망(坐忘), 명상, 기도 같은 개념과 경험이 켜켜이 쌓여 있다. 어느 순간 나는 이들이 평범하기에 내 삶과 그 정체성을 이룰 수밖에 없는 일상과 불연속인 무엇이라는 진실과 맞닥뜨린다. 설혹 연속인 무엇이라 하더라도 특별, 더 정확히는 예외로서 무엇이며 아주 찰나적-그렇지 않다면 중독-이며 그래서 배타적인 무엇임을 알아차린다.

 

배타성은 자기 완결이라는 망상과 인과를 주고받으며 끝내는 그 인과마저 벗어난다. 인과를 벗어난 자기 완결은 스스로 거룩함을 부여한다. 그 거룩함을 성불이라 하든, 등선이라 하든, 구원이라 하든, 말짱 다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자기기만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악의가 아님은 물론이다. 인류가 생태 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빚어낸 문명이 음성 되먹임을 이탈해 자신을 포함한 온 생태계를 비가역적으로 수탈·살해하자 나름 극복한답시고 모색한 대안이다. 파멸 속도를 나름 늦추기는 했지만, 치명적·근원적인 단점을 내장하고 있다.

 

수행과 그 결실 수혜가 지극히 고립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다. 당최 왜 이런 수행이 필요했는지를 망각해서다. 인간이 문명이라는 도구로 온 생명과 공생하는 팡이실이를 파괴하고 소수 지배 집단의 물질 야욕에 몰두해서 일어난 참극을 극복한다면서 똑같은 방법을 쓴 셈이다.

 

나는 그래서 단학, 참선, 방하, 좌망, 명상, 기도로써 경지에 오른 신선, 생불, 요기, 성자 따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온전한 영성과 그 영성을 사건으로 일으키는 신적 존재는 일상 팡이실이를 통해 현현한다. 중뿔난 방법, 심오한 각성, 고결한 지혜는 또 다른 수탈·살해 덫이다.

 

코메디닷컴 보도에 따르면 eBay가 영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행한 설문조사에서 91%가 일상사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다는 데 동의했으며, 56%는 그 일상사가 명상 같은 방법보다 더 평안할 수 있다고 답했단다. 진리다. 어떤 진리도 평범한 일상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진실을 보탠다: 인류가 30만 년 전에 추방한 숲을 일상으로 복권해야 한다. 숲에 들고 나는 일은 장비과시하며 등반하는 일이 아니다.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일과 꼭 똑같은 일이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등산화도 스틱도 없이 등산하다니, 무섭다. 나는 대답한다: 등산화 신고 스틱 찍으며 출근하다니, 우습다. 내게 일상은 반제국주의 전쟁이며, 인간 너머 나무와 풀이 전우며, 전우애가 평안을 선물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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