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주 눈 질벅대던 날 백악산 남서쪽 어느 자락에서 나무 막대기 하나를 거두어 지팡이로 삼았다. 미끄러질 때를 대비해서다. 실제로 제법 도움이 됐거니와 더 큰 도움은 심리적 안정이었다. 그 나무 막대기를 누군가 나처럼 지팡이로 써도 좋다고 생각하며 정릉 버드나무 곁에 꽂아 놓았다. 거기서 뿌리 내리고 잎 돋아 살아나면 더 좋겠다는 헛생각이 잠시 스치는 바람에 슬며시 웃었다.

 

이번 일요일에는 거꾸로 정릉부터 시작해 백악산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처음 타보는 꼬마 마을버스를 이용해 노량진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탔다. 신설동역에서 우이신설선으로 갈아타고 정릉역에서 내리는 비교적 간단한 경로를 따랐다. 정릉 숲을 걷는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나오기 직전에는 우산을 써야만 할 정도가 됐다. 신덕왕후께 예를 올리고 제의를 수행한 뒤 조금 서둘러 걸었다.

 

금천 가 버드나무로 가보니 꽂아 놓았던 나무 지팡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내 눈에는 멀리서도 확연히 보이는데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는 모양이다. 당연하다. 신덕왕후께 예를 올리고 제의를 수행하는 내 모습 또한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과 같다. 심듯이 꼭 눌러주고 정릉을 떠나 성북동 쪽으로 올라가는데 북향 산비탈은 덜 녹은 눈이 비를 맞아 더 미끄러웠다.

 

지지난 주처럼 숲에서 나무 막대기 하나를 거두어 지팡이로 삼았다. 이번에는 더 도움이 됐다. 북악산로 어느 구간은 사람들이 밟아서 단단한 빙판이 된 눈에 비가 수막을 형성한 탓인지 심하게 미끄러웠다. 지팡이가 아니었다면 네발로 기어갈 뻔했다. 길상사로 내려가는 도시 길도 군데군데 그런 빙판이 깔려 있다. 종종걸음을 쳐가며 늘 가던 음식점으로 들어가 막걸리부터 한잔 들이켰다.

 

따끈하게 속을 덥힌 뒤 심우장으로 향했다. 언덕배기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앞으로 가야 할 골목길 전체가 빙판임을 알아차렸다. 비가 진눈깨비로 바뀌면서 순식간에 지면을 얼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는 지팡이도 힘을 쓸 수 없었다. 숲 상황이 골목길보다 낫다고 예측하기 또한 어려웠다. 돌아서 내려왔다. 큰길을 따라 다시 올라가 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숲길로 가지 못한다면 도시를 걸을 수밖에 없다. 삼선교-혜화동-원남동-창덕궁-북촌-청와대-육상궁 경로를 머릿속에 그리며 성북로 큰길을 내려왔다. 오늘은 도시 길이 인연이라 말하는 듯 진눈깨비가 멎을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육상궁에 들어가 예를 올리고 제의를 수행한 뒤 후원 느티나무 곁에 지팡이를 꽂아 놓았다. 이 지팡이와 저 지팡이는 같지만 이로써 달라진 의미를 덧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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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일어나 내려다보니 밤새 눈이 와 쌓여 있다. 한낮에도 영하 기온을 유지한다고 하니 아이젠은커녕 등산화조차 없는 나로서는 숲에서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만 한다. 서울 둘레길 관악산 구간 일부와 은천골을 합한 정도면 괜찮다 싶어 걸어서 출발한다. 아파트 뒷산 능선을 따라가다가 살피재 건너 까치산길로 접어든다. 여기부터 생태 다리 두 개를 거쳐 관악산 본 자락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는 줄곧 능선 아닌 사면 길을 택한다. 풍경이 더 좋을뿐더러 무엇보다 사람이 드물어서다.

 

여태 홀로 걷지 않은 숲은 없다. 숲에 가는 목적이 다르니 다른 이와 함께 걷지 못한다. 나아가 숲에서 마주치는 다른 사람들과도 그리 살가운 눈빛을 주고받지 않는다. 드물게 길을 묻거나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하는 경우 말고는 섞일 일도 없다. 더러 좋은 산행 되세요.’라고 먼저 인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거기에도 대부분 소극적으로 응대한다. 그들이 내 속을 모른 채 그들 식으로 말하듯 나도 그들 속을 모르니 내 식으로 말한다. 요컨대 제국 찌꺼기 냄새 풍기는 등산객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눈이 쌓인 탓인지 은천골에는 인적이 없다. 고요히 제의에 집중한다: 접수(接水), 음수(飮水), 삼배(三拜), (). 백설 눈부시니 물소리 더욱 맑다. 들고 나기까지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으니, 심사가 엄밀해진다. 매우 비밀스러울 때 거룩함은 숭고를 띠고, 웅대하게 번져갈 때 거룩함은 장엄을 두른다. 아직 장엄은 겪어보지 못했으나 기대난망인 듯하고 홀로 잠기는 숭고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등산화에 아이젠 장착하고도 벌벌 기는 사내 넷을 뒤세우고 총총 숲을 나와 강감찬 생가터로 향한다.



허울 국가가 미리 챙기지 못한 사이 살기 바쁜 사람들이 야금야금 조여들어 좁고 비뚤거리는 경계를 지니게 된 강감찬 생가터는 사뭇 초라해 보인다. 그나마 이 자리에 있던 석탑을 박정희 안국사가 가져가 버려 더욱 썰렁하다. 나는 거기서 작은 돌멩이 둘을 거두어 안국사로 가 석탑 기단 앞뒤에 놓아준다. 생가터와 석탑을 되 이어주려 함이다. 식민지 시절 왜놈들한테 훼손당한 석탑이 오늘만큼은 반듯하고 기품 있어 보인다. 석탑을 떠나 나오다가 나는 홀연히 안국사 북쪽 숲에 이끌려 들어간다.



, 이런 숲이 있었다니! 드넓지는 않으나 맑은 날 한낮인데도 어둑할 정도로 울창한 침엽수림이 눈 한가득 들어온다. 아주 자주 고마움을 표하는 말이 튀어나온다. 이 작은 숲이 봄, 여름, 가을에는 어떤 느낌을 줄까 벌써 궁금하다. 이미 기대감으로 변한 아쉬움을 남겨 놓고, 강감찬 생가터와 석탑 잇는 일 아니었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그 숲에서 나온다. 생사를 달리하는 인간과 숲과 돌과 땅이 어우러져 주고받는 팡이실이 역사가 일상에서 경이롭게 발현한다. 즐겁고도 엄숙하게 점심 먹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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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궁에서 정릉까지 백악 남쪽 사면을 굽이굽이 넘어가는 길목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이 있다. 만해 한용운이 생애 마지막 10여 년을 살다가 운명한 집이다. 심우장이라는 이름은 서재에 걸려 있던 위창 오세창이 쓴 편액에서 왔는데 언젠가 없어지고 지금 것은 일창 유치웅이 쓴 글씨다. 심우는 불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뜻한다.




몇몇 글에 일부러 총독부 건물을 등진 북향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반대 이야기도 있다. 비승비속으로 산 만해는 영숙이라는 이름을 지닌 딸을 두었다. 그 딸은 총독부 운운 이야기를 부인했다. 딸이 한 말이니 더 믿을 만하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딸은 심우장이 지어진 뒤에 태어났다. 나중에 태어난 어린 딸에게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이상 왜 북향집인지 딸은 알 리가 없다. 듣지 못했기에 모를 뿐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2012년 어떤 매체가 한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가 아버지 사상과 작품, 그와 관련한 사회적 삶에 대해 그리 곡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주 흔한 일이다. 증조부에서 딸에 이르는 내 가족 5대만 살펴봐도 그렇다. 증조부 항일무장투쟁 얼과 삶은 아들은 물론 그 뒤 자손에게 옹골차게 전해지지 못했다. 평범한 인간사기도 하고 식민지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 살풍경이기도 하다. 단재 신채호 며느리 이덕남은 특별한 예외다.

 

과거 인물을 둘러싼 서사는 현재 상황이 투영된 구성물이다. 만해를 영웅화하려고 원인론적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의 사실성을 전유할 권리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문제라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만해가 어린 딸을 앉혀 놓고 혹자는 내가 총독부 건물을 마주하기 싫어 일부러 북향집을 지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지어낸 말이니 현혹되지 말라.”고 당부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일은 얼마나 기이한가. 오히려 사실이 아니라손 치더라도 왜 그런 서사가 만들어졌을까를 상상하는 일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성숙한 자세 아닐까. 순수 사실만으로 조립된 서사가 이치상 존재할 수 없다면 모든 서사 가치는 개체별 진위가 아니라 맥락에 의거 판단해야 한다. 맥락은 생동하는 배치(agencement(F.)_들뢰즈) 사건의 다른 이름이다.

 

2023년 마지막 날 나는 백악 넘어 심우장으로 갔다. 만감을 되작거리며 한참이나 서성였다. 심우장을 나설 때, 대놓고 일제에 부역한 특권층이 다시 집권한 뒤 급변하는 나라 풍경을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이 배치 한가운데를 흐르며 심우장이 왜 북향집인지를 어떻게 서사화해야 할까? 그 딸이 한 말처럼 성북동 지형상 다 북향집을 지을 수밖에 없어서 그리 지었다는 게 사실이라 인정해야 사실의 힘에 입각한 반제 전선이 굳건하게 세워질까? 녹으면서 질벅거려 더 미끄럽고 성가신 눈길 위에서 상념이 자꾸 뒤섞인다. 꿈에 보여 다시 찾은 신덕왕후릉을 다 돌아 나왔음에도 발길이 길게 뒤로 끌린다.

 

2023년이 속 시원히 떠나가지 않았는데 2024년은 이미 왔다. 이 글을 쓰다가 민주당 이재명 대표 피습 뉴스를 접했다. 국힘당 대전 신년회에서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이 일을 언급하자 일부에서 환호성이 터지고 쇼입니다!” 했단다. 내게 이 환호와 말은 그렇게 서사를 만들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재빨리 대규모 수사팀을 꾸린 것도 그 상상력을 자극한다.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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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은 마지막 남은 달동네라 불린다. 지도만 봐도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대뜸 알 수 있다. 백사마을은 남북으로 곧게 뻗은 불암산 남서쪽 자락 북서향 비탈에 자리한다. 그 앞으로는 너른 마들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들평야와 백사마을 사이를 만만치 않은 야산(산책로 이정표에 누군가 손 글씨로 덧쓴 금화산이라는 이름이 있음) 하나가 갈라놓지 않았다면 운명은 지금과 전혀 달랐으리라. 금화산은 백사마을을 고립시켜 마지막까지 토건 세력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작용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어쩌면 백사마을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이런 정치·경제적 지정학이 처음부터 작용했을는지도 모르겠다.

 

백사마을은 1960년대 도시 정비사업을 밀어붙였던 박정희식 토건 독재 소산이다. 청계천, 영등포, 서대문 일대 판자촌을 때려 부수고 그 주민을 강제 이주시킨 곳이 바로 백사마을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기에 백사마을이라 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삶의 터전으로 보기 어려운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버린 사람들은 스스로 더불어 공동체 마을을 일구기 시작했다.

 

먼저 온 사람이 평지 가까운 아래부터 집을 짓고 그다음에 온 사람이 차례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며 잇대어 집을 지어 마지막에는 산등성이까지 900가구를 이루었다. 나중 짓는 사람은 먼저 지어진 집 일조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자투리땅을 살려 자연스럽게 이웃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훗날 이런 생태를 배려해 서울시가 보존형 재개발 사업을 기획했지만, 별별 우여곡절을 겪으며 뒤엉켰다. 아직도 갈등은 풀리지 않고 있다. 보존책이 온전하지 않았다, 정치 변화에 휘둘렸다, 주민대표자회의 간부들이 거액을 횡령했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 주민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다.

 

조폭 통치 판에 여당이 뭉그러지자, 보스 오른팔인 현직 법무부 장관이 장을 맡은 웃기는 비상대책위원회에 반해 백사마을 주민 비상대책위원회는 얼마나 눈물겨운가. 쫓겨와서 자리 잡은 곳에서 다시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말 그대로 비상인데 대책이 없으니 말이다. 900가구 가운데 70가구 남아 터전을 지키면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기약 없이 하고 있다. 이야기 나누는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수시로 흩어져 허공을 떠도는 주민 눈동자를 보며 내 가슴에는 눈물이 한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내 가슴속 눈물은 결코 연민이 아니다. 백사마을 풍경은 내가 1010년을 살았던 동소문동 616번지 달동네와 많이 닮았다. 아니 근본에서 같다. 거기서 나는 재개발에 걸려 쫓겨가는 사람, 폐허가 되어가는 집을 목격하며 거의 마지막까지 버티다 떠났다. 그 무섭도록 슬픈 기억은 이내 도화선이 되어 그 뒤에도 두 번이나 재개발에 걸려 쫓겨났던 기억을 가차 없이 터뜨렸다. 시뻘건 공가 딱지가 나붙고, 버려진 고양이가 길냥이 되어 밤마다 울부짖고, 마침내 전기와 수도가 끊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들이닥치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절망감은 실로 형언하기 어렵다.

 

이 공포와 분노, 그리고 절망감은 제국이 일으키는 정착형 식민주의 절멸 전쟁에서 북미대륙 토착민이 느낀 감정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 실제로 이런 토건형 재개발에서 살아남는 원주민은 10% 미만이다. 분담금을 감당하지 못해 헐값 딱지를 팔고 떠날 수밖에 없다. 권력과 업자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사업을 벌인다. 주택 공급 정책이라 떠벌이지만 빈 땅에 짓는 것도 아니고, 무주택자에게 혜택이 실팍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닌 협잡이 그 요체다.

 

나는 폐허로 변해가는 백사마을 골목 골목으로 들어가 시린 풍경을 사진에 담는다. 자국 정착형 식민주의를 시전하는 허울 국가 부역 행위에 대한 증언이자 제국주의에 맞서는 항쟁이다. “찰칵소리마다 떠난 이들과 땅과 숲을 소환해 전우로 삼는다. 마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보듬은 뒤 불암산으로 들어간다. 길 없는 숲을 헤치기도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며 중계동, 남양주시, 공릉동 경계를 넘나든다. 숲에서 나올 무렵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다. 소란에 들뜨는 성탄 전야 도심으로 발길이 향하지만, 가슴은 떠나온 백사마을에 내려앉는 정적으로 깃든다.



금화산에서 건너다본 백사마을




처음 만난 공가




백사마을 언덕길에서 저 멀리 보이는 전혀 다른 세상




누군가의 이름이 있었던 자리 




아직도 누군가 있을 듯한데




못다 쓴 연탄 몇 덩이가 는적는적 뭉그러져간다 




골목 끄트머리 저기, 화장실 아닙니다




이름 자체만으로 눈물겹다




예수 믿는 사람 떠난 자리에서 예수는 여전히 고난 받는가




백사마을 떠나며 불암산 자락에서 바라본 북한산 능선이 유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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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끈 매고 나서도 한참 동안 현관 앞에 앉아 있는다. 갈 데를 정하지 못해서다. 경험상 이럴 때는 무조건 일어나 걷는 쪽을 택하면 된다. 평일에 늘 걸어서 넘어가던 산길을 따라간다. 살피재 지나 청림동으로 들어서면 옛친구들이 살던 봉천동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골목 풍경이 펼쳐진다. 그 위에 덮치듯 들어앉은 고층 아파트단지와 극적 대비를 이루며 나지막한 웅얼거림 소리를 낸다. 멈춘 시간 틈에서 나는 냄새를 곰곰 풍긴다.

 

까치산 숲으로 들어가 어머니 싸리나무를 뵙는다. 내가 본 싸리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되어 보호수로 지정할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결국 막혔던 싸리나무다. 그 사이 숲 관리인이 수관 절반을 떠받치는 줄기 하나를 베어버렸다. 그 탓인지 생명력이 다해 가는 듯, 돌꽃과 곰팡이가 큰 줄기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나는 물을 부어 드리고 속죄와 감사와 기원을 담아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 숙인다. 주위 나무들도 바람 소리를 빌어 동참해 준다.

 

소곡으로 내려와 건너편 숲으로 들어간다. 거기 계신 어머니 참나무를 뵙기 위해서다. 인근 숲 네트워킹 허브로 믿어지며 자태가 수려하고 옹골지다. 이 정도 참나무는 실제로 50종 이상 생명을 품어 함께 산다. 예컨대 도토리거위벌레는 도토리 속에 알을 낳는데 유충은 그 도토리를 먹고 자라며 성충이 되면 도토리가 열린 가지를 잘라내 적과(摘果) 작업을 해주어서 튼실한 도토리가 생산되게 한다. 나는 물을 부어 드리고 머리 숙인다.

 

까치산길을 따라가다가 중간에 나와 인헌시장으로 들어간다. 해장국으로 점심을 먹은 뒤 다시 능선길을 걸어 관악으로 들어간다. 마애미륵불 좌상이 새겨진 큰 바위를 조금 지난 곳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내 지성소 골짜기로 향한다. 본디 이름이 없는 골짜기지만 나는 이 골짜기를 은천골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 아래 마을에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났고, 장군의 아명이 은천이었기 때문이다. 골짜기와 물을 세심히 보듬은 뒤 숲에서 나온다.


 

안국사로 간다. 안국사와 안국문 현액이 아무래도 박정희 글씨인 듯해서 가보려 함이다. 내가 아는 박정희 필치와 일치한다. 직접 증거는 없으나 안국사가 1974년 정권 유지를 위한 상징 조작 고리로 박정희 지시에 따라 지어졌다는 기록을 보니 거의 분명하다. 그 의도와 무관하게 성웅 기리는 일이 잘못은 아니되 나는 이제 안국사 영정 말고 생가터(낙성대)와 거기 있던 석탑 앞에 서련다. 나라 구한 분과 배반한 놈, 구분은 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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