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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 갈등을 피하는 병······· - 불안과의 공존
·······개인사적으로든, 사회사적으로든 불안을 격심하게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갈등을 회피하게 마련입니다. 갈등을 통해 삶의 기술이 체득되고 건강한 거래가 가능한 성인의 인격이 형성된다는 원리적 이론이 타당하다는 것과 갈등이 몰고 오는 모든 불안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 경우 한때 공적 공격을 당하면서 생긴 두려움과 불안에 극심하게 시달렸습니다.·······저항이 불가능함으로써 각인되는 무기력은 두려움과 불안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빠르게 우울증과 결합하도록 몰아갑니다.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그런 공적인 갈등 앞에 당당히 노출되기 어려울 것입니다.·······대면 자체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등의 요인을 미리 제거하거나 갈등이 생기면 한사코, 무조건 무마하려 들겠지요. 이른바 회피반응입니다. 이것을 마주하면서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내면의 힘을 키우는 건강한 감응을 할 수 있으려면 아마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동안 치료자의 위치에서 환우들의 고통을 공감할 때 우울은 그야말로 단도직입이었습니다. 불안이 심한 분들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이 부분도 감응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감사도 하고 있습니다. 환우와 공감하는 마음자리를 넓힐 수 있게 해주신 하늘의 선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 쪽 문은 열리는 그런 것입니다. 갈등 앞에서 쪼그라져 주름 잡혔던 불안한 마음결이 다음 삶의 혜안을 머금고 있다면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지 않을까요.(82-83쪽)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의 부모는 매우 상반되는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녀는 그 둘 중 어느 쪽에 맞추는 것이 좋은지 전혀 판단할 수 없어 늘 불안했습니다. 격렬한 부부싸움이 잦았음은 물론입니다. 소녀는 그 때마다 공포로 얼어붙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소녀는 부모의 말에 무조건 ‘예’라고 대답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입을 다물고 견디는 습관이 붙었습니다. 누군가 싸움을 걸어오면 재빨리 눙치고 넘어가는 데 선수가 되었습니다. 양보 여왕, 배려 천사로 굳게 자리 잡을수록 소녀의 영혼은 파리해져갔습니다. 소녀는 그 흔한 사춘기도 겪지 않고 매끈하게 어른이 되었습니다. 한 남자 사람을 만났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해서 애걸하듯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돈 벌어다주고 그 대가로 몸을 취하는 수컷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감정의 교류란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자빠진 자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 사람은 급기야 우울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치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가족들이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너, 아직도 고생을 덜했구나?!”
여전히 공포와 불안 때문에 갈등을 회피하고, 그럴수록 우울해지는 소녀가 내면에 오도카니 앉아 있지만 빠른 속도로 자라나 변해가는 중인 어느 여자 사람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제가 겪었던 숱한 상담에서 이 여자 사람처럼 “네 네 네 네, 맞아요, 선생님!” 소리를 반복했던 사람은 다시없습니다. 들을 때마다 아프고 아렸습니다. 그가 살아온 세월이 한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고비를 넘어가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가엾고도 장했습니다. 네 네 네 네가 네 네 네로, 네 네 네가 네 네로, 네 네가 네로 줄어드는 현장을 지키며 그와 함께 저도 공포와 불안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거래, 나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어떠한가요, 그대는? 그대 생의 공포와 불안, 거기 맞물리는 우울, 견딜만한가요? 그것을 정색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 네, 맞아요, 선생님!, 똑 이렇게 말입니다.
머리가 하얘진 밤, 욕망에 둔해진, 그러니까 그렇다면 서로 넉넉해질 수 있는 어느 시각, 흔들리면서 우리는 또렷이 공포와 불안에게 질문합니다. “정녕 네가 내게 들이닥치면 무엇이 어찌 되는 것인가?”
무섭지 않다고 단언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 순간 후후 입김을 불면서 멸치국수 한 그릇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서로의 무서움을 함께 이야기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