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정상 진료하느라 미룬 대청소를 초이튿날 한다. 한 시간 반에 걸쳐 진공청소기로 해묵은 먼지와 냄새를 샅샅이 걷어낸다. 갑진년 맞이다. 느지막이 집을 나서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책 한 권 품고, 중학천 버드나무-수송동 소나무-조계사 안팎 회화나무-관훈동 이이 집터 회화나무로 이어지는 도심 나무 순례를 한다.


 

점심 먹고 나서 천천히 미도산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자락길을 거쳐 바로 누에 다리로 향한다. 다리 위에서 서초경찰서를 사진에 담는다. 몽마르트르 공원 남쪽 끄트머리에서 대검찰청을 사진에 담는다. 공원을 나와 동광로와 서초대로로 돌면서 대법원을 사진에 담는다. 이어 반포대로로 들어가 소로를 따라가면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과 서울중앙지방법원을 사진에 담는다. 서초중앙로 고개로 올라가 29길로 돌아들며 서울회생법원을 사진에 담는다. 이는 사법 권력 기관을 보행으로 포위하고 사진으로 체포하는 의례 행위다. 마침내 미도산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외끌이 저인망에 저 눈먼 특권층 부역 떼거리를 가두어 버린다.


 

미도산 언저리를 떠돌며 살아온 내 삶이 머금은 서사와 오늘 비로소 본격 접속한다. 항일무장투쟁 전사인 내 증조부가 일제 군대에 생물학적으로 살해당했다면, 나는 부역 사법 권력에 사회경제적으로 살해당했다. 저들과 맞서 내가 싸우는 길은 법도 총도 아닌 팡이실이, 그 영적 네트워킹이다. 뼈아픈 경험과 뼈저린 깨달음 사건을 모두 함께한 미도산은 말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 그 돌부리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잔잔해서 격동에 찬 걸음걸이로 서초중앙로 건너 서초대로를 따라간다. 교대역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15년 전 권력이 짓밟은 내 옛 진료소가 생때같은 기억으로 변함없이 서 있다. 저곳이 바로 내 빈 무덤이다.


 

한참을 서서 바라보다가 사진에 담는다. 애도다. 기림이다. 그대로인 것은 그대로 없어진 것은 없는 대로 보듬으며 옛길을 걸어 도로 미도산 초입에 닿는다. 오늘 팡이실이 표지를 참나무 둥치에 남겨 간절한 비원으로 심어둔다; 죽어서도 이 참담한 부역 역사와 서사를 잊지 않기로 새겨둔다. 일몰 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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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걷기 심취가 몸에 새겨준 법인(法印)은 중둔근 극통 말고도 더 있다: 발가락, 특히 오른쪽 모든 발가락 끄트머리에 박힌 피멍과 굳은살. 전문가 조언을 따라 발 길이보다 2cm 더 큰 기능성 운동화를 신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은 이 심취가 얼마나 신랄했는지 웅변한다. 곡진하게 씻고 어루만지고 다독였다. 죽어 몸을 태워야 나오는 선객 사리를 나는 살아서 통렬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 약동하는 표치(標幟). 표치로서 한 소식을 인정하고 다음 구비로 넘어간다. 그래서 오늘은 미도산(味到山)을 음미도달(吟味到達) 하기로 한다. !


 

서울 성모병원과 미도아파트 사이 소로를 따라가다가 급경사를 이루는 작은 산마루에 오르면 이내 평평한 산책로가 나타난다. 남북 방향으로 난 이 길을 곧장 걸어 올라 정상에 이르면 동서 방향으로 난 능선길로 갈라져 내려간다. 더 나아갈 수 없는 정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있다. 동쪽 길은 서울법원종합청사, 서쪽 길은 대검찰청과 대법원으로 가는 서초동 누에 다리에 이른다. 누에 다리 건너서 몽마르트르 공원에서 효령대군 묘, 그리고 매봉재산까지 이으면 우면산을 타고 관악산과 맞닿으니 크게 보아 그 줄기에 속한다.


 

간선에 해당하는 이 T자형 길 말고 걷는 맛 좋은 길이 둘 더 있다. 동쪽 미도아파트 가까이에는 오종종한 소나무 숲을 돌아 완만히 올라가는 비탈길이 있다. 서쪽 서울 성모병원 별관 가까이에는 백양나무, 물오리나무들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자락길이 있다. 양쪽 다 날카로운 골로 갈라지지 않아서 물기를 고루 나누어 머금는데 서쪽이 훨씬 더 그렇다. 버섯이 놀랄 만큼 많은 까닭에 내가 오래 머물곤 하는 곳이다. 작은 산이라 이런 면모를 유지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다른 산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풍경이다. 음미해서 도달한 진실이다.


 

미도산을 이렇게 걷기는 처음이다. 그동안 아주 여러 번 걸었지만, 숲 전체와 버섯 개체를 동시에 챙기지 못했다. 인연은 그때그때 깜냥대로 이루어지고, 그 인연이 제의도 전선도 품으니 아마도 제대로 된 제의와 전선은 이제부터일 테다. 깨달음은 이치상 언제나 나중에 오는 법. 이렇게 느지막이 나지막이 미도산에 도착하는 일은 처음부터 팡이실이 발 음모가 개입돼 있었음이 틀림없다. 음모는 진리의 본성이다.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역사는 짝퉁 음모에 걸려 살해당한 기록으로 영락했다. 기록 이름이 제국주의다. 이제 나는 그 이름과 싸운다.

 

숲에서 나와 건너편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간다. 여행이 아니라 식사를 위해 자주 가족이 모이는 곳이다. 우리가 거기서 찾는 음식은 김치찜, 해물 순두부찌개, 순댓국이 거의 전부다. 따끈한 해물 순두부찌개를 떠먹으며 딸아이가 걷기를 줄여야 하지 않느냐 묻는다. 걷기 목적을 두고는 서로 다른 생각일지라도 어떤 변화를 주어야 할 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생각이니 토 달 이유란 없다. 고개 끄덕일 때 음성 하나 들려온다. “제국 거대 부역 도시 한복판, 점처럼 작아서 깊은 숲인 미도산에 작아서 깊은 팡이실이 본진 쌓는 일을 똑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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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여고생 시절부터 노후 걱정하는 환갑 나이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넘도록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제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젊어서 미국으로 이민 가 여러 풍파를 겪었지만 딸 아들 다 출가시키고 이제 안온한 여생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며 어째야 할지 묻는다. 나는 한의원에 살고 있는 나무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 왔을 때 그는 천정에 닿고도 남아서 가지 끝이 휘어져 내릴 만큼 컸다. 일조량과 영양이 부족한 상태로 살아가는 동안에 그는 점차 키를 줄였다. 지금은 나보다 조금 더 클 뿐이다. 큰 줄기 셋 가운데 하나는 7년여 전부터 더 이상 가지와 잎을 내지 않았다. 그렇게 13년을 살았다. 내가 해준 일이라고는 물 주기와 잎 닦아주기뿐이었다.

 

지난해 어느 날 도봉산 길 없는 깊은 골짜기를 헤매던 와중 찰나적 집중으로 담아온 흙 한 줌을 그에게 주었다. 몇 주 뒤, 놀랍게도 7년 넘게 가지와 잎을 내지 않던 줄기가 연두색 점 하나를 피워올렸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번져 여러 가지와 잎으로 자라갔다. 나는 매일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렇게 올해로 14년째 함께 살고 있다.”

 

제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얼른 알아들었다.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해결책이 있기보다 없는 경우가 더 많으며, 그럴 때는 해소책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여 주었다. 그가 어떻게 변화된 삶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특별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계기 하나 각별하게 품어 제 의례로 만들어 가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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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어트호텔 앞 거리 정원 귀퉁이에서 소나무 동강 하나를 거뒀다. 필경 조경 작업에 쓰였던 긴 막대기 자투리일 테다. 흙 묻은 채로 코끝에 대니 소나무 향이 말갛게 피어난다. 깨끗이 씻어 한의원 내 방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향이 계속 느낌을 타고 전해지기에 퇴근하면서 방문을 닫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해 문을 여니 소나무 향이 방안에 자욱하다!




 

수직 절단한 면은 지름이 4cm이고, 경사 절단한 반대면 긴 쪽 길이가 7cm 남짓한 나무 동강에서 이런 기운이 나온다. “나무를 벤다고 그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다.”라고 누군가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물론 향기를 피운다는 말과 살아 있다는 말이 같은 실재를 지닌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이렇게 경이로운 시공에서라면 두 말이 지닌 차이란 얼마나 사소한 것이랴. 진정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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