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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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 때는 깜짝 놀란다. 이 놀람은 놀라는 순간에 자신이 놀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놀람이다. 알아차리는 놀람이 있다. 모름지기 기다렸던 무엇이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상대적으로 느리게 감동을 주며 스며들 때 고개 끄덕여 맞아들이는 놀람이 그것이다.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에서 쓰지 신이치는 미우라 바이엔의 말을 인용한다.


마른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놀라기보다 살아 있는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놀라라.’(98쪽)


이에 답하는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말은 이러하다.


생명의 세계가 자아내는 생명 영위의 불가사의, 절묘함, 훌륭함을 알고 그 심연의 생명 영위의 존엄함을 깨달으라는 것이겠지요. 예를 들면, 겨울에 잎이 지고 봄이 되면 싹을 틔우고 이윽고 너무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러고는 불가사의하게도 열매를 맺지요. 그 영위의 근원을 응시하여 생명 영위의 경이로움을 알아라, 존엄함을 깨달아라, 라는 것이지요.”(98쪽)


과연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이 타당함은 비가 오면 습하다는 말처럼 밋밋하다. ‘마른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놀라기보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람에도 비대칭의 대칭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놓치고 말았다.


자연농이 삶과 죽음이 마주한 가장자리에서 빚어내는 역설 운동임을 익히 알고 있는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왜 이런 경량급 발언을 했을까? 책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삶이 넌지시 답을 알려준다.


본디 자연농이라는 표현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모순이 맞물리는 극의 시공에서 시리고도 다사로운 생명 사건으로 연루되어가는 일이 자연농이다. 자연농으로서 삶은 이치상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진실 논리 안에서만 성립한다.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이 삶을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 아니다. 시행착오를 견디며 스스로 깨친 것이다. 그의 깨침은 ‘입자’적 경험을 통한 귀납 과정에서 나왔다. 정색하고 연역하여 ‘파동’적 종자논리를 갈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멍이 남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이렇게 구멍 난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질박함이 좋다. 나 같은 먹물한테는 없는 단단함이 있다. 그의 말을 따라가 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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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9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0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불교의 철학
한병철 지음, 한충수 옮김 / 이학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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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을 발견하고 처음 읽은 책 세 권에 차례로 꼼꼼히 주해 서평을 썼다. 다음에 읽은 책 두 권에는 주해 서평을 쓰지 않았으며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지난 3월 어느 날 서점에서 그의 『선불교의 철학』을 보았다. 선불교에 입을 댔다기에 호기심이 동해 집어 들었다. 말하자면 더는 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변화를 일으킬 만한 내용을 기대했다는 뜻이다. 결론: 2002년 저작이라는 점을 감안하고라도 읽는 데 들인 공이 아깝다. 단, 옥간의 그림을 알게 해준 것은 고맙다.


법률상 국적이 어딘가와 무관하게 한병철은 독일인이다.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글을 쓴다. 그의 사유와 글이 독일 땅에서 ‘대박 난’ 것은 한국 출신이라는 요인이 작용했다기보다 시선과 내용에서 독일 적합성이 탁월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터다. 실제로 그의 사유와 글에서 한국 적합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내가 이 지점에서 제기하는 의문은, 한국인이면 한국적인 시선으로 철학을 해야 하지 않느냐, 적어도 한국 현실을 고민하는 내용쯤이라도 담아야 하지 않느냐, 뭐 이런 거 아니다. 한국인이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써 독일에서 대박 난 글을 한국인이 한국어로 번역해 한국에 내놨더니 역시 대박이 났다, 자 이 현상 뒤에 똬리 튼 실체적 진실은 대체 무엇이냐, 이런 거다.


손쉽고도 게으른 대답은 한병철 철학의 보편성 운운이다. 이건 그 동안 외국 유학파 지식인들 대부분이 공유해온 너절한 전제다. 철학이 당최 무엇인가, 보편이 과연 있기는 한가, 묻는 것보다 실례를 하나 들면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볼 수 있다. 미국의 명문중명문인 St. Johns College는 재학생 필독서 100권(2014년 판)에 서구 이외 세계의 책을 단 한 권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따위 자세를 한국인이 내면화해서 생긴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병철 신드롬이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한국의 한 대학이 동아시아 고전만으로 필독서 100권을 정했다면 이 땅 지식인, 특히 유학파는 과연 뭐라 말했을까. 췌론의 여지조차 불필요하다.


보편은 없다. 보편철학도 없다. 한병철의 철학은 독일철학이다. 한국인이 독일철학을 알아서 안 될 일이 무엔가. 지향과 내용을 따져 배울 만하면 배우는 게 맞다. 사실 여태 우리는 이런 유의 행위에만 골몰해오지 않았던가. 문제는, 그러면서 보편을 배우는 거라 스스로 속였다는 사실이다. 열 걸음 물러서자. 그래, 그들에게서 보편을 배워왔다 치자.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우선, 왜 보편철학은 저들만 빚어내는가? 다음, 저들이 빚어낸 보편철학을 배워 들여 이 땅에서 설파하는 목적은 뭔가?


한병철은 이 땅에서 보편철학을 빚어낼 힘이 없다. 한병철은 이 땅에서 한국철학을 빚어낼 마음이 없다. 한병철이 독일, 그러니까 서구로 날아간 이유 둘이다. 이 둘은 결국 하나가 된다. 그래야만 철학자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며, 거기 상응하는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 로. (신)식민지 지식인에게 익숙한 판단법이다. 철학과 현실 삶을 구별하고 오로지 철학을 위한 독일이었노라 하는 말은 일제 세상이 백년 갈 거라 믿었다 한 미당의 말보다 훨씬 비굴하다. 한병철이 실제로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을지 모른다. 정녕 그런 생각을 지니지 않았다면 자신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대박 나)는 일은 거절했어야 이치에 맞다.


EU를 이끄는 국가로서 제일세계의 한 축인 독일의 탁월한 사회정치적 조건에서 한병철은 그의 담론을 생산한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민주공화국의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하는 한국인에게 그의 담론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인가. 그것은 어떤 맥락에서 인문정신인가. 의미는 너무 아득하고 맥락은 너무 동떨어진 것 아닌가. 이런 의문의 결정판이 다름 아닌 『선불교의 철학』을 향한다.


독일에게 선불교의 철학적 사유는 모름지기 충격이다. 서구 사유 전승의 기라성들과 맞대면시키면서 한병철이 풀어낸 선불교 담론은 서구의 有적 집착을 일거에 베어버리는 호쾌한 無의 검이다. 이 검은 자본주의 최첨단에 서서 수탈체제를 향유하는 오늘 독일에게 다시없이 통렬한 죽비일 것이다. 한국에게도 그런가. 적어도 내게는 추호의 울림조차도 없었다. 중국과 일본 자료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인용하며 꾸려가는 한병철의 이야기는 형언하기 어려운 기갈마저 자아냈다. 물론 독일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저작이니 그들이 닿지 못하는 원문 자료를 인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어 원전은 거의 전혀 번역되지 않았을 터이니 설혹 그가 읽고 영향 받았다 하더라도 한국 선불교 사유를 인용할 길이 원천 봉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길목 저 모퉁이 허다히 등장하는 하이쿠를 지나치면서 깊은 한숨을 쉬곤 했다. 이 책의 번역자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은 듯하다. 번역에 즈음해 한 마디 말도 없는 걸 보면 저자 또한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끝내 나는 질문하고야 만다.


한병철에게 철학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의 철학관을 모른다.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안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이 내가 생각하는 철학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 나는 더는 한병철을 소비하지 않을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의 물리학이 그러하듯 한병철의 철학 또한 내게는 포르노로 다가온다. 보편이 아니어도 좋고 철학이 아니어도 좋다. 나는 나 스스로 나와 나의 삶의 조건인 공동체의 구체적 관계 속에서 나를 묻고 세계를 묻는 일을 할 것이다.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번져가는 삶의 궁구를 철학이라 할 만하다면 나는 그렇게 철학하고 싶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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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 2017-05-3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날카로운 물음과 비판 좋은데...오늘날 독일로 떠난 사람을 (신)식민지 지식인에 빗대는 시대착오는 무엇이오? 한국인이란 대체 무엇일까? 본문에 따르면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수탈에 시달리면서 민주공화국의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하는˝ 인간. 내가 생각하는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잘생긴방통 2017-09-1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뽀르노도 수준 높은 고급 뽀르노는 나쁘지 않습니다.ㅋㅋ 지루하고 저급한 심각한 체하는 책들보다 훨 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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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의 물리학 -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물리학의 대답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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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 쏟는 내 관심은 늘 내 지식을 넘어선다. 40년을 훌쩍 넘긴 이 과도한(?) 관심은 내가 인문·사회 계통 공부를 오랫동안 해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특이하다 할 수도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해야 맞다. 사실, 물리학이 밝혀가는 세계 진실에 기울이는 주의는 인간에게 그 무엇보다 근원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내 인문·사회학적 사유에 물리학적 진실이 육중한 근거이자 균형추로 작용하는 일은 이런 이치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임상의가 된 뒤 관심과 사유는 좀 더 구체·실용의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카를로 로벨리가 쓴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는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그 둘 사이 모순 때문에 일어난 난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전경이 펼쳐진다. 저 갈릴레이에서 시작하여 불세출의 천재들이 경이로운 통찰과 지식의 구성으로 풀어헤쳐온 세계 진실은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일대 전복이 일어나고 그 전복은 다시 전복된다. 전복의 전복으로서 오늘 우리 눈앞에 드러난 진실의 본질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연속과 단절의 이율배반이다.


이율배반은 서구를 태초부터 괴롭혀온 아포리아다. 서구가 이 문제를 괴롭게 여기는 것은 이런 상태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수긍할 수 없다. 그래서 옳지 않다. 감성적으로 공감할 수 없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다. 배반의 이율을 통합의 일률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서구는 지금도 맹렬히 그 작업을 하는 중이다. 예컨대 저자는 단절에 연속을 들여 놓으려고 고리loop를 도입한다. 문제는 너무 미세한 단위라 실험으로 증명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천재들이 갖은 노력을 해온 지 100년이다. 연속의 진실은 연속대로 여전하다. 단절의 진실은 단절대로 여전하다. 여전히 문제는 요지부동이다.


아무리 세계 진실에 가장 핍진한 진술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물리학 또한 하나의 사유방식이며 인식체계다. 맨 처음 자리한 종자 논리의 간섭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요는 모순이 마주보고 있는 상태를 어떻게 할 것인가,다. 동일률, 배중률, 모순율을 넘어가느냐, 하는 문제다. 다치 논리를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태여 통합을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다’고 하므로 고리, 플랑크 규모, 이런 설정을 통합의 도구로 삼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다시피 물리학의 위대한 발견들은 상반된 이론들을 통합하려는 노력 과정에서 얻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발견이 반드시 통합의 결과이지는 않다. 설혹 통합이라 하더라도 실체적 진실의 차원이라기보다 상반됨, 통합의 당위성을 극단으로 인식하는 사유방식·인식체계의 차원에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런 형식논리적인 사유방식·인식체계는 문제의식의 공격성을 극대화하여 과학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키는 현실 동력이 되었다. 현실 동력인 과학은 필경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과학의 혁명은 곧 바로 기술 지배의 토건을 일으켰다. 기술 지배의 토건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수탈체제로 목하 전 지구를 파헤치는 중이다.


저자는 인류가 그 문명의 폐해로 스스로를 멸종에 이르게 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면서도 자연과의 일치, 겸허, 사랑, 지식의 성장, 낙관적이고 서정적인 전망 들이 담긴 세계인식 미학을 피력한다. 이론물리학 고수로서 보일 법한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까. 구구절절 단정하면서도 관대하다. 아마도 책의 이런 풍경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바로 여기서 매끄럽게 넘어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크게는 우주, 작게는 소립자에 이르기까지 세계 사태·사건의 근원적 진실을 궁구하는 학문이라고 해서 물리학이 무색무취한 담론인 것은 아니다. 담론을 생산하는 인간의 개인적 면모와 그가 처한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온전히 분리된 물리학을 전제하는 짓은 순수 아닌 순진의 발로다. 담합에 육박하는 주류 해석도 있으며 바르지만 소수파여서 매장된 담론도 있다. 루프양자중력 연구자와 자본주의 수탈체제의 연관성을 묻는 것이 그저 허튼소리일 수만은 없다. 물리학 담론 자체의 내용과 시민으로서 물리학자의 삶을 나누어야 한다 하더라도 물리학에서 날카로운 천재가 정치적 올바름에서는 날라리 천치 노릇 하는 것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저자는 1956년 베로나에서 태어나 80년대에 볼로냐 등 명문대에서 공부했다. 90년대 이후 오랜 기간 저 악명 높은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 민주주의를 말아먹고 있을 때 그는 청·장년기를 통과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베를루스코니 정치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 책 마지막 장 인간론의 전반적 기조를 통해 추정해볼 따름이다. 사실 이 마지막 장이 없었다면 아마도 학문과 학자의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거기 펼쳐진 인간론을 읽을 때, 각 분야의 대가 또는 고수라는 사람들이 사회정치적으로 ‘해맑은’ 무관심, 의도된 무지를 드러내는 우리 현실 상황이 불현듯 떠올랐다. 새삼 정색하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대가 또는 고수의 탁월함, 대체 그 본질이 뭘까?


학문, 특히 자연과학이나 예술 계통의 천재들이 사회정치적 무관심과 무지를 대가로 권위와 명예를 보장 받으면서 특권층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내가 품은 의문은 더 근원적인 지점으로 다가간다. 일반상대성이론이 제시한 연속성의 세계와 양자역학이 제시한 단절성의 세계가 상호모순일 때, 가령 루프양자중력이론으로 통합시키려는 저자의 노력은 과연 진실을 향한 치열한 탐색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무엇이 종자논리인가에 따라 답이 갈린다. 서구는 모순의 공존을 거부하는 형식논리를 종자논리로 삼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모순의 공존을 수용하면 통합 노력은 부질없다. 오류다. 서구 천재에게는 분명 몽매한 디테일의 악마가 있다.


몽매한 디테일의 악마는 통합 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에 유물적으로 종노릇한다. 저들의 지식은 고급 포르노다. 천착이 만들어낸 과잉 방정식에 서구세계가 홀랑 빠져 있는 동안 제삼세계에서는 한 해 사백만 명의 아이들이 굶어죽는다. 모든 지식은 실용에 복무해야 한다는 말이 재수 없는 이상으로 휴먼스케일 저 너머 고고한 진실이 있다는 말은 싸가지 없다. 제목처럼 정녕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려면 포르노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디테일을 내려놓고 정좌하여 몽매를 벗어야 한다. 멸절의 위기 앞에 선 인류에게 더 이상의 악마는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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