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계곡 가운데 염두에 두었으나 들어가지 못한 곳이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절터골 계곡과 염불암 계곡이다. 오늘(2013. 9. 17.)은 이곳으로 간다. 시간이 맞는다면 삼성천 건너 비봉산(295m) 허리께 재를 이루는 소곡도 들어갈 생각이다.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출발해 절터골 계곡을 향한다. 스마트폰 지도를 보며 가는데 숲에서나 도시에서나 그 지도는 그리 세밀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아 여러 번 길을 잘못 든다. 계곡 입구에서조차 헤맨다그러려니 하고 헤매면서 간다.

 

계곡 풍경이 아연 좋다. 전날 비가 내려서인지 물소리가 기세 좋게 들려온다. 계곡 길은 물과 살짝 거리를 둔 사면을 따라가는데 이 길 또한 소곡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길도 작은 도랑이다. 군데군데 길을 가로지르는 소곡이 주름져 도랑끼리 수시로 교차한다. 나는 아주 자주 그 작은 물에 손을 맞춘다. 기분이 탱탱하게 맑아진다. 계곡 물소리가 거의 능선에 이르기까지 계속 들려와 기분을 더 맑게 해준다. 처음 겪는 일이다.



 

이리도 작은 계곡이 이렇게나 아금박스럽다니. 능선길을 걸으면서도 염불암 계곡으로 들어서서도 지나온 계곡 향기가 심신에 묻어 있어 사라지지 않는다. 염불암 계곡은 예상한 대로 포장도로와 소란스러운 인파가 풍경을 일그러뜨린다.

 

물소리 시원한 삼성천으로 내려와 식당을 찾는다. 단체 손님 받는 곳들이라 모두 손을 젓는다. 한참 걸어서 겨우 해장국 파는 식당에 닿는다. 안주인이 돈 안 되는손님을 웃는 얼굴로 맞아준다. 맛있게 먹고 명함 한 장 달래서 챙겨 나온다.

 

이번에도 엉성한 지도에 당하다가 가까스로 안양동에서 비산동으로 넘어가는 재넘이 계곡 진입로를 찾아낸다. 아주 좁은 길이지만 특이한 풍경을 연출한다. 능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지막한 둔덕인데 좌우 조그만 골짜기에서 물소리가 화음으로 들려온다. 더 깊은 골짜기 물소리가 먼저 끊기고 어디가 시작인지도 알 수 없는 얕은 골짜기 물소리가 거의 잿마루까지 들려온다. 숲이 품은 진실은 언제나 내 상상 저 너머에 있다.

 

이로써 관악산 계곡 16곳을 들고 났다. 이만하면 어디 지성소 삼을만한 데가 나올 법도 하련만 여전히 마음이 허공에 떠 있다. 물론 오늘 지나온 절터골 계곡에 마음이 심하게 끌리기는 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진다. 불편은 단념을 부른다.

 

아무래도 가까운 다른 계곡에 더 들어가야겠다. 서울 둘레길 구간 중에 무당골이 있다. 거기서부터 결 지는 작디작은 계곡들을 마지막으로 살피기로 한다. 뭐 꼭 그래야 한다기보다는 거기서 더 갈 곳은 없으니, 숲이 말을 건네리라 믿어서다.

 

나는 반제국주의 전선에서 꼭 똑 숲 군대 척후병으로 살아갈 운명인가 보다. 도시와 인간하고는 도무지 연대할 수가 없다. 저들이 쏟아내는 거대한 강전(强電)은 내게 생명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숲이 전하는 소소한 약전이 나를 살아 퍼덕이게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내게 숲은 시시각각 나를 낳아주는 어머니시다. 어머니 묵묵함이 일깨울 때만 나는 천둥 같은 전사가 된다. 나무와 풀과 어깨 걸고 진군할 때만 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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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9-20 0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일행들과 관악산 등산 다닐 때가 생각나네요.

bari_che 2023-09-20 07:55   좋아요 0 | URL
오, 관악과 인연 있으시군요~
고맙습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끝으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은 바로 이 말이다.

 

예술가는 그냥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일을 신성하게 여기는 태도는 곧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되는 태도다. 좀 더 정확하고 다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창조물에 도구가 되는 태도다. 창조물이 물질적이든 인간적이든 사회적이든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태도다.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 경외심을 가지는 까닭이 바로 그 때문이다.”(447)

 

살면서 입버릇처럼 내가 했던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예술 할 거다.’. 예술이란 문학, 음악, 미술, 연극들을 말함은 물론이다. 예술적 감수성을 지녔다는 뜻뿐만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다른 일을 해서 대박나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자각에서 발원한다. 아픈 사람 치료하는 일을 하면서도 늘 예술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이 있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치료행위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정도였다. 딱 여기까지가 내 수준이었다.

 

전적이지는 않더라도 내가 주체적인 어떤 작위로 예술 치료행위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과 함께 아픔과 삶을 숙의하는 과정에서도 자기 창조물에 도구가 되는 태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태도가 아니었다. 나는 내 일을 신성하게 여기는 태도에 다다르기 전에 예술가 정체성에 다다랐다. 신이 가는 길을 가지 않으면서 스스로 신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되는 태도는 마치 나사렛 예수가 골고다 길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십자가를 진 일과 같다. “자기 작품에 경외심을 가지는일은 빈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 한 일과 같다. 치료, 그것이 내게 왔을(It came to me) , 나는 의자로서 받아들이고 도구가 되면 그만이다. 나는 죽어 마지막 거점조차 지우는 일로 경외를 표하면 그만이다. 의자는 치료 속으로 배어들고, 아픈 사람 변화된 삶에서 배어나는 일로 그만이다. 이 사건이 치료 예술이다. 예술이 아니면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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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어남과 죽음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서, 인간은 태어남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고 죽음의 순간으로 미리 달려갈 수 없다. 오로지 섹스만이 인간의 소관이다.·······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섹스뿐이다. 그러므로 섹스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596-597)

 

제국주의 가부장이 지배해온 역사는 전복(顚覆) 역사다. 위대함과 사소함을, 거룩함과 속됨을 홀랑 뒤집어버린 과정이 우리가 겪은 인간 역사다.

 

참 위대함·거룩함을 감추기 위해 사소함·속됨을 위대함·거룩함으로 둔갑시킨 짓이 바로 창조와 심판 능력을 부여해 신이라 이름 지은 허깨비다. 인간 소관이 아니라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생사 문제를 지배하려고 지어낸 허무맹랑한 서사가 남성 이미지로 칠갑한 신화와 종교 경전이다.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 실재는 다름 아닌 섹스다. 해야 할 말이 참으로 많은 이 위대하고 거룩한 사건에 대해 인간은 장구한 세월 동안 허접한 가십류 담론을 배설해왔다. 해야 할 말이 참으로 적은 저 사소하고 속된 신에 관한, 그러니까 생사 문제에 대해 인간은 장구한 세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고급 담론을 빚어왔다.

 

섹스가 이렇듯 사소하고 속된 무엇으로 전락한 까닭은 바로 섹스에 대해 남성이 지닌 열등감 때문이다. 열등한 주제에 지배하려니 진실을 비튼 구라를 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섹스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 생명 창조, 그 주도권이 여성에게 있으며 심지어 전 과정에 걸친 섹스 감각마저도 여성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긍정하기는 싫고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으므로 남성은 전천후로 섹스 문제를 왜곡했다.

 

섹스라는 어휘를 쓰는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더욱 딱하다. 섹스라는 영어 어휘에 해당하는 아름답고도 의미심장한 순우리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그 말을 공식적으로 점잖은글에 쓸 수 없는 뉘앙스를 장구한 세월 동안 만들어 넣었기 때문에 저기 몰락의 에티카에도, 여기 내 글에도 쓰지 못한다. 이중 억압, 그러니까 중압(重壓)이다.

 

억압을 풀고 전복을 다시 전복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섹스가 왜 위대하고 거룩한가를 근본에서 밝히는 일이다. 정치와 도덕 그늘을 벗어나 진실 빛 아래서 섹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디테일은 뒤로 미루고 간단명료한 이치 하나만 밝혀본다.

 

섹스는 비대칭 대칭으로 이루어진 세계 진실 요체에 해당한다. 관통과 흡수를 쌍방향으로 주고받는 모든 거래(去來) 시원에 다름 아닌 섹스가 있다. 삶과 죽음, 들숨과 날숨, 먹기와 싸기, 잠자기와 깨어 있기, 일과 쉼, 이 모든 대칭 거래 사건, 그러니까 거룩한 생명 운동 시리즈는 섹스에서 비롯한다. 이에 대한 통찰을 건너뛴 이른바 큰 지혜들이 공허한 까닭은 결코 다른 데 있지 않다. 진실에서 벗어나 제국 가부장이 견지하는 야동관점을 고수하는 한 깨달음과 슬기로움은 미망을 떨쳐버릴 수 없다.

 

국가가 159명 국민을 고의로 죽이고도 사고로 처리하는 몰염치 또한 결국은 야동관점으로 정치를 희화화하는 제국주의 부역 패거리 탐욕에 기인한다. 근본을 말아먹고 진위를 전복한 사악한 자들 손아귀에서 생명을 구하려면 적나라한 진실 정곡을 단도직입으로 찔러 들어가 모든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결기가 필요하다. 고급 지성이든 통속 저널리즘이든 에두르는 얄팍한 타협을 지속하는 만큼, 생명은 지금처럼 속절없이 죽어가리라.

 

2. “문제는 섹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달리 없다는 데에 있다. 어째서 그런가?···섹스는 결합인데, 결합은 불가능하고, 불가능을 반복하는 일은 고통이기 때문에···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597-마지막 두 문장 순서 바꿈은 필자)

 

결합을 위한 유일 유력한 길인 줄 알고 들어서서 가보니 도리어 결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연을 목도하고 마는 섹스 고통. 고통인 섹스를 직시해야만 알아차려지는 진실. ‘진실은 늘 고통과 더불어 오고,’ 그 고통을 한사코 피하려는 인간에게 섹스는 진실을 은폐할 다시없는 수단이 된다. 진실을 외면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보상, 그러니까 생명 창조-그렇지 않은 섹스가 물론 있다-와 쾌락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결합했다고 스스로 속일 수 있는 천하 마약인 셈이다. 마약에 중독되지 않고 진실을 맞이하려면 결곡 곡진한 질문이 필요하다.

 

결합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결합이란 사태가 가능하기는 한가? 결합이 가능하지 않다면 당연히 고통스러운가?

 

섹스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거룩한 행위다. 좀 더 진실에 육박한 기술(記述)아름다운 둘이 되는 일이 바로 결합하는 일이다”(593). 이 말을 두고 형용모순이니 이율배반이니 떠들기 전에 대뜸 알아차려야 할 진실이 있다. , 우리가 결합을 오해하고 있다는 진실. 우리가 여태껏 속아온 결합은 제국주의적, 변증법적 결합이라는 진실. 제국주의적, 변증법적 결합은 반드시 폭력을 전제한다는 진실. 폭력을 전제한 결합은 없어야 한다는 진실. 아니. 당최 없다는 진실. 그 결합을 결합이라 한다면 극한 분열을 결합이라 우기는 짓이라는 진실. 우기는 섹스로는 참된 결합, 그러니까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다는 진실.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으므로 괴로움으로 받아들인다는 진실.

 

이제 진경으로 썩 들어서 본다. 아름다운, 아름다운 둘. 아름답다는 말이 핵심 중 핵심이다. 칼릴 지브란 절창 일부를 듣는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그렇다. 저 출렁이는 바다 때문에 아름답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597)심연”(597) 때문에 아름답다. 그 바다를, 그러니까 몰락”(5)선택”(5)하였기 때문에 참혹하게”(5) 아름답다. 아파서 아름다운 그 표정 둘은 숭고”(5)하다. 아프()되 괴롭지() 않다. 고통이라는 잘못 교배된 키메라 허깨비는 사라진다. 허깨비를 피하려고 외면하는 일도 사라진다. 직면하면 말할 수 있다. 그 말을 우리는 섹스하는’” 인간이라 한다.

 

혼과 혼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아름다운 둘이 되려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바다를 메우라고 말하는 자, 그러니까 거짓 결합을 설파하는 자는 미상불 사탄의 주구, 그러니까 제국 백색문명 부역자일 테다. 부역자가 패거리로 몰려들어 아름다운 둘, 그 숭고함을 때려 부수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한 심연, 그러니까 아프디아픈 진실을 덮어야 제 곳간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생명과 안정이라는 미소를 흘리며 치명적 섹스로 홀리고 있다. 제국 백색 문명에 짓밟힌 사람이여, 오늘이야말로 녹색 섹스 하는삶을 살 때가 아닌가.

 

3. “‘에게 먹임으로써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랑은 우리를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그것이 봉헌의 기적이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593)

 

칼릴 지브란 절창 전부를 듣는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시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연 재구성은 필자)

 

결혼식에 가면 주례가 흔히, 아니 빼놓지 않고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로 사랑을 강조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며느리 아니고 딸이라며 시아버지더러 안아주라 하고, 사위 아니라 아들이라며 장모더러 안아주라 한다. 이런 언행들이 모두 호들갑 떠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주례를 설 때, 반대로 서로 남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호들갑은 도리어 현실 인식을 모호하게 하고 왜곡시켜 진실을 흐트러뜨릴 따름이다. 부부는 정녕 일심동체일까? 그래야 할까? 이미 칼릴 지브란이 답을 주었다.

 

저명인사 부부가 TV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자기들은 한평생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회자와 방청객이 함께 감탄하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다. 실은 감탄이 아니라 탄식해야 마땅하다. 한평생 부부싸움이 성립하지 않을 조건은 딱 두 가지다. 서로 싸울만한 거리 밖에 있었거나, 어느 한쪽이 늘 죽어지냈거나. 후자 경우, 가부장적 우리 사회에서라면 당연히 여성 배우자 쪽일 터이다. 둘 다 정상적인 부부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기에 감탄과 존경을 보내는 일이 난센스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자아를 버리지 않는, 그러니까 봉헌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문제는 그 봉헌이 쌍방향이냐 아니냐다. 쌍방향성이 확보되어야 타자성의 긍정과 자기 상실의 긍정이라는 이중 긍정’(593)이 가능하다. 나를 버려 너를 살리는 행위가 마주 이루어짐으로써 자타와 생사 모순이 공존 역설로 달여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일방적 희생 자기 해체도, 일방적 수탈 자기 구축도 세상을 죽음으로 내몬다. 주는 사랑이 희생이 아니고 받는 사랑이 수탈이 아닐 때 비로소 이중 긍정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식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 사회는 이중부정 힘에 맹렬하게 이끌리고 있다. 제국 백색문명에 부역하는 특권층 패거리한테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타자성 부정, 자기 상실 부정 말이다. 특권층 부역 패거리는 파렴치한 자기 구축을 위해 절대다수 타자성을 잔혹하게 부정한다. 그 파렴치와 잔혹은 대놓고 함부로, 전방위·전천후로 드러난다. 놀라운 점은 드러날수록 파렴치와 잔혹이 더해간다는 사실이다. 누가 이 상황을 만들었을까. 어찌해야 아름다운 둘이 될까. 분노가 쌓이는 이상으로 공포·불안이 깊어진다.

 

깊고도 푸른 공포·불안을 극복할 아름다운 둘에서 아름다운은 그저 정서적 수사가 아니다. 신비주의와 기계론을 동시에 관통하는 질량이며 에너지며 소식이다. “은 그저 하나 아닌 둘아니다. 하나, 둘에서 둘 아닌 둘이다. 이는 청원 유신 마지막 문장 山是山 水是水”, 바로 그 산인 산, 물인 물 실재다. 아름답지 않으면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면 아름답지 않다. 이 아름다운 둘에서 팡이실이로서 사랑이 창발한다.

 

4. 앞 세 이야기는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주해(알라딘 서재: 싸리·버들 글숲)에 쓴 내용과 순서를 고쳐 다시 썼다. 이 수정에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는 동안 진전된 공부가 일정 정도 반영돼 있다. 여기에 다음을 부가한다.

 

 

마지막 글 인용문에 나오는 먹임봉헌이라는 말에 좀 더 내밀하게 배어들어 본다. 나를 너에게 먹인다는 표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성과 그 사랑은 내 생명 실재를 네게 먹이는 일이다. 봉헌이라는 표현 또한 관념이 아니다. 성과 사랑은 내 생명 실재를 네게 제물로 바치는 일이다. 먹임과 봉헌이라는 표현에는 더함도 덜함도 없는 액면가가 매겨져 있다.

 

성교 사건은 식사 사건이며 제의 사건이다. 제국 백색문명은 이 모두를 도구화했다. 도구화는 오락화다. 오락화는 희화화다. 희화화는 종말론적 증후다. 오늘 우리 사회 풍경이 웅변으로 증언한다. 감각적으로 가장 손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TV 채널을 차례로 돌리는 일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프로그램이 희화화된 장면을 곧바로 마주할 수 있다. TV만이 아니다. 대중매체 거의 전부가 그렇다. 이는 정치 희화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국가수반과 그 아내가 스스로 희화화하는 풍경을 시시각각 마주하니 모방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 상황에서 놓여나려고 통속한 지성과 저널리즘으로 비판하는 일은 겨 묻은 손으로 똥 묻은 손을 씻는 짓이다.

 

나그네가 병들었을 때 고치려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우리 존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본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를 먹는/먹이는 태초 사건에서 다세포 생명체가 탄생했다. 먹다/먹이다, 이 표현은 오늘날 인간이 지니는 이해 능력에 비추어 사건 전체를 담아낼 수 없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와 성적으로 결합해서 다세포 생명체, 그러니까 다른 존재”, 다시 그러니까 아름다운 둘이 되었다는 표현이 더해져야 한다. 하나가 더 필요하다. 단세포 생명체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체 하나에게 봉헌하여/되어 창발적 제의, 그러니까 네트워킹 사건이 일어났다는 표현까지 더해져야 한다. 이 진실 전경 앞에서 낄낄대는 순간 저 봉헌의 기적거룩한 계보에서 이탈한다.

 

거룩한 계보는 다른 이름을 지닌다: 공생. 린 마굴리스가 밝힌 우리 시대 최고 진실, 인간은 정확히 질량으로, 에너지로, 소식으로 이 세포내공생 계보를 따른다. 공생으로서 인간 심신 생명 구성 자체가 이미 다른 생명과 성교하고 식사하고 봉헌한/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성교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일은 다른 생명체를 먹는 일, 죽어서 다른 생명체 먹이가 되는 일과 본성이 같으며, 이 두 일 모두 신성하고도 질탕한 제의 본성을 지닌다.

 

성교와 식사와 제의는 서로 가로질러 감으로써 아름다운 둘이 소통하는 전경을 풍요롭게 만든다. 인간이 지니는 성적 지향, 또는 성정체성이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 들어가 걸으며 풀을 만지며 냄새 맡는 일은 숲과 성교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식사하는 행위도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 들어가 걸으며 풀을 만지며 냄새 맡는 일은 내가 숲을 먹는 일이기도 하고 숲이 나를 먹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행하는 제의도 이렇게 인간 경계를 넘어간다. 내가 숲에서 길을 잃는 일은 숲에 빙의되는 일이다. 내가 숲에서 버섯에게 몰입하는 일은 버섯에게서 신성을 불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녹색 성, 그 사랑은 인간, 그 너머 모든 생명이 평등한 공동 주체로 제국 백색문명에 맞서 통일전선을 이루도록 하는 거룩하고 질탕한 팡이실이 사건이다. 무심코, 함부로, 더군다나 낄낄거리며 대해서는 망한다. 망조는 벌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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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다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말이다.

 

사랑은 익명으로 할 수 없다.”(446)

 

이 말은 내 폐부 깊숙한 곳을 뒤흔든다. 그동안, 차마 가 닿을 수 없었던 진실이다. 70년이 다 되어가는 생애 기조가 익명성이었기 때문이다. 익명으로서 내 삶은 시원적 방치에서 시작되어 사회적 강권을 거쳐 마침내 자발적 중독으로까지 나아갔다.

 

있으나 불리지 않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 누적은 나를 익명성 밑바닥에 납작하니 개켜 넣었다. 부피를 상실한 내 이름은 어디에 있어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내 이름은 거의 질문되지 않았다. 스스로 이름을 크게 외칠 때는 듣는 이가 없었다. 많은 사람 속에서는 이름 부를 목소리가 사라졌다. 익명성은 커다란 흐름이 되었다. 흐름에 맡기면 언제나 익명이 보장되는 가장자리로 나아갔다. 어쩌다 중심으로 흘러들면 익명은 돌연 요구가 된다. 그 요구에 속절없어진 나는 이름을 가리고 선사(膳賜)에 배어든다. 선사에 배어든 나는 무색투명해진다. 무색투명한 자가 건넨 선물이 연대 고리가 될 리 없다. 연대 바깥에 선 자는 공동체 일원이 아니다. 나는 초월자 연하는 국외자였다. 거대신 헛된 그림자를 여전히 밟고 있었다. 나는 오만을 흉내 냈다.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인색에 빠져 있었다. 인색은 자기 착취다. 자기 착취는 이내 그 경계를 넘어간다. 경계 너머 남에게도 내게도 이름 자체가 선물이며 사랑이라는 진실을 느지막이 깨닫는다. 그렇다. 사랑하는 일은 이름을 거는 일이다. (이상 내용은 201815일에 쓴<익명의 시대를 건너다>를 조금 고쳐 가져음.)

 

이름을 짐짓 가린 채 초월적으로 시혜하는 일은 제국 백색문명 분리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폐해며 허상이다. 나는 식민지 피해자임과 동시에 부역자였다. 이제 여기서 내가 감당해야 할 천명은 내 이름을 당당히 넉넉히 걸고 분리 벽을 넘어가는 일이다. 내 이름을 걸고 분리 벽을 넘어가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존재도 익명성에서 벗어난다. 무고히 살해당한 사람이며, 여성이며, 유색인이며, 아이며, 성소수자며, 장애인이며, 노동자며, 난민이며, 북극곰이며, 푸른 이구아나며, 도롱뇽이며, 해마며, 이끼며, 돌꽃이며, 말이며, 곰팡이며, 버금바리(박테리아), 으뜸바리(바이러스)인 익명 존재가 부활한다. 그들 작디작은 이름 하나하나를 건 사랑이 팡이실이로 제국 은산 철벽을 무너뜨린다. 무너뜨리고야 치유다.

 

제국주의를 치유하는 주체가 녹색의학이라면 녹색의학은 이렇듯 모든 낱 생명이 짓는 온 사랑이다. 온 사랑은 작디작은 이름들이 낱낱이 선물로서(膳名) 서로에게 배어들고 배어나게 하는 사건이다. 온 사랑은 온전한 앎이다. 온전한 앎은 인간 언어를 넘어선다. 말하지 않고야 전해지는 온 사랑은 작디작은 이름들로 꽃핀다. 그 화원으로 가는 길을 우리는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라 부른다.

 

Aimer, c’est savoir dire je t’aime sans parler. _Victor Hu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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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라는 책에서 통합사상가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역이자 화폐, 경제적 지대 제거·공유자원 고갈에 대한 배상, 사회·환경 비용 내부화, 경제·통화 지역화, 사회배당금, 경제 역성장, 선물문화와 P2P 경제를 골간으로 하는 신성한 경제가 분리 문명, 그러니까 제국 백색문명을 극복하고 재통합 세계를 여는 중요한 요소라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허황한 낙관론 같지만, 근원적인 문명비판이면서도 당장 개인적 실천까지 가능한 톡톡한 담론이다.

 

저자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 나는 의학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 한다. 이미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경제적 기치>에서 개론 수준 이야기는 했다. 분리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분리 의학은 몸 병과 마음 병, 병과 병 있는 사람, 병 있는 사람과 치료자를 포함한 병 없는 사람, 병 있는 사람과 사회정치, 병과 자연, 병 있는 사람과 자연을 철저히 갈라놓았다. 진단 기준과 치료(?) 약물 보편성을 통해 병 있는 사람이 지닌 고유함과 관계적 존재성을 제거했다. 이렇게 병과 병 있는 사람을 클론으로 찍어낸 다음, 값을 매김으로써 불멸 화폐가 다스리는 영원한 수탈제국에 의료 봉토를 헌정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내용 전반을 관류하며 이야기하는 바는 선물 개념이다. 선물 경제 복원 문제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21선물 속에서 일하기가운데 <신성한 직업>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선물 모델은 무형인 가치를 전달하려는 직업에 특히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음악인, 화가, 성판매자(매춘부로 번역되어 있으나 인용자가 바꿈), 치유자, 상담자, 교사. 이 모두가 값을 매김으로써 가치 저하된 선물을 제공하는 일들이다. 우리가 제공하는 바가 신성하다면, 명예롭게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선물로 주는 일뿐이다. 아무리 높은 가격도 무한한 무엇이 지닌 신성함을 반영할 수는 없다. 내가 구체적인 강연료를 요구한다면, 내 선물 가치를 떨어뜨리는 셈이다. 만약 당신이 위 직업 중 하나에 종사한다면 선물 모델을 한 번 실험해보아도 좋다.

 

한의사지만 하는 일 내용으로 따지면 나는 치유자, 상담자, 교사다. 나아가 인터뷰 전설 오리아나 팔라치가 한 인터뷰는 사랑 이야기다. 섹스다. 너를 홀딱 벗기고 나를 홀랑 들이붓는 싸움이다.’라는 말에 인터뷰 대신 숙의치료를 집어넣어 바꾸고, 숙의 또한 예술인 측면을 고려하면, 나는 위 모든 직업에 해당한다. 나는 그동안 숙의치료에서 선물 모델을 꾸준히 실험해 왔다. 물론 성공한 경우보다 실패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여태까지는(!), 생각하고 있다. 실패(했다고 생각)한 결과는 값을 매김으로써 가치 저하된 선물을 제공하는관습으로 정착되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의사가 숙의로 마음 병을 치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숙의 1회에 90-120, 심지어는 식사까지 해가며 5~6시간 넘게 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이른바 상담 치료비문제가 초기부터 지금까지 가장 큰 고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지난주에도 상담 치료비에 부담을 느낀 어떤 사람이 예약을 취소했다. 좀 더 세밀하게 선물 모델을 연구해서 다시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무 준비 없이 무조건 선물로 제시했다. 그러니까 숙의를 진행하고 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만큼 사례하고 가도록 했다. 그냥 가는 사람, 5천 원 내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그까짓 대화하고 나서 무슨 돈이냐?’며 도리어 화를 내는 사람까지 있었다. 감사를 느끼며 성의껏 내는 경우도 대개 5만 원을 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물색없었다.

 

그다음부터는 설명을 붙였다. 상담 치료 본질과 가치, 상담 치료 일반적인 풍경, 역술인 예, 의료인 아닌 상담사 예, 정신과 양의사 예, 외국 예, 상담 시간 비교 들을 간략하게 했다. 공감하고 수긍하면서 내고 가는 돈은 대략 5~10만 원 선이었다. 희귀한 예외가 없지는 않았다. 30만 원 선뜻 낸 사람이 더러 있었다. 심지어 100만 원을 내며 이런 상담은 처음 받아본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상담해보지도 않고 먼저 값을 물어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화로 예약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상담 치료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지 못한 채, 많은 사람이 비용 문제 때문에 포기했다. 반대로 돈깨나 있는 강남 사람들 가운데는 한 번에 몇백만 원씩 카드로 긁고 가는 패키지 상품을 원했다. 그 상황을 타개하려고 홈페이지에 상담 치료비 문제로 공개 글을 써 올리기까지 했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적절한 금액을 원칙으로 분명히 제시하고 경제적인 상황을 포함한 조정 요건을 설명해주는 정도로 타협을 보았다. 지금도 이 문제는 표류 중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도 현실적 고충을 잘 알고 있다.

 

남들도 다 같이 실천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는 한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타당한 생각이며 합리적으로 반박할 수도 없다. 다만···당신 마음이 이성 너머 무언가에 이끌리는 순간을 알아차리기만 바랄 뿐이다. 이성, 현실성, 안전성 추구가 이끄는 대로 살아온 지금 결과를 보라. 이제는 다른 무언가에 귀 기울일 때인지도 모른다.

 

고백건대 선물 모델 실패 의식에는 저평가된 내 선물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과 더불어 수천만 원대에 이르는 치료비를 받지 못한 기억이 작용하고 있다. 기존 분리 모델에서 온전히 놓여나지 못 한 자아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거다. 문제는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나는 내 선물을 눈물겨운 포옹으로, 자기 삶을 전복함으로 받아준 사람에게 새삼 정색하고 감사한다. 나는 내가 받은 고귀한 선물을 감동과 함께 기억한다. 무엇보다 내가 참으로 막다른 길로 몰렸다는 섬뜩한 느낌에 시달릴 때, 기적으로 찾아온 선물 앞에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선다. 이성 너머로 나를 이끄는, 그 다른 무언가에 귀 기울인다. 신성한 경제학 시대를 열어가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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