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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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복한 사람에겐 제의를 치를 자격이 있다.·······이 제의는 부활을 뜻한다. 제의 후에 삶은 새로이 시작된다.·······하지만 현대의 제사장이라 할 수 있는 의사는 한낱 의료 기술자로만 남기를 택한다. 자신이 개입함으로써 몸의 상징적인 가치가 변하지만 의사는 이런 자기 힘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하여 환자와 의사 모두 질병에서 영적인 차원의 경험을 놓친다. 제의에 뒤따르는 명료한 자기 인식을 의학의 세계에서는 찾기 어렵다.(204-205쪽)


3주 전 20대 초반 대학생이 공황 증상을 나타내는 우울장애로 찾아왔다. 검사 결과를 현대생리학 이론에 맞추어 설명해주고 치유상담을 진행했다. 한약 처방도 했다. 다음 주에 그는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의 할머니가 제대로 된 정신과 양약을 먹어야지 무슨 한의원 상담이며 한약이냐 해서 신경정신과 전문의 처방을 받았다고 한다. 한두 번 겪는 일 아니건만 그때마다 맥이 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백색정신의학과 백색화학합성물질의 복마전 이야기를 소상하게 해주었다. 그는 매우 놀라워했다. 놀란 이상으로 의아해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그 양의사에게 확인해도 되는지 집요하게 되물었다. 나는 그 양의사가 선의를 가지고 처방했음이 분명하나 두 가지 문제 때문에 바른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1. 의료대중은 양의학과 양약을 하나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양의사 대부분이 양약의 실체를 잘 모른다. 가령 우울장애 약으로 흔히 쓰는 선택적세로토닌재흡수억제제가 비가역적 뇌 변성을 일으키며 의원성 질병인 양극성장애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정신과 양의사 몇이나 알고 있겠는가. 양약은 과학 이전에 초국적 제약회사의 비즈니스와 로비의 산물이다. 양의사는 초국적 제약회사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진실을 알고 싶으면 피터 괴체의 『위험한 제약회사』를 읽어보라.


2. 양의학, 특히 정신의학은 병의 본질 파악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정신장애를 뇌 질환으로 환원시키고 약물로 조정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정신장애 대부분은 삶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증후군이기 때문에 전인 치유가 필요하다는 진실을 저들은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우울장애는 스스로 삶의 한가운데 죽음을 들여놓는 병이다. 우울장애 치유 과정에는 반드시 삶과 죽음의 변증법이 숙의되어야 한다. 약물이 일으키는 증상 억제로 부활의 제의를 갈음할 수 없다.


그가 내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주 상담을 이야기하는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탓이 아니다. 사실 그에게 추호의 기대조차 걸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백색의학은 이미 지구별의 종교다. 이 종교가 뿌려대는 진통의 기적은 모든 저주를 따돌리는 매혹임에 틀림없다. 진통의 가짜 축복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병의 인식을 근원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죽음의 실재와 상징을 머금지 않는 병은 없다. 병의 회복 과정은 신의 길이다. 회복의 선언은 제사장인 의사가 신을 대리해서 집전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거룩한 의식에 깃든 영성을 과학의 이름으로 폐기하고 의사는 자청해서 “기술자”가 된다. 타락의 대가는 물론 돈이다. 돈이 빚어낸 백색의료화 세상에서 아픈 사람은 한평생 자신의 빈 무덤을 들락거리며 끝내 부활의 영광체로 살지 못한다. 부활의 영광체임을 서로 부인하는 좀비들이 서로 물어뜯으며 삶 아닌 삶을 영위한다.


좀비는 영생의 패러디다. 패러디 기술자 백색의사가 던지는 약물은 죽음과 부활의 제의를 거세함으로써 “명료한 자기 인식” 없이 영원히 살게 한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으로, 죽었으되 살아 있는 것으로 시간 속에 둥둥 떠다니게 한다. 백색의사는 이 현상을 약물의 치료 효과라고 말한다. 약물을 중단했을 때 나타나는 이탈증상을 재발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시간 지배를 무한히 연장한다.


좀비의 영생은 분리 이데올로기, 형식 논리의 산물이다. 삶과 죽음을, 영원과 순간을, 변화와 지속을 떼어놓고 널뛰기를 하다가 한쪽에 귀의해서 요새를 쌓아버린 것이다. 요새는 안락을 건네주고 자유를 거둬간다. 자유는 안락에 비해 하찮은 것으로 끊임없이 폄하된다. 이번 주에 다시 오기로 한 그 학생은 과연 스스로 시간 약속을 잡고 찾아올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이미 양약이 제공해주는 안락의 맛을 본 듯하다. 그의 어머니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양약을 복용한 뒤 전에 없이 콧노래를 불렀다니 말이다. 그가 질병을 통해 죽음과 부활의 제의를 경험하여 진정한 자유로 난 길에 접어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소통을 가로막는 요인을 유난히 많이 지닌 그이기에, 이런 순간,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신이 계셔야 하는 게 아닌가, 절박한 심경이 된다. 눈 풀린 좀비들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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