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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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사람이 두렵고 비통한 마음을 잘 표현해서 칭찬받았다거나, 드러내놓고 슬퍼해서 칭찬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반대다.(104쪽)

  아픈 사람이 ‘명랑한 환자’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슬퍼진다.(106쪽)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몸이 얼마나 취약한지 주변 사람들도 함께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 아픈 사람은 정말로 용감해지고 명랑해질지도 모른다. 애써 유지하는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들과 공유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모습으로서 말이다.(115쪽)


고급 장교 출신인 고교 동창이 있다.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이다. 친구들이 대놓고 핀잔을 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를테면 개천에서 나온 용이니 말이다. 그의 입에서 수없이 반복해서 흘러나온 자랑(!)은 고교시절 빈곤 이야기다. 그 옛날의 빈곤과 오늘의 부요가 대비되면서 한껏 성공신화를 돋을새김해주니 왜 ‘18번’을 바꾸겠는가.


그 시절 그가 겪은 빈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빈곤은 시대의 이름이었다. 내가 겪은 빈곤도 그의 것과 본질이 같았다. 차이라면 나는 그 가난을 말할 수 없었다는 점뿐이다. 50년 가까워오는 지금까지도 내 빈곤을 동창들은 전혀 알지 못 한다. 교통비가 없어 두 시간 이상 걸어 지각 등교하면 대학생 왔다며 그들은 웃었다.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들어오면 매점에서 맛있는 것 혼자 사먹고 왔다며 그들은 웃었다. 그들의 그 웃음은 입때껏 계속되고 있다.


나는 왜 내 빈곤을 이야기하지 못 했을까? 이 의문은 아마도 왜 아픈 사람은 “두렵고 비통한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 하는가, 왜 아픈 사람은 “드러내놓고 슬퍼”하지 못 하는가, 왜 아픈 사람은 “‘명랑한 환자’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가, 하는 의문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빈곤을 대하는 자세에서 그 친구와 내가 달랐던 점이 답의 핵심 내용을 이끌고 있음에 틀림없듯, 질병을 대하는 자세가 답을 이미 머금고 있을 것이다.


백색의학이 공식적으로 통제하는 질병은 을의 질병이다. 을의 질병은 사회적으로 ‘죄’의 자리에 처해진다. 질병이 있는 을은 죄인이 된다. 죄인이 하소연하는 두려움과 슬픔에 누가 귀 기울이겠는가. 죄인이 그나마 대접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돌이켜 근신하며 견디는 것이다. 통제에 명랑하게 승복하면서 회복의 서사에 의연히 참여하는 것이다.


백색의학이 비공식적으로 부역하는 질병은 갑의 질병이다. 갑의 질병은 사회적으로 ‘악’의 위상을 지닌다. 질병이 있는 갑은 악인이 맞다. 악인이 거둔 사회적 성공에 눌려 백색의학은 그가 질병을 앓는다고 말하지 못한다. 악인의 질병은 도리어 권력과 돈을 거머쥐는 창구다.


백색의학은 을에게 강하고 갑에게 약한 전형적 마름으로 떡고물 챙겨가며 승승장구한다. 마름의 눈에 아픈 사람 을의 몸은 인정의 대상이 아니다. 수탈의 대상일 따름이다. 마름의 눈에 아픈 사람 갑의 몸은 인정의 대상이 아니다. 아부의 대상일 따름이다. 백색의학의 마름 노릇에 힘입어 을은 노예로 갑은 과두로 더욱 확고하게 분리된다.


아픈 사람 을의 감정 표현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만도 아니고 표현의 문제만도 아니다. 정치경제학의 문제다. 문명의 문제다. 아픈 사람 을의 아픈 각성을 불러내야 할 때다. 아픈 사람 을의 몸은 그 취약함을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을의 질병은 죄가 아니다. 죄의식으로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죄다. 죄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해방해야 을은 갑의 악에 맞설 수 있다. 아픈 사람 을의 당당한 감정 표현은 그 자체로 신성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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