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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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암 환자였고 별로 제정신이고 싶지 않았다. 걷고 싶었다.·······

  기분이 엉망이었지만 걷기 시작하자 나아졌다. 나는 밖에 나왔고, 움직이고 있었고, 아주 행복했다.·······웅덩이와 풀과 나뭇잎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이곳에 있었고, 나는 그 일부가 될 수 있었다.·······그날 나는 짧은 여행을 경험했다. 그리고 초록빛으로 차 있던 9월의 어느 날을 그토록 또렷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질병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분명 병들어 있는 몸이었지만 그래도 경이로웠다. 그날, 통증을 주는 ‘그 몸’이 더는 원망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고마웠다. 이런 마음은 어떤 의미에선 살면서 처음이었다. 나는 내 몸을 더는 평가하지 않았고 몸에서 강인함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몸이 바로 나임을 깨달았다.(98-99쪽)


  나아가 운동을 하면서 나 자신에게 암에서 돌아올 것이라고, 내 몸은 여전히 돌봄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말은 거래가 아니었다. 운동을 치료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보다 운동은 내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 질환의 진행과는 상관없이 내게 남아 있는 삶을 계속 사는 방식이었다. 운동은 몸에 느끼는 경이로움을 내 나름대로 표현하는 일이었다.(100쪽)


걷는 것, 그 연장선에서 운동하는 것은 몸이 경이로운 실재임을 느끼게 하는 근원사건을 일으키는 행동이다. 걷기라는 파동적 단속斷續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몸은 대지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不二而不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현현한다. 둘인 경우도 하나인 경우도 살아 있는 몸이 아니다. 살아 있지 않은 몸은 경이롭지 않다. 경이는 살아 있는 한 언제나 경이다. 언제나 경이인 몸을 언제나 느끼지는 못해서 인간이 인간이다. 경이로운 몸을 느끼지 못하는 일상의 어느 틈을 타고 질병이 들이닥친다. 병이 들이닥칠 때 의자에게 포획당해 온전히 통제 대상이 되면 경이로는 끝내 돌아가지 못 한다.


통제를 뒤집고 경이로 복귀하는 특이점은 언제 형성되는가?


나는 암 환자였고 별로 제정신이고 싶지 않았다. 걷고 싶었다.


그렇다. 바로 제정신이 아닌 순간이다. 통제당하는 인간의 제정신은 ‘나간’ 정신이기 때문이다. 나간 정신 되찾고자 하는 숭고는 걷고 싶어 할 때 점화된다. 걸으면 대지, 그러니까 “웅덩이와 풀과 나뭇잎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일부”인 경이로운 몸이 된다. “초록빛으로 차 있던 9월의 어느 날을 그토록 또렷하게 볼 수 있었던 것”, 그러니까 경이로 복귀하게 한 걷기는 질병에서 비롯하였다. 그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걷기가 세계와 몸과 경이를 동시발생의 그물망(찰스 아이젠스타인)으로 만들었다. 질병은 삶이 몸을 사랑하는, 몸이 경이를 드러내는 필요악이다. 그 악은 걷기로써 선과 조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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