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사·······들이 환자에게 감정을 보이고 친밀하게 대하길 바란다기보다는 그들이 인정하길 바란다. 질병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몹시 아프게 되면, 아무리 업무에 치인 의사들이라도 내가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줄 것이라고 늘 생각했다.·······하지만 실제 경험은 오히려 반대였다.·······(89-90쪽)

  ·······의사들은 자신들이 만족할 만큼 질환이 낫거나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본 후에는 바로 떠나며, 그러면 아픈 사람과 주위 사람들은 그때까지 인정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일들을 알아서 감당해야 한다.(94쪽)


감당”이란 말은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말인가. 최근 배우 유아인이 페미니스트 언쟁 중에 차별적 사랑을 ‘감당’하며 살았다고 표현해 이 말은 졸지에 가볍고 반어법적인 느낌을 뒤집어쓰게 됐지만, 적어도 “인정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일들을 알아서 감당해야” 하는 감당은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에게 매우 육중한 실재다.


질병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감당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하다. 아픈 사람은 그 인정이 의사에게서 올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실제 경험은 오히려 반대”다. 질병을 감당하는 일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감당하는 일도 아픈 사람 자신의 몫일 때 감당이란 얼마나 버거운 것이랴.


언어가 향하는 실재는 중립적이지 않다. 누가 먼저 그 언어를 전유하느냐에 따라 실재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가령 감당이란 말을 유아인이 쓰는 경우와 그의 어머니나 누이가 쓰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런 점에서조차 이득을 누리면서 언어를 전유해가는 것은 중첩된 수탈이다. 수탈을 은폐하는 데 동원된 현란한 지적 허영도 간과 못할 협잡이다.


만족할 만큼 질환이 낫거나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본 후에는 바로 떠나며” 의사들은 감당해냈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증거로 의학전문용어가 뒤덮은 진료기록을 남긴다. 의학전문용어는 아픈 사람이 감당할 삶의 애환과 어울리지 않는 고매함을 지닌다. 고매한 감당에 언감생심 가 닿을 수 없는 아픈 사람의 감당은 이렇게 내동댕이쳐진다.


수많은 아픈 사람들과 마주해야 하는 의자들이 “업무에 치인” 상태에 수시로 처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업무에 치인다고 할 수 없는 나조차 어떤 때는 아픈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아픈 사람이 다 아서 프랭크는 아니다. 그럴수록 질병에서 삶을 얘기해야 성찰 없는 하소가 사라진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