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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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음파 검사 후 의사가 말했다. “이건 조사가 있어야겠네요.”·······‘나’는 의학의 ‘이것’이 됐다. 의사는 “환자 분 몸에 무슨 이상이 있는지 우리가 알아내 보겠습니다.” 정도로 말하지 않았다.·······

  “이건 조사가 있어야겠네요.”라는 말은 의사들이 조사를 할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의사들도 문장 밖에 익명으로 남는다. “있어야겠네요.”라는 표현은 조사를 필요로 하는 주체가 조사인 것처럼 들린다. 의사는 왜 이런 식으로 말해야 했을까?·······조사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을 때 의사 개인에게 책임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실수는 어떤 과정의 일부일 뿐이고 ‘있어야 하는’ 것 중 하나일 뿐이다. 어쩌면 불확실성 때문만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는지도 모른다.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마주했을 때 그 의사는 자신과 다른 의사들을 익명으로 만드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나도 똑같이 익명이 되어야 했다.(84-85쪽)


이 땅 적폐 정치인들의 비열한 꼼수 화법 가운데 압권으로 꼽혔던 말이 ‘주어가 없다.’였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다시 도마에 오른다. 유체이탈 어법과 더불어 책임을 도려내는 대표 협잡이다. 백색문명에서 협잡은 필수니 저들은 여전히 전가의 보도로 지니고 있다.


백색의자는 백색문명의 총아에 속한다. 총아답게 진단과 치료의 전 과정에서 기계와 화학합성물질을 전면에 세우고 자신들은 뒤로 빠진다. 기계와 화학합성물질은 과학의 권위를 전유하므로 우연히(!) 개입하는 의자의 실수까지 빨아들여 책임에서 초월한다. 수많은 인간들이 그렇게 죽어갔으며 죽어가고 있고 죽어갈 것이다. 아니, 익명이므로 그것들은 폐기되었으며 폐기되고 있고 폐기될 것이다.


백색의자 개인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시스템의 문제다. 시스템은 백색의자들에게서 영혼을 가져가는 대신 자리와 돈을 보장해준다. 시스템을 상대로 싸워 이길 개인은 없다. 나는 백색의료시스템 아래서 아버지와 장모를 잃었고, 딸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주었다. 분명한 오류와 실패가 있었으나 모두 덮였다.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의학 아닌 아픈 사람에게 잠시 주목하며 지나갔다. “어쩌다가 그런 병에·······.”


나는 시스템의 보호를 받을 여지도 의도도 없는 마을 의자다. 그나마 주류 백색 양의자들이 의자로 치지도 않는 녹색지향 한의자다. 내가 아픈 사람 앞에서 빠질 경우도 없고 그들을 익명화할 이유도 없다. 기계 하나 없이 눈과 귀와 코와 손으로 진단하고, 천연 약재 하나하나를 엄선해 처방하고, 복용 과정에서 들어오는 이의를 모두 받아 시정해야 하는데 어떻게 서로 익명성을 주고받겠는가.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하는 초로 여성이 김장을 몇 포기 했는지 아는데 어떻게 서로 사물이 되겠는가. 알코올중독으로 죽은 아들 이야기를 하며 우는 어르신과 마음 나누는 가운데 시침을 해야 하는데 어느 틈에 ‘이것’이 튀어나오겠는가.


변방에서 백안시되며 살아가는 존재 그 자체가 시스템 안 사람에게는 익명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 익명이라면 달게 받겠다. 내 이름으로 저들에게 건넬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변방의 내 이름을 선물로 건네는 삶에서 경이를 빚어간다. 언젠가 어디선가 반드시 짝지 경이가 반짝였을 것이므로. 또는 언젠가 어디선가 반드시 짝지 경이가 반짝거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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