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산길을 걷다가 햇볕에 노출된 채, 파닥거리고 있는 어리디어린 땅강아지와 마주쳤다. 나는 찰나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길섶의 부드러운 풀잎 생명 하나를 살며시 거두었다. 그 풀잎으로 땅강아지를 살살 문지르고 톡톡 건드렸다. 어린 땅강아지는 숲속으로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어린 땅강아지가 하느님이다. 풀잎이 하느님이다. 나도, 차마, 하느님이다. 땅강아지와 풀잎과 나는 거대하지 않다. 우리는 소미심심小微沁心이다. 우리는 삿된 인류가 구축한 토건신deus aedificatus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삶을 나누는, 그러니까 토건을 멈추었을 때, 발현되는 비토건신이다. 토건신은 전쟁·계급체제·남녀차별·아동학대·심신분리·자연착취·시간의 공간적 지배와 더불어 인류의 병적인 문명이 일으킨 거대유일신교 사유의 정점이다. 사하라시아 한복판에서 탄생한 야훼와 알라가 대표적인 예다.


인간을 창조하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전지전능한 존재인 거대유일신의 역사, 특히 인간 구원의 역사를 구성해낸 텍스트가 구약성서다. 그 역사를 예수의 삶과 죽음이 완성했다고 말하는 텍스트가 신약성서다. 예수 넘어 마호메트가 참 완성자라고 주장하는 텍스트가 코란이다. 오늘날 이 세 텍스트가 구원을 빌미로 수십 억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무릎 꿇도록 하고 있다. 과연 야훼·알라에서 예수·마호메트까지 역사는 신이 인간을 구원한 역사인가?


아니다. 그 반대다. 인간이 신을 구원한 역사다. 구약성서는 거대유일신의 실패와 그럴 수밖에 없는 한계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실패한 신의 고백은 『욥기』를 통해 절절하게 들려온다. 『욥기』에서 거대유일신은 너절한 진면목을 보여준다. 사탄과 하는 내기가 그렇고, 아무 잘못 없는 욥에게 자신의 광대함을 보여 과시하는 허장성세가 그렇다. 결정타는, 욥이 짐짓 무릎을 꿇자 갑절의 축복을 내리는 장면이다. 이 무슨 수작인가. 전지전능한 거대유일신이 베푸는 축복 치고는 뇌물 수준의 알량함 아닌가. 아, 이건 트릭스터다. 트릭스터 유일신이라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물론, 이는 성서 최종편집자 신학의 한심한 수준의 반영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면 2천 년 쌓여진 기독교 신학의 수준은, 뭐, 얼마나 높아졌나.


신의 실패는 무엇인가. 그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었다는 인간의 고통을 감지할 수 없다는 거다. 왜? 몸이 없으니까. 욥이 깨진 기와 조각으로 상처를 피가 나도록 긁은들, 몸 없는 거대유일신이 어찌 그 고통을 알랴. 신의 창조는, 신의 사랑은 사이버 체험이었다. 욥이 피눈물로 증명한 신의 허상이다. 신은 뉘우치지 않았다. 뉘우칠 수 없었다. 물질 축복으로 때웠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게 구약성서의 결론이다.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신은 회심conversion의 기회를 잡았다. 사람이 되어 욥에게 진 빚을 갚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던 것이다. 예수다.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나사렛 예수는 도저한 몸의 사람이었다. 소미심심의 화신이었다. 그는 버려진 작은 자, 이름 모를 들풀이 하느님임을 알아본, 타락 이후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느님인 거다. 하느님이 버려진 작은 자, 이름 모를 들풀로 되도록 이끈 나사렛 예수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신 구원 역사가 마무리된다. 그렇다. 예수는 버려진 작은 자, 이름 모를 들풀이다. 버려진 작은 자, 이름 모를 들풀이야말로 장엄 신이다. 토건신은 흔적 없이 해체된다.


그 버려진 작은 자, 이름 모를 들풀이 누군가. 세월호 예은이다. 일본군 성노예 김복동이다. 쌍차 해고노동자 김득중이다. 물대포에 스러진 백남기다. 밀양 할매, 강정 할배·······그리고 마침내 오늘 아침 그 땅강아지와 풀잎 하나다. 돈수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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