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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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아끼는 반찬 가운데 하나는 완전히 ‘맛이 간’ 김치를 깨끗이 빨아 놓은 ‘뒷김치’다. 맛이 간 양념을 제거한 이 뒷김치에는 은은한 잔향과 담백한 여미가 흐른다. 잘 익어 한껏 풍요로운 맛과는 전혀 다른, 그리고 맛이 간 양념으로는 도저히 지을 수 없는 경계의 맛이다. 시중 음식점처럼 수육이나 삭힌 홍어를 싸먹는 ‘보조 식품’ 정도로 취급하면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나는 정식 김치 대우를 한다. 천천히 그 향과 맛을 느끼며 먹는다. 여태 먹어본 그 어떤 비싼 요리보다 맛있다고 느낀다.


내가 모르는 맛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세계를 탐하지 않는다. 먹는 일이 거룩한 제의이며 신나는 놀이라는 진실이 맛날수록 뚜렷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거룩하다는 것도 신난다는 것도 먹는 사람의 정서 문제다. 내가 영위하는 현실 삶의 지평을 넘어선 맛을 추구할 때, 그 밥상은 이내 포르노가 되고 만다. 포르노는 극단적 분열이다. 극단적 분열은 무수한 동어반복의 일극집중구조를 낳는다. 일극집중구조는 현란한 매혹을 지닌다. 현란한 매혹은 도道로 위장한다. 위장을 폭로하는 것이 수수함이다.


주중에 나는 가족 이외에 두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하나는 세월호 아이들(의 영혼)이다. 이들과는 아침 식사를 함께 한다. 한의원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컴퓨터 화면에 세월호 아이들 이름을 띄운다. 그들과 아침인사 나누고 밥상을 차린다. 반 공기의 밥과 두어 가지 반찬이 전부다. 수수하다. 



다른 하나는 내게 아픔과 삶을 숙의하러 오는 사람들이다. 이들과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한다. 한의원에서 두 시간쯤 숙의한 뒤 동네 실박한 백반 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5천 원짜리 백반을 먹는다. 수수하다.



수수함은 나의 자연Sein이다. 화려함을 동경하지 않는 천성을 지녔다. 에부수수하게 궁상떠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수수함은 당위Sollen다.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나가 조금이라도 더 낫기 위해 수수함이라는 화두와 결곡하게 마주한다. 포르노 사회에서 수수함은 욕됨이다. 욕됨을 견디는 것[인욕忍辱]으로는 부족하다. 욕됨을 향해, 그러니까 수수함을 향해 흔쾌히 힘껏 나아가야만[진욕進辱] 한다. 수수함은 세상의 참 중심인 파르히아와 이용수에게 바치는 헌정이다. 내 수수한 밥상에서 내 수승한 도가 난다.


헨미邊見 요庸. 사상을 담은 이름이다. ‘식과 생의 숭고함’을 가장자리에서 봄邊見으로써 기존의 중심을 무너뜨린 평범함庸, 그러니까 수수함이야말로 끝 날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하는 옹골찬 자세다. 문옥주의 죽음이 “애통하고 참을 수 없이 안타까운”, 문옥주의 “장구소리가 귓속에 머물러 있는”, 문옥주의 “깊이 체념한 얼굴이 살갗 밑에 박혀 있는” 저자의 존재와 삶은 문옥주가 누군지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참으로 아픈 ‘돌직구’가 아닐 수 없다. 그 돌직구에 맞아 피를 흘려야 사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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