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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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점점 더 약육강식으로 기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집요하게 강함과 약함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약육강식 세계에는 약육강식 세계의 강함과 약함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내 생명을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강함과 약함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이것을 약육강식, 약자를 버리는 인간 사회에 적용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질병 치료에서 생명의 강약이 있기 때문에 구별해야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말하는 만큼 해답은 멀어집니다.(222-223쪽)


강약이라는 같은 용어를 쓰면서도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전혀 다른” “별도”의 문제라 한다. 정말 약육강식의 세계, 생명력의 세계, 치료의 세계는 포개지지 않고 쪼개지기만 하는 강약 개념을 지닐까?


우선 그 다름을 분명히 해보자.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강함이란 권력과 돈을 많이 가졌다는 뜻이다. 생명력의 세계에서 강함이란 생명 유지를 위한 기본행위에서 단호함을 뜻한다. 치료의 세계에서 강함이란 평형을 깨뜨린 항진 상태를 뜻한다. 이렇게 달리 풀어놓으면 포개지는 부분이 없어 보인다. 다시 찬찬히 따져보자.


한 사회에서 권력과 돈을 많이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수탈체계에 의존해야 한다. 생명력 세계에서 단호함도 마찬가지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 생명을 수탈하지 않고는 인간의 생명 유지가 불가능하다. 치료의 세계도 예외일 리 없다. 몸 어느 부분 기능이 항진되었다면 그 지나친 에너지만큼 다른 어느 부분을 수탈한 것이다. 수탈이라는 용어를 불쾌하게 여기는가와 상관없이 이 진실은 뒤집히지 않는다.


자연농 자체가 수탈을 최소한으로 줄여 인간의 탐욕을 제어함으로써 전체 자연 생명의 공존을 꾀하는 지혜가 아닌가. 자연농 철학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경제학비판의 종자논리로 작동해야 하지 않는가.


백보를 물러서자. 전혀 다르다 하자. 전혀 다르면 다른 대로 뭔가 할 말이 있을 터. 그럼에도 약육강식 세계의 강약 문제를 거듭해서 제기하는 쓰지 신이치에게 끝내 이렇다 할 말 한 마디를 해주지 않는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의중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구성원 하나하나의 내적 각성이 없는 공동체 구조 변혁은 무의미하다는 말과 구성원 하나하나가 내적 각성을 이루면 공동체는 자연히 변혁된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이미 진부해질 대로 진부해진 진실이다. 알면서도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서는 것은 모름지기 몸 작용이다. 자신이 발 디딘 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결국 문제는 시중時中이다.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어디 만큼 기울어져 있는가를 그때그때 판단하고 역동 저항하는 그것. 촛불이 이루어낸 공동체적 변화를 완수하기 위해 하나의 촛불이었던 내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때,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타산지석 이상의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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