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노력해서 일하고 수입을 얻어야 합니다. 물론 돈을 더 벌고 싶다고 밤낮 없이 일하고, 인간의 몫을 망각하고, 족함을 알지 못하고, 신체를 혹사하고,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221쪽)




균형 잡힌 중도를 설파하고 있다.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말은 다음 질문에 답한 것이다.


·······빠름을 경쟁하는 것이 요즘 사회·······지만·······게으름뱅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있다면 그곳에서 살고 싶을 것입니다.·······게으름뱅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216-218쪽)


이 질문을 앞에 놓으면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말은 여지없이 기계적 중도다. 쓰지 신이치는 현 사회의 과도한 쏠림을 염두에 두고 역동적 균형을 꾀하려 게으름뱅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상황context이 제거된 교본text적 답을 한다. 독각獨覺 이루고 앉은 구름 위 세상에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칠 일 없으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스승 대접 받는 인사가 훈계라고 하는 말, 예컨대 우리사회의 불교 조계종 종정이 매년 석탄절에 내리는(!) 법어가 똑 이와 같다. 너무 옳은 말인데 허공에 둥둥 떠 있다. 1981년 전두환 철권통치 때, 성철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청원 유신을 표절해 세상에 내놓았다. 인간과 사회를 통렬히 흔들지 못했다.


히틀러가 광란의 질주를 하고 있을 때, 그를 처단하기 위한 비밀조직이 결성된다. 거기에 젊은 신학자이자 목회자 한 사람이 가담한다.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당한다. 디트리히 본회퍼, 그가 ‘살인하지 말라.’는 기독교 계명, 그 너무나도 당연한 금지를 몰랐을 리 없다. 천하 계명을 부수고 거대한 쏠림에 저항했던 디트리히 본회퍼야말로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참 중도를 살지 않았는가.


빠름이 유일신인 이 세상에서 게으름뱅이는 결곡한 신성모독이다. 너무나 옳지 않아서 너무도 옳은 삶이다. 게으름뱅이 만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같다면 2017-06-0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시절 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정이 떠오르네요

bari_che 2017-06-02 15:21   좋아요 0 | URL
대학 시절 만나 심어진 본회퍼-감정을 지금까지 지녀왔다면 아픈 순간이 참으로 많았겠네요. 힘드셨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