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의 물리학 -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물리학의 대답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리학에 쏟는 내 관심은 늘 내 지식을 넘어선다. 40년을 훌쩍 넘긴 이 과도한(?) 관심은 내가 인문·사회 계통 공부를 오랫동안 해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특이하다 할 수도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해야 맞다. 사실, 물리학이 밝혀가는 세계 진실에 기울이는 주의는 인간에게 그 무엇보다 근원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내 인문·사회학적 사유에 물리학적 진실이 육중한 근거이자 균형추로 작용하는 일은 이런 이치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임상의가 된 뒤 관심과 사유는 좀 더 구체·실용의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카를로 로벨리가 쓴 『모든 순간의 물리학』에는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그 둘 사이 모순 때문에 일어난 난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전경이 펼쳐진다. 저 갈릴레이에서 시작하여 불세출의 천재들이 경이로운 통찰과 지식의 구성으로 풀어헤쳐온 세계 진실은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일대 전복이 일어나고 그 전복은 다시 전복된다. 전복의 전복으로서 오늘 우리 눈앞에 드러난 진실의 본질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연속과 단절의 이율배반이다.


이율배반은 서구를 태초부터 괴롭혀온 아포리아다. 서구가 이 문제를 괴롭게 여기는 것은 이런 상태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수긍할 수 없다. 그래서 옳지 않다. 감성적으로 공감할 수 없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다. 배반의 이율을 통합의 일률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서구는 지금도 맹렬히 그 작업을 하는 중이다. 예컨대 저자는 단절에 연속을 들여 놓으려고 고리loop를 도입한다. 문제는 너무 미세한 단위라 실험으로 증명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천재들이 갖은 노력을 해온 지 100년이다. 연속의 진실은 연속대로 여전하다. 단절의 진실은 단절대로 여전하다. 여전히 문제는 요지부동이다.


아무리 세계 진실에 가장 핍진한 진술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물리학 또한 하나의 사유방식이며 인식체계다. 맨 처음 자리한 종자 논리의 간섭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요는 모순이 마주보고 있는 상태를 어떻게 할 것인가,다. 동일률, 배중률, 모순율을 넘어가느냐, 하는 문제다. 다치 논리를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태여 통합을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다’고 하므로 고리, 플랑크 규모, 이런 설정을 통합의 도구로 삼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다시피 물리학의 위대한 발견들은 상반된 이론들을 통합하려는 노력 과정에서 얻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발견이 반드시 통합의 결과이지는 않다. 설혹 통합이라 하더라도 실체적 진실의 차원이라기보다 상반됨, 통합의 당위성을 극단으로 인식하는 사유방식·인식체계의 차원에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런 형식논리적인 사유방식·인식체계는 문제의식의 공격성을 극대화하여 과학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키는 현실 동력이 되었다. 현실 동력인 과학은 필경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과학의 혁명은 곧 바로 기술 지배의 토건을 일으켰다. 기술 지배의 토건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수탈체제로 목하 전 지구를 파헤치는 중이다.


저자는 인류가 그 문명의 폐해로 스스로를 멸종에 이르게 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면서도 자연과의 일치, 겸허, 사랑, 지식의 성장, 낙관적이고 서정적인 전망 들이 담긴 세계인식 미학을 피력한다. 이론물리학 고수로서 보일 법한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까. 구구절절 단정하면서도 관대하다. 아마도 책의 이런 풍경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바로 여기서 매끄럽게 넘어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크게는 우주, 작게는 소립자에 이르기까지 세계 사태·사건의 근원적 진실을 궁구하는 학문이라고 해서 물리학이 무색무취한 담론인 것은 아니다. 담론을 생산하는 인간의 개인적 면모와 그가 처한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온전히 분리된 물리학을 전제하는 짓은 순수 아닌 순진의 발로다. 담합에 육박하는 주류 해석도 있으며 바르지만 소수파여서 매장된 담론도 있다. 루프양자중력 연구자와 자본주의 수탈체제의 연관성을 묻는 것이 그저 허튼소리일 수만은 없다. 물리학 담론 자체의 내용과 시민으로서 물리학자의 삶을 나누어야 한다 하더라도 물리학에서 날카로운 천재가 정치적 올바름에서는 날라리 천치 노릇 하는 것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저자는 1956년 베로나에서 태어나 80년대에 볼로냐 등 명문대에서 공부했다. 90년대 이후 오랜 기간 저 악명 높은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 민주주의를 말아먹고 있을 때 그는 청·장년기를 통과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베를루스코니 정치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 책 마지막 장 인간론의 전반적 기조를 통해 추정해볼 따름이다. 사실 이 마지막 장이 없었다면 아마도 학문과 학자의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거기 펼쳐진 인간론을 읽을 때, 각 분야의 대가 또는 고수라는 사람들이 사회정치적으로 ‘해맑은’ 무관심, 의도된 무지를 드러내는 우리 현실 상황이 불현듯 떠올랐다. 새삼 정색하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대가 또는 고수의 탁월함, 대체 그 본질이 뭘까?


학문, 특히 자연과학이나 예술 계통의 천재들이 사회정치적 무관심과 무지를 대가로 권위와 명예를 보장 받으면서 특권층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내가 품은 의문은 더 근원적인 지점으로 다가간다. 일반상대성이론이 제시한 연속성의 세계와 양자역학이 제시한 단절성의 세계가 상호모순일 때, 가령 루프양자중력이론으로 통합시키려는 저자의 노력은 과연 진실을 향한 치열한 탐색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무엇이 종자논리인가에 따라 답이 갈린다. 서구는 모순의 공존을 거부하는 형식논리를 종자논리로 삼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모순의 공존을 수용하면 통합 노력은 부질없다. 오류다. 서구 천재에게는 분명 몽매한 디테일의 악마가 있다.


몽매한 디테일의 악마는 통합 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에 유물적으로 종노릇한다. 저들의 지식은 고급 포르노다. 천착이 만들어낸 과잉 방정식에 서구세계가 홀랑 빠져 있는 동안 제삼세계에서는 한 해 사백만 명의 아이들이 굶어죽는다. 모든 지식은 실용에 복무해야 한다는 말이 재수 없는 이상으로 휴먼스케일 저 너머 고고한 진실이 있다는 말은 싸가지 없다. 제목처럼 정녕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려면 포르노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디테일을 내려놓고 정좌하여 몽매를 벗어야 한다. 멸절의 위기 앞에 선 인류에게 더 이상의 악마는 필요하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