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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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대한 자기’라는 괴물을 만나면 쉽게 포기하고 과거의 자아로 돌아간다. ‘요나 콤플렉스’란 우리 모두가 가진 최선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수행하기를 회피하는 마음이다. 그 이유는 우리 스스로 최선이 무엇인지 찾기를 두려워하고 적극적으로 탐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나는 생전 보지도 못한, 심지어 원수지간의 니느웨인들의 생존을 위해 존재했다. 요나의 선교로 12만 명 이상의 니느웨인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

  신은 질문한다. “네가 화내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모두 요나 콤플렉스에 빠져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두려움은 우리를 요나 콤플렉스로 몰아가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내키지는 않지만 원수의 나라에서 사랑과 심판의 말을 전한 요나처럼 두려움에 맞서는 여행을 떠나야한다.·······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위대함을 찾아야 할 것이다.(345쪽)



젊은 날 아내와 가벼운 언쟁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위험에 처해 있을 경우, 한 사람은 가족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남이면, 누구부터 먼저 도와야 하는지를 두고 벌인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당연히 가족부터 도와야 한다고 했고, 저는 위험의 경중과 완급이 기준이지 가족 여부는 기준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제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고 저 또한 아내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 생각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내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달라졌습니다.


요나의 신에게 요나가 화를 내는 것,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냥 다른 나라 백성도 아니고 원수 나라의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신에게 처음부터 기꺼이 승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나의 협량 문제라기보다 광활함으로 나아가는 행로에 그를 참여시키는 신의 역사役事 과정 문제일 터입니다. 신의 커다란 문맥 안에서 요나 개인은 무모한 최선으로 두려움과 아픔의 한가운데를 관통합니다. 그 저항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으니 에고를 무너뜨리는 힘은 경쾌한 일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육중한 불일치에서 나오는 것임을 요나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붓다와 그리스도의 길은 인간에게 있는 장엄을 되찾는 여정입니다. 되찾는다는 표현의 타당성은 인간이 장엄을 잃어버렸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탐욕과 공포·불안, 그리고 무지가 문명의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흐름이 그 상실의 역사입니다. 공존과 고요, 그리고 지혜로 가려면 시스템을 때려 부수는 일이 불가피합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불편이 수반됩니다. 무통과 편의에 깊이 침륜된 현대인에게 장엄으로 가는 숭고가 관심사이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경고가 발해지지만 여전히 주류는 중독 상태인 채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촌 문제는 단일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인류 전체의 존망이 달린 문제입니다. 인간 각자의 문맥이 곧장 신의 문맥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면서도 포괄적인 영성으로 열린 숭고인간이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아둔한 게걸스러움에 사로잡힌 통치자와 그를 부리는 수탈 세력에 맞서 지난 토요일, 전국적으로 232만의 숭고인간이 촛불을 들었습니다. 저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한 찰나 들이닥치는 장엄으로 전율했습니다. 에고를 깨고 번져가는 위대함에 손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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