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라운이 전하는 공감과 존엄의 의료
버나드 라운 지음, 이희원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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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는 과학적 지식으로 얻은 사실에다 인간적인 이해를 추가해야 한다. 그러므로 환자도 의사를 대하는 예술을 배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의사는 질병 치료만 중시하고, 환자는 낫기만 바란다. 환자가 예술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진료과정에서 치유를 위해 의사와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 대등하게 그리고 서로 존중하며 치유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므로 방법을 배워야 한다.(435쪽)


  환자는 의사가 자신을 한 인간으로 봐주기를 원하며, 단지 질병으로만 인식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의사로 하여금 고통 받는 한 인간이라는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환자를 보도록 이끄는 주체는 환자 자신이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436쪽)


사람이 살면서 꼭 공부해야 하는데 전혀 하지 않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부부 (특히 성) 관계와 자녀 양육 문제다. 공부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착각해서 공부하지 않는다. 대부분 실패하고 그 실패를 모른 상태로 태연히 살다 서로 배신한 상태로 죽는다. 그리고 질병 문제다. 공부해도 알 수 없이 어려우니 의사한테 맡겨야 한다고 착각해서 공부하지 않는다. 대부분 실패하고 그 실패를 모른 상태로 태연히 살다 질병으로 죽는다.


환자가 의사에게 자동적으로 하는 공통 질문은 딱 하나다.


“왜 이런 거예요?”


딱히 이치나 원리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네가 잘 알 테니 어서 고쳐라 할 것을 돌려 할 뿐이다. 질병 자체는 물론 그 메시지로서 삶의 변화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당연하다. 내 경우, 처음에는 소상히 설명했으나 지금은 선수를 친다.


“왜 이런 겁니까?”


환자는 대개 당황 혹은 황당해한다. 네가 알지 내가 아냐 하는 표정을 지을 때, 나는 모든 질병은 삶의 한가운데서 오므로 그럴만한 곡절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는 진실을 알려준다. 그래도 모른다고 잡아떼면 두세 가지 실마리를 쥐어준다. 이렇게 대화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환자는 남편한테서 모욕적인 말만 들어도 오줌소태가 올 수 있다거나 섹스스트레스 때문에 등이나 어깨 결림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상 깊게 배울 수 있다. 그 배움은 환자에게 “자신이 느끼는 불편감의 상당 부분이 질병이 아닌,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달아”(440쪽)가는 길을 열어준다. 이 길은 의사와 “서로 대등하게 그리고 서로 존중하며 치유에 참여”하는 경지로 환자를 데려간다.


의사로 하여금 고통 받는 한 인간이라는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환자를 보도록 이끄는 주체”가 되려는 사람은 “왜 이런 거예요?”라고 생각 없이 던지는 질문을 거둬들인다. 질병이라 여겨지는 불편감을 살피고 그것이 스며들게 만든 삶을 돌아본다. 고통 받는 한 인간으로서 어찌 하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의사와 숙의한다. 숙의 상대 아닌 치료 기술자로 의사를 대하면 의사 또한 그 수준에서 환자를 대한다는 사실에 유념하면서 스스로 존엄을 세워 함께 존엄한 세계를 세워간다.


존엄한 세계를 여는 일이기에 이를 예술이라 한다. 예술은 접힌 진실을 펴는 일이기에 적확히 표현한다. 적확한 표현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말, 시선, 손짓, 앉음새 하나하나가 존엄을 빚어내는 환자의 예술이다. 예술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므로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배우는 환자에게 복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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