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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지역은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다가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커져나갔었다. 이는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는 민족주의가 더욱 급진화된 '대세르비아주의' 단체들이 등장했는데 각자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민 방위대 (Narodna Odbrana)

1908년에 창설된 단체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보스니아 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을 돕기 위해 설립. 이들은 세르비아 육군 대위인 밀란 바시치를 영입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인사들에 대한 테러 활동을 펼쳤으며 세르비아 당국의 제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무려 국내에만 220개의 지부를 설치할 만큼 조직력이 있었다고 한다.

1914년 6월 28일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암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배후로 인민 방위대를 지목했었는데 이때 대 세르비아 선전포고 직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표한 암살 사건 최종 보고서에도 암살 배후에 인민방위대가 있다는 내용이 나와있었다고 한더.

그러나 정작 이 시기에 인민 방위대의 지도자 밀란 바시치는 사망한 뒤였으며 조직은 사실상 와해 후 흑수단에게 통제되고 있는 중이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여기까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담이지만 설령 제대로 파악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는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내부 사정을 살펴보면 예전부터 세르비아를 무력으로 손보자고 한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비롯한 군부 세력 뿐만 아니라 베르히톨트 외무상 같은 민간 정치가들과 여론도 세르비아를 작정하고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세르비아 정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통첩안 내용의 상당부분을 수용했음에도 몇개가 거부되었답시고 전쟁을 일으킨거였고.

2. 흑수단 (Crna ruka)

드라구친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비밀 결사 단체로 구호는 '단결 아니면 죽음'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창설자인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은 1903년 알렉산더 오브레노비치 왕과 왕비인 드라가 마시나 및 그들의 친인척이 계속 자행한 권력형 부정축재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과 왕비를 죽이고 카라조르지예 가문의 페타르를 왕으로 옹립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한 행보를 보였던 그가 전면적으로 나오게 된 파시치 수상 같은 민간 정치가들이 현실과 타협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에 국민들과 각 군부대의 장병들이 시위를 비롯해 격렬하게 나오는 여론에 발맞춰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흑수단은 청년장교들과 하사관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 조직으로서 처음 구축되었는데 꼴에 단체라고 행동 강령도 있었다고 한다.

- 1조 우리 조직은 세르비아 인만의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2조 우리 조직은 문화적인 행동보단 혁명적인 행동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일반 대중으로부터 비밀을 유지한다,

- 3조 우리 조직의 명칭은 '단결 아니면 죽음'이라고 한다. 암호명은 블랙 핸드(Black hand)

- 4조:

ㄴ 1항 우리 조직은 강령에 발맞춰 공적인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계급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ㄴ 2항 세르비아 인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서 혁명적인 조직을 창건한다.

ㄴ 3항 국경 밖에서도 우리의 목표에 반대하는 적(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들과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싸운다.

ㄴ 4항 세르비아와 세르비아 인에 대래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든 국가, 조직, 그리고 개인들과 접촉을 계속 유지한다.

결론을 요약하자면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세르비아를 건설하자는 것인데 하필이면 디미트리예비치는 뒷공작에 매우 능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흑수단을 보호할 목적으로 변호사 출신이자 광적인 민족주의자인 요바노비치가 이끄는 그룹과 외교 전문가인 라텐코비치가 이끄는 그룹을 영입해 민간인들까지 끌어들이는 치밀함을 보여줬다.

이렇게 흑수단에 영입된 민간인들은 흑수단의 세포 조직을 활성화 시키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피예몽'이라는 민족주의 신문을 발간해서 대중들이 민족주의 감정에 고취할 수 있게 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인민 방위대도 하부 조직으로서 흡수했다. 이처럼 목표 실현을 위해서 암살, 테러, 밀수 등 각종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한 걸 보면 비합법 조직이지만 한편으론 1차대전 이전까지 세르비아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군부 장교단과 밀접한 관련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다.

p.s. 참고로 흑수단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에 관여하다가 1차세계대전이라는 대형사고를 불러오는 바람에 세르비아 정부로부터도 버림받아 싹 다 조직이 박살나고 디미트리예비치는 처형당했는데 그때 "대세르비아여 영원하라!"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함.

p.p.s.또 흑수단은 거창한 목표와는 달리 대형사고 치면서 싸그리 망했음에도 그들의 망상스러운 정신은 아이러니 하게도 2차세계대전 당시 미하일로비치 대령의 체트니크, 그리고 발칸의 도살자로 유명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한테로까지 이어지게 됨.

출처

- 김성진, <발칸 분쟁사: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역사>, 우리문학사, 1997, p57~63

- 박상섭, <1차세계대전의 기원>, 아카넷, 2014, p244~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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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부의 군대 개혁

1860년 이후부터 막부는 본격적인 서구식 군대를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막부 육군이 창설된다. 막부 육군은 보병대, 기병대, 포병대 중심의 삼각편제를 채택했고 병과는 전열보병과 경보병으로 나누었다. 병력 모집 방식은 하타모토들을 통해 쌀 생산량에 따라 농민병사들을 차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월급은 1인당 10냥 이상이었고 장교단은 상급무사들이 주도했다. 조슈 정벌 등 실전에도 투입되었는데 이때 막부군은 전장식 소총의 한계와 낮은 사기, 몇몇 번들은 출병 거부 때문에 조슈 번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 후 새로운 쇼군으로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다시 한번 군대 개혁에 나선다.

먼저 육군 총재직 신설 등으로 기존 부교 중심의 군 지휘계통을 개혁했고 친위대도 증강시켰다. 1867년에는 징집 대신에 자금 납부를 통한 병력 모집을 채택했는데 이를 통해 막부 측에서 아예 납부된 자금으로 병사들을 고용하는 체계가 막부군에서 자리잡게 된다. 그러면서 보신전쟁 발발 약 1년 쯤에는 2만명이 넘는 병력과 48개 대대를 보유한 서구식 군대로 변하게 된다.

또한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초빙하기도 했는데 이 군사고문단에게 지도를 받을 부대인 '전습대'(덴슈타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고 전습대에게 지급할 무기로 당시 최신 무기였던 샤스포 소총이 일본에 수입되었다. 전습대는 주로 상급무사들 위주의 인적 구성이었고 연대가 최대 단위였던 다른 막부군 부대와는 달리 전습대는 대대가 최대 단위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부군은 전반적으로 사기와 충성심이 낮았다. 그 이유는 바로 막부군 내부에 있었는데 장교단이 상급무사들이고 사병들은 평민이나 하급무사인 구조 때문이었다. 이러다 보니 통일성과 단결력은 떨어졌으며 충성심도 크게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2. 사쓰마 번 군대의 근대화

한편 사쓰마 번은 경제적 사정이 좋았다. 막말기 사쓰마 번은 번정 개혁을 통해 채무 정리 및 교역 확대로 재정을 안정시킨 것은 물론이고 쌀 생산량 규모도 나름 좋았었다. 그 와중에 새로운 다이묘로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집권했는데 그는 난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사쓰마 번은 근대화 정책에 나설 수 있었다.

시마즈 가문 주도로 사쓰마 번은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식 대포를 도입시키고 서구식 총대를 만들었다. 흑선 내항 사건으로 일본이 완전 개항한 후에는 아예 군수 시설들과 반사로 및 용광로, 정련소, 방직 공장 등을 비롯한 서구식 공장을 세웠다. 거기다가 개혁을 위해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하급 무사 출신들을 적극 등용하는 파격적인 행보도 보였다.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개혁 덕분에 사쓰마 번은 1854년에는 10문의 대포를 갖춘 서구식 해군 군함인 쇼헤이마루를 건조하는 것을 성공했다. 사쓰에이 전쟁 후인 1866년에는 육군과 해군 지휘계통을 개편했고 대대와 소대 개념을 수용했다. 1860년대에는 영국을 통해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을 도입하는 등 프랑스군을 롤모델로 삼은 막부군이나 프로이센군을 롤모델로 삼은 사가 번과는 달리 사쓰마 번은 확실하게 영국식 군대를 지향했다.


3. 조슈 번 군대의 근대화 개혁

조슈 번도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보낸 학생들이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근대화 정책에 나섰다. 당시 조슈 번은 무사계급을 중심으로 보병, 포병, 기병 3개 병과를 도입한 서구식 군대를 만들었고 신식 화기와 군함도 도입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 동시에 군사 관련 책들도 수입해왔고 신식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실시시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다가스키 신사쿠 같은 번 내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무사가 아니라도 입대가 가능한 기병대(기헤이타이)를 비롯한 제대들이 생겨났다. 당니 시모노세키 전쟁 패배를 통해 서구열강의 힘을 깨달은 다가스키 신사쿠는 양이를 과감히 내려놓고 존황과 도막을 위해 서구 열강의 우수한 군제와 기술을 수용하기로 결단을 내렸었다.

기병대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군대였었으며 훈련 역시 강도가 높았다. 편제는 보병대와 포병대로 나뉘었었는데 이처럼 신사쿠 주도로 신식군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조슈 번의 다이묘인 모리 가문이 다가스키 신사쿠에게 믿고 맡겼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1866년에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삿초동맹'을 결성하면서 조슈 번은 사쓰마를 통해 서구 열강으로부터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과 암스트롱 포를 수입해올 수 있었다.

이러한 군 개혁 덕분인지 막부의 조슈 정벌에서 조슈 번 군대는 막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당시 막부군은 주로 전장식 소총이 상당수 였었고 병사 개개인의 사기도 낮았지만 반면에 조슈 번 군대는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 같은 후장식 소총들을 나름 보유하고 있었는데다가 실전 경험도 조슈 번 내부 분열로 겪어본 상태였다.

이러니 연사속도와 사거리가 딸리는 전장식으로 무장한 막부군이 패배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전투 직전에 조슈 번은 서양 진법을 바탕으로 삼아 전번 일군 체제로 정비했다. 화승총을 교체하기 위학 신식 소총들을 사들였고 150명 단위의 전술부대를 편성시켜서 효율적인 군대 조직을 만들었기도 했다.


4. 메이지 신정부의 군제개혁

1868년 보신전쟁에서 승리한 메이지 정부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주도 하에 한동안 육군은 프랑스식, 해군은 영국식 체제를 유지했었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을 시찰하며 중앙 집권식 군 체제에 영감을 받은 온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병부소보에 취임하면서 일본 육군은 독일식으로 개편되기 시작했다.

1872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정부에 군비 의견서를 제출하고 유럽의 군제를 본 떠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태정대신이 '징병령'을 발표했으며 일본제국의 징병제는 복무기간 3년의 상비군과 2년의 후비군, 국민군으로 분류되었다. 병과는 보병, 포병, 기병, 공병, 치중병 총 5개로 나뉘었다.

1882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발발한 이후 일본 정부의 대외팽창 노선이 본격화 되면서 제국군도 치안유지용에서 침략을 위한 군사력으로 개편되어갔다. 육군력 중심인 보병 연대는 1878년에 15개였지만 1884년에 3개, 1885년에 4개, 1886년에 5개, 1887년에 1개 추가되어 모두 28개 연대가 되었다.

또한 기존 6개 진대 편제는 1888년에 이르어 보병연대의 상급기관으로서 제1사단부터 제6사단까지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명칭 변경이 아닌 군제개혁의 중요한 요소였다. 이렇게 편성된 사단들에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보병, 기병, 포병, 공병의 각 부대와 탄약과 식량을 수송하는 치중병부대, 부상자의 이송과 치료를 담당하는 위생대, 야전병원 등으로 이뤄졌다.


5. 일본 제국군의 '독일식 화력주의' 사상

앞서 말했듯이 일본제국군은 메이지 신정부 초기부터 독일을 모티브로 군제개혁을 했었는데 이러면서 신속한 기동으로 소총, 포병 화력을 집중시켜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식의 '독일식 화력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0년대 이후 독일의 육군 소령 멕켈을 초빙해 독일 육군의 전략, 전술을 습득해왔다.

그렇다면 일본 제국군이 독일식 화력주의를 수용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세이난 전쟁의 경험이었다. 세이난 전쟁 당시 사쓰마 반란군은 일본제국군을 향해 '발도돌격'으로 백병전을 시도했지만 일본제국군이 전장식 엔필드 소총에서 후장식 스나이더 소총으로 교체하면서 집중사격 앞에 차례로 쓰러져갔는데 이를 통해 백병돌격의 우위성이 소총 화력 앞에 무너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 후 일본 제국군 내에서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군사학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청일전쟁 이후 1898년에 개정된 <보병조전>은 보불전쟁의 교훈에 따라 만들어진 독일의 1888년도판 <보병조전>을 모방한 것이었고 아예 전략, 전술의 기본을 '몰트케 직역'이라고 할 정도로 독일식으로 깔아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제국군의 군사사상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깨지게 된다.

출처:

- 일본어 위키백과 '막부육군' 항목

- 성희엽, <일본 근대국가형성에 관한 학제적 연구>, 부경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2

- 야마다 아키라,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어문학사, 2019

- CCTV 다큐멘터리 제작진, <강대국의 조건: 일본>, 안그라픽스, 2007

- 박상후, <메이지유신을 이끈 카게무사: 막후의 인물>, Freedom & Wisdo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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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당시에 일본 지식인 계층들은 대부분 탈아론, 서구화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이쇼 시대로 넘어가면서는 이와 함께 자유주의 사상이 발달하였는데 이처럼 근대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비록 아시아주의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식인들과 관료 같은 엘리트 집단들은 번벌 정치 세력이든 자유민권운동가든 상관 없이 대체로 서구적인 근대 국가를 지향했었다.

그러나 다이쇼 시대가 저물고 쇼와 시대가 오면서 혼란을 틈 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을 흔히 '쇼와 유신'이라고 불리는데 쇼와 유신의 이념적 기반을 만든 대표적인 인물로는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가 있다. 먼저 기타 잇키라는 인물은 국가주의 운동에도 적극 뛰어들기도 했으며 당시 국가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뚜렷한 신념과 이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타 잇키의 사상은 그가 쓴 <국가개조안>이라는 책에서 잘 나타는데 간단하게 그의 이념을 얘기하자면 사회주의[1]와 아시아주의(탈구입아), 국가주의, 군국주의 등이 결합해 나타난 형태라고 볼 수가 있다. 국가개조안에 나온 주장들을 살펴보면 대충 산업 국유화, 화족제 폐지, 계엄령 시행, 토지개혁, 사유재산권 제한 및 계획경제화, 천황의 힘을 이용한 헌법 정지 등이 나와있는데 기타는 저런 국가개조 정책을 일본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펼쳐서 내지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며 완전한 내선일체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개조 작업을 통해 일본의 부국강병을 이뤄낸 후에는 외부로 나아가서 영국과 미국 등의 서구 열강에게 맞서 싸워서 아시아 전체를 해방시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재밌는 것은 기타 잇키의 이념은 황도파[2] 청년장교들의 경전이 되었는데 정작 기타 잇키 본인은 천황을 자신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었기에 2.26 사건 실패 직후 총살될 때 다른 인사들과는 달리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타는 분명 사회주의자였지만 혁명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닌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카와 슈메이도 기타 잇키와 함께 쇼와 유신의 주역으로 손 꼽힌다. 오카와 슈메이는 서양화와 대결해 정신적으로는 일본주의, 국내 경제는 사회주의 계획경제, 외교적으로는 만주와 몽골을 지배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는데 이는 국가개조론자인 기타 잇키 뿐만 이사와라 간지나 도조 히데키 같은 관동군, 통제파[3] 장교들과의 생각과도 일치했다. 오카와 슈메이는 그래서인지 5.15 사건에 연루되어 9년 형을 받고 3년간 복역한 후 출소했지만 그럼에도 태평양전쟁 발발 전후로 대동아공영권을 홍보하며 앞장섰다. 결국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도쿄전범재판에 기소되었지만 재판 과정에서 도조 히데키의 뒤통수를 손으로 때리는 등의 기행을 저질러서 정신장애 진단을 받아내 재판에서 빠져나갔다.

어쨌거나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의 독특한 사상(?)은 혼란기 일본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니시다 미쓰기를 중심으로 한 청년장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기타 잇키, 오카와 슈메이 등의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으며 정당정치가들과 기성재벌, 화족 계층에게 적대하고 테러와 쿠데타 같은 폭력적이고 과격한 수단을 통해서 뒤엎고 국가개조를 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3월 쿠데타 음모와 혈맹단 테러 사건, 5.15 사건, 그리고 2.26 쿠데타 사건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목표는 거창하지만 성공 이후에 할 대책이 전혀 없었고 열정은 쓸데없을 정도로 넘쳐났지만 이성적인 판단력은 많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또한 황도파 내에서도 육해군 대립 때문에 해군 청년장교들과 육군 청년장교들의 사이는 좋지 않았으며 실제로 5.15 사건 때 해군 청년장교들은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뿐만 아니라 육군 청년장교들의 리더인 니시다 미쓰기도 죽일려고 했다. 해군 청년장교들이 니시다를 싫어했던 이유로는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이 계획이 육군 청년장교들이 가담하지 않았던 것을 그의 책략이라고 판단했으며 두번째는 니시다가 정보를 누설하면서 계획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청년장교 운동을 지원하는 민간 지식인들의 분열도 커다란 문제였다. 사쿠라 회가 주도한 10월 쿠데타 음모가 헌병대에게 발각된 것은 다나카의 수기에 의하면 기타 잇키와 니시다 미쓰기는 입헌정우회에게 오카와 슈메이는 천황 측근에게 정보를 누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가 서로 동상이몽을 꿈꾸며 쿠데타를 계획한 것이었으며 거기다가 이 사건 이후로 계획에 동참한 참모장교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 청년장교들은 그들과 결별해버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군 고위층의 확고한 지지가 중요한데 이 일 이후로 황도파 세력은 고위층의 확고하고 통일된 지지를 받지 못했고 그게 청년장교 운동의 실패 요인 중 하나였다.

결국 최후의 발악으로 황도파 청년장교들은 2.26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천황은 오히려 진압을 명령했고 졸지에 그들은 황군에서 반란군으로 신세가 바뀌었다. 병들과 부사관들은 투항 후 원대복귀 조치가 되었으며 계획을 주도한 청년장교들 중 일부는 자결했지만 상당수는 총살되었다. 이때 기타 잇키도 2.26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붙잡혀서 처형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살아있는 한 그의 사상이 계속 영향을 끼쳐서 비슷한 일들이 반복될 수 있기에 미리 죽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황도파 청년장교 운동과 쇼와 유신은 처음에는 열정이 넘쳤지만 끝은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주장은 훗날 일본 군부 체제에 적극 수용되었다. 통제파 세력이 중심이 된 군부는 혁신관료 및 신흥기업가 같은 테크노크라트 집단과 연합해서 정치권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경제는 통제적인 계획경제로 바뀌면서 일본은 하나의 완결적 생활권과 국민경제를 갖춘 고도국방국가로 변화해갔다. 또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동남아 침공과 태평양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가 원하던대로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전쟁까지 치르게 되었다.

이처럼 비록 황도파 청년장교 운동과 쇼와 유신은 실패로 끝났지만 결과적으로는 다른 의미로는 성공하게 된 독특한 케이스라는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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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는 마르크시즘적 공산주의보단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의 사회주의자인 페르디난트 라살레가 주장한 것으로 국가 권력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는 내용의 이념이다. 이게 나온 이유는 19세기 시절 초창기 마르크시즘은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소멸을 지향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마르크스는 생전에 라살레의 사상을 반대했다고 한다.

다만 20세기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공산주의 이념의 주류가 되면서부터는 사실상 국가사회주의 범위 안에는 들어가게 되었다. 또 여담이지만 국가사회주의는 National socialism, 즉 나치즘이라고 잘못 번역된게 자주 보이던데 국가사회주의에서의 '국가'는 State이지 Nation이 아니기에 State socialism은 나치즘은 아니며 National socialism은 국가사회주의보단 민족사회주의로 번역하는게 더 맞는 표현이다.

[2] 황도파는 국가주의, 전체주의, 집산주의, 대외팽창주의를 추구하는 정치 체제를 수립하려고 한 청년장교 세력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기존 정당정치가들과 기성재벌, 부패 관료들을 척결하고 천황이 중심이 된 국가를 만들어 국가개조를 한 뒤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해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폭력적인 수단을 지나칠 정도로 마구 사용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 군부 내에서도 과격파 집단에 속했었다. 그러나 2.26 사건의 실패로 사실상 몰락했으며 그 후로 일본 군부의 주도권은 통제파 장교들이 가져가게 된다.

[3] 통제파는 황도파에 비해 군내의 법률통제의 의미로부터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며, 황도파와는 다르게 확실한 지휘 체계가 존재하지 않고 초창기 핵심이었던 나가타 데쓰잔도 군내에서의 파벌 행동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 황도파 계열의 느슨한 연합체 파벌 정도로만 여겨지기도 했었다.

다만 나가타 데쓰잔이 죽고 2.26 사건으로 황도파가 와해되자 통제파는 권력을 잡았고 그러면서 점점 정부 문제에 개입하더니 고노에 후미마로가 총리에 취임한 후부터는 아예 일본 제국의 실세가 되어버렸다.

* 참고 자료:

- 한상일 <쇼와 유신>, 까치, 2018

- 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2002

- 권성욱 <중일전쟁: 용,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2014

- 마쓰모토 겐이치 <기타 잇키>, 교양인, 2010

* 3편은 '쇼와시대로의 변화(3): 군부 체제와 테크노크라트 그룹'이라는 제목으로 1930년대 말부터 1945년 패전까지 일본을 이끌던 정치권력 계층에 대한 자세한 부분을 작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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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급 항공모함은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고정익 항공기용 항공모함이다. 총 4척(키예프, 민스크, 노보로시스크, 바쿠)이 건조되어 1980년대 동안 태평양함대에 배치되었고 소련 해군의 교리에 맞추어 대함미사일 등 다량의 무장을 탑재했는지라 함재기 탑재량은 상당히 적었다고 한다.

대공미사일은 SA-N-3 Goblet 미사일을 탑재하고 있고, 대함미사일은 SA-N-12 Sandbox 미사일, 대잠미사일은 RBU-6000, RBU-12000 어뢰발사관을 장착하고 있다. 러시아의 키예프급 항모는 중순양 항공모함(heavy aircraft carrying cruiser)으로, 미국과 영국의 전용 항공모함과 달리 순양함과 항공모함을 조합한 형태다. 따라서 대수상, 대잠전 수행 능력, 대공 전투 능력까지 보유한 항공 중순양함이었다.

그리고 키예프급의 다량의 무장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돈 문제였다. 공산권 국가였던 소련은 자유진영인 미국에 비해 경제력이 딸릴 수 밖에 없었는데 그건 즉 항모전단(호위함선 포함) 유지비도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소련 해군은 항공모함을 원했기에 결국 절충안으로 나온게 바로 키예프급 항공모함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해체로 러시아가 경제난을 맞게 되면서 키예프급 항모도 더 이상 운용이 불가해졌다. 그래서 러시아는 키예프급의 2번함인 민스크와 노보로시스크를 약 30억 원대의 가격으로 한국 민간기업에게 팔아넘겼다. 이때 고철로 넘어간 항모들은 김영삼 정부의 방침에 따라 다시 한국형 항모로 개조될 계획까지 있었다고 한다.

김영삼 정부가 키예프급에 눈독을 들였던 이유는 독도 분쟁과 북괴 해군과의 대치 둘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해군은 고정익기는 커녕 헬기모함 운용 경험조차 없었고 해리어 기를 함재기로 선택할 경우 탑재할 수 있는 항공기가 20기 정도 밖에 안되었기에 한계는 명확했다.

거기다가 한국의 항모 구입 소식은 일본 언론에도 집중 보도되었는데 그러면서 미국도 동아시아 해군 경쟁 악화를 우려해 한국의 항모 구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북괴의 후원국인 중국은 당연히 말할 것조차 없이 반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러시아는 키예프급 항모 내에 있는 전자장비와 무기들을 전부 파괴한 뒤 한국에 넘기기로 계획을 바꿨다.

한국에 넘긴 뒤 포항으로 간 노보로시스크 호는 방사능 물질 운운하는 시민단체의 반발로 상당기간 지연된 뒤 해체되었고 민스크 호는 중국에 재매각 되었다. 다만 그래도 항모 해체 과정에서 설계도면이 유입되고 항모갑판 재질, 내열처리법 같은 항공모함 건조에 필요한 지식들을 군에서 습득했다는 점에서 비록 한국형 항모로 재개조하진 못했지만 나름 의의는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1401100020

- http://en.wikipedia.org/wiki/Kiev-class_aircraft_carr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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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17일, 폴란드 제헌의회는 중대한 과업을 종결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했던 이념보단 보수적이고 민족민주당과 우익 세력들이 지향했던 이념보다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헌법이 탄생했다. 이 헌법에 따라 보통선거제도와 상하원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 시기 폴란드에서 상원은 법안을 발의할 수 없었지만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을 거부할 권한이 있었고 하원의 55%가 다시 가결하면 상원의 거부권을 뒤집을 수 있는 등 체제는 나름 민주적으로 작동했다. 하원에서 최대 득표율을 거둔 정당은 총리를 디명하고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으나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없어서 한동안 연립정부가 불가피했다.

한편 새 헌법은 민족주의 견제 목적에서 '민족' 대신 '시민'의 개념이 자리잡았다. 여기에 개별적인 시민에 우선하는 민족의 이해관계와 요구를 강조하는 민족민주당은 헌법이 끈끈하고 동질적인 문화적 공동체로서 민족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 실망했다. 또한 가톨릭 교회들도 헌법이 가톨릭을 유대교나 비가톨릭 교파와 동등한 일개 교파로 추락시켰다고 비난했다.

좌파 역시 헌법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들은 1918년 독립 국가 건설 과정에서 이룬 성과가 헌법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보편적인 시민 권리, 무상교육, 국가 지원 등에는 만족하면서도 이 내용들이 자본주의 복지국가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헌법 99조에서 사유재산을 "사회체제와 법질서의 가장 중요한 토대 가운데 하나"라고 선언해 보상 없는 몰수나 재분배를 금지한 것에 대해 반발했다.

1922년 사회당은 농민당과의 단일화로 가브리엘 나루토비치를 간신히 대통령에 선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루토비치는 그리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는데 1920년 공공행정 장관직을 맡으며 성과를 많이 내고 특정 정치 세력의 등을 업지 않았던 것이 지지 확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하자마자 민족민주당은 새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으며 '폴란드의 다수파'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 유대인과 다른 '외국인들'을 대변하는 정당의 득표로 선출되었다고 주장했다.

폭력이 계속 난무하는 가운데 1922년 12월 11일,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대통령은 취임식을 했다. 하지만 나루토비치는 닷새 뒤 바르샤바 미술관 전시회 개막식에 참여했다가 민족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에게 암살당했고 친민족민주당 성향의 언론들도 나루토비치 암살을 옹호했다. 암살 직후 의회는 다시 소집되어 3분의 2라는 다수의 득표로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가 두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권력은 곧 민족민주당을 비롯한 우익 세력에게 넘어갔고 폴란드군 참모총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1923년 5월 29일, 민족민주당을 비난하며 사퇴 후 두 번째 아내인 알렉산드라 슈체르빈스카와 함께 바르샤바 인근의 술레우베크으로 가며 은퇴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폴란드 정국은 여전히 안정을 되찾지 못한 채 혼란에 빠졌고 그렇게 짧았던 민주주의는 종말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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