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막부의 군대 개혁
1860년 이후부터 막부는 본격적인 서구식 군대를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막부 육군이 창설된다. 막부 육군은 보병대, 기병대, 포병대 중심의 삼각편제를 채택했고 병과는 전열보병과 경보병으로 나누었다. 병력 모집 방식은 하타모토들을 통해 쌀 생산량에 따라 농민병사들을 차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월급은 1인당 10냥 이상이었고 장교단은 상급무사들이 주도했다. 조슈 정벌 등 실전에도 투입되었는데 이때 막부군은 전장식 소총의 한계와 낮은 사기, 몇몇 번들은 출병 거부 때문에 조슈 번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 후 새로운 쇼군으로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다시 한번 군대 개혁에 나선다.
먼저 육군 총재직 신설 등으로 기존 부교 중심의 군 지휘계통을 개혁했고 친위대도 증강시켰다. 1867년에는 징집 대신에 자금 납부를 통한 병력 모집을 채택했는데 이를 통해 막부 측에서 아예 납부된 자금으로 병사들을 고용하는 체계가 막부군에서 자리잡게 된다. 그러면서 보신전쟁 발발 약 1년 쯤에는 2만명이 넘는 병력과 48개 대대를 보유한 서구식 군대로 변하게 된다.
또한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초빙하기도 했는데 이 군사고문단에게 지도를 받을 부대인 '전습대'(덴슈타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고 전습대에게 지급할 무기로 당시 최신 무기였던 샤스포 소총이 일본에 수입되었다. 전습대는 주로 상급무사들 위주의 인적 구성이었고 연대가 최대 단위였던 다른 막부군 부대와는 달리 전습대는 대대가 최대 단위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부군은 전반적으로 사기와 충성심이 낮았다. 그 이유는 바로 막부군 내부에 있었는데 장교단이 상급무사들이고 사병들은 평민이나 하급무사인 구조 때문이었다. 이러다 보니 통일성과 단결력은 떨어졌으며 충성심도 크게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2. 사쓰마 번 군대의 근대화
한편 사쓰마 번은 경제적 사정이 좋았다. 막말기 사쓰마 번은 번정 개혁을 통해 채무 정리 및 교역 확대로 재정을 안정시킨 것은 물론이고 쌀 생산량 규모도 나름 좋았었다. 그 와중에 새로운 다이묘로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집권했는데 그는 난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사쓰마 번은 근대화 정책에 나설 수 있었다.
시마즈 가문 주도로 사쓰마 번은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식 대포를 도입시키고 서구식 총대를 만들었다. 흑선 내항 사건으로 일본이 완전 개항한 후에는 아예 군수 시설들과 반사로 및 용광로, 정련소, 방직 공장 등을 비롯한 서구식 공장을 세웠다. 거기다가 개혁을 위해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하급 무사 출신들을 적극 등용하는 파격적인 행보도 보였다.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개혁 덕분에 사쓰마 번은 1854년에는 10문의 대포를 갖춘 서구식 해군 군함인 쇼헤이마루를 건조하는 것을 성공했다. 사쓰에이 전쟁 후인 1866년에는 육군과 해군 지휘계통을 개편했고 대대와 소대 개념을 수용했다. 1860년대에는 영국을 통해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을 도입하는 등 프랑스군을 롤모델로 삼은 막부군이나 프로이센군을 롤모델로 삼은 사가 번과는 달리 사쓰마 번은 확실하게 영국식 군대를 지향했다.
3. 조슈 번 군대의 근대화 개혁
조슈 번도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보낸 학생들이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근대화 정책에 나섰다. 당시 조슈 번은 무사계급을 중심으로 보병, 포병, 기병 3개 병과를 도입한 서구식 군대를 만들었고 신식 화기와 군함도 도입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 동시에 군사 관련 책들도 수입해왔고 신식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실시시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다가스키 신사쿠 같은 번 내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무사가 아니라도 입대가 가능한 기병대(기헤이타이)를 비롯한 제대들이 생겨났다. 당니 시모노세키 전쟁 패배를 통해 서구열강의 힘을 깨달은 다가스키 신사쿠는 양이를 과감히 내려놓고 존황과 도막을 위해 서구 열강의 우수한 군제와 기술을 수용하기로 결단을 내렸었다.
기병대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군대였었으며 훈련 역시 강도가 높았다. 편제는 보병대와 포병대로 나뉘었었는데 이처럼 신사쿠 주도로 신식군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조슈 번의 다이묘인 모리 가문이 다가스키 신사쿠에게 믿고 맡겼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1866년에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삿초동맹'을 결성하면서 조슈 번은 사쓰마를 통해 서구 열강으로부터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과 암스트롱 포를 수입해올 수 있었다.
이러한 군 개혁 덕분인지 막부의 조슈 정벌에서 조슈 번 군대는 막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당시 막부군은 주로 전장식 소총이 상당수 였었고 병사 개개인의 사기도 낮았지만 반면에 조슈 번 군대는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 같은 후장식 소총들을 나름 보유하고 있었는데다가 실전 경험도 조슈 번 내부 분열로 겪어본 상태였다.
이러니 연사속도와 사거리가 딸리는 전장식으로 무장한 막부군이 패배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전투 직전에 조슈 번은 서양 진법을 바탕으로 삼아 전번 일군 체제로 정비했다. 화승총을 교체하기 위학 신식 소총들을 사들였고 150명 단위의 전술부대를 편성시켜서 효율적인 군대 조직을 만들었기도 했다.
4. 메이지 신정부의 군제개혁
1868년 보신전쟁에서 승리한 메이지 정부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주도 하에 한동안 육군은 프랑스식, 해군은 영국식 체제를 유지했었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을 시찰하며 중앙 집권식 군 체제에 영감을 받은 온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병부소보에 취임하면서 일본 육군은 독일식으로 개편되기 시작했다.
1872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정부에 군비 의견서를 제출하고 유럽의 군제를 본 떠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태정대신이 '징병령'을 발표했으며 일본제국의 징병제는 복무기간 3년의 상비군과 2년의 후비군, 국민군으로 분류되었다. 병과는 보병, 포병, 기병, 공병, 치중병 총 5개로 나뉘었다.
1882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발발한 이후 일본 정부의 대외팽창 노선이 본격화 되면서 제국군도 치안유지용에서 침략을 위한 군사력으로 개편되어갔다. 육군력 중심인 보병 연대는 1878년에 15개였지만 1884년에 3개, 1885년에 4개, 1886년에 5개, 1887년에 1개 추가되어 모두 28개 연대가 되었다.
또한 기존 6개 진대 편제는 1888년에 이르어 보병연대의 상급기관으로서 제1사단부터 제6사단까지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명칭 변경이 아닌 군제개혁의 중요한 요소였다. 이렇게 편성된 사단들에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보병, 기병, 포병, 공병의 각 부대와 탄약과 식량을 수송하는 치중병부대, 부상자의 이송과 치료를 담당하는 위생대, 야전병원 등으로 이뤄졌다.
5. 일본 제국군의 '독일식 화력주의' 사상
앞서 말했듯이 일본제국군은 메이지 신정부 초기부터 독일을 모티브로 군제개혁을 했었는데 이러면서 신속한 기동으로 소총, 포병 화력을 집중시켜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식의 '독일식 화력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0년대 이후 독일의 육군 소령 멕켈을 초빙해 독일 육군의 전략, 전술을 습득해왔다.
그렇다면 일본 제국군이 독일식 화력주의를 수용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세이난 전쟁의 경험이었다. 세이난 전쟁 당시 사쓰마 반란군은 일본제국군을 향해 '발도돌격'으로 백병전을 시도했지만 일본제국군이 전장식 엔필드 소총에서 후장식 스나이더 소총으로 교체하면서 집중사격 앞에 차례로 쓰러져갔는데 이를 통해 백병돌격의 우위성이 소총 화력 앞에 무너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 후 일본 제국군 내에서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군사학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청일전쟁 이후 1898년에 개정된 <보병조전>은 보불전쟁의 교훈에 따라 만들어진 독일의 1888년도판 <보병조전>을 모방한 것이었고 아예 전략, 전술의 기본을 '몰트케 직역'이라고 할 정도로 독일식으로 깔아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제국군의 군사사상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깨지게 된다.
출처:
- 일본어 위키백과 '막부육군' 항목
- 성희엽, <일본 근대국가형성에 관한 학제적 연구>, 부경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2
- 야마다 아키라,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어문학사, 2019
- CCTV 다큐멘터리 제작진, <강대국의 조건: 일본>, 안그라픽스, 2007
- 박상후, <메이지유신을 이끈 카게무사: 막후의 인물>, Freedom & Wisdom,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