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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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그것도 젊은 여성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이 책부터가 아닐까 한다. 이 년전 독서모임 때 읽었던 책인데 쓰다만 리뷰를 정리하느라 다시 펼쳤다.

지구에게 인간은 그다지 좋은 생명체는 아니다.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은 지구의 멸망보다 기술진보가 우선이었다. 저 어딘가 우주의 질서를 관리하는 어떠한 존재는 지구가 위기를 눈여겨본다. 그 사실을 알았던 저 어딘가의 외계 생명체는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지구별에서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p.102던 한아에게 반해버린다. 어쩜 이리도 로맨틱할 수가.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지구환경에 관한 이야기이고 어리석은 인간을 비판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요즘 워낙 환경이 이슈다 보니 부쩍 그런 점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한아가 하는 일(리폼),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탄소, 고래, 친환경 주택, 비건 레스토랑 그리고 한아가 우주로 도망친 경민을 향해 내뿜던 욕지기들)들 속에서 작가의 지구 사랑을 만나게 된다.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 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p.101


그는 무려 2억 광년 떨어진 거리에서 한아만을 위해 날아왔다. 다행히 끈적이지도, 발이 많거나, 촉수가 있어 혀를 날름거린다거나, 눈이 하나이거나 하지 않은 초록빛을 가진 생명체로 한아 앞에 등장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의 몸을 빌려. 한아의 솔직함에 빵 터졌다. 그러게 이왕 올려믄 정우성으로 오지. 하필.ㅋㅋ

한아에겐 11년째 남친으로 지내오고 있는 경민이 있다. 그는 불쑥 캐나다로 별을 보러 갔다가 별일인채로 돌아왔다. 무심하던 경민의 유심한 행동들과 바뀐 식습관과 사라진 흉터 그리고 경민에게서 언뜻 보았던 이상한 빛. 한아는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숫자를 누른다. 111.

국가정보원 요원 정규와 아폴로의 실종의 단서를 추적하던 주영은 경민의 정체를 알아내려다 마주치게 되고 그 시각 경민은 자신의 존재를 한아에게 고백한다. 진짜 경민이 한아 대신 우주를 택했다는 사실에 한아는 분노하지만 경민을 대신한 외계인의 다정함과 섬세함은 한아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느 날 돌아오지 말았어야 할 경민이 돌아왔을 때 그를 비난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심정이 헤아려진다. 경민은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았다. 그전에도 그의 마음은 사람이 아닌 대상을 향하고 있었다. 현대인들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처럼 들려서 안쓰럽다.

주영에게는 자신보다 더 열정을 불태우던 존재가 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곧 자신의 세계였던 주영은 가수 아폴로가 실종된 이후 그를 찾는 일에 모든 걸 건다. 결국 우주로 날아간 그녀의 끝은 해피엔딩이었지만 그처럼 종교, 이념, 신념이 만든 세계에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한 열정이 타인의 행복을 훼손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응원한다.

외계인 경민이 한아를 선택한 이유를 곱씹어 보면 이런 의미가 아닐까. 지구를 위해 한아와 같은 다정함을 가지라는. 말로만 걱정 말고 실천의지를 불태우라는. 그러면 우리의 지구 역시 랄랄라 하고 계속될 것이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p .217 ​

p.s) 유독 ​장르문학에 상이 야박하다. 어슬러 르 귄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야 한다는데 나도 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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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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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월드에 발을 들이고 그 세계에 빠져갈 때쯤 요 에세이를 선물 받았다. 세랑 작가처럼 지구를 사랑하고자 하면 지구를 사랑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받게 된다. 이런 것이 연대다. 이런 좋은 연대는 현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여행에 목마른 이들이 많을 것이다. 좋은 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값어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다. 작가라면 그런 여행이 더 귀한 자산이 된다. 작가가 비행기를 탄 것은 2012년이었지만 지금에서야 에세이가 출간되었으니 에세이가 그만큼 쉽지 않은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여행의 본질과 여행의 이유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감흥들이 그냥 그저 그런 이야기되지 않도록 다듬는 일에는 내공이 더 필요하겠다. 유명 작가라면 더더욱.

여행 에세이는 어쩔 수 없이 뻔한 흐름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나 여기 갔어요. 이런 사람을 만나고 이런 곳을 보았어요. 그리고 이런 곳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동을 받았어요. 그럼에도 작가의 여행 에세이를 찾게 되는 이유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진짜 놀란건 작가가 기혼자란 사실이었다. 난 왜 작가가 미혼이라고 단정지은걸까. 너무 관심이 없었구만. ㅎㅎ

작가가 생강 알러지가 있다는 글을 보며 세상에는 희귀한 병도 많지만 알러지 반응 또한 그 범위가 다양함을 실감했다. 남편은 생강 알러지는 없지만 생강을 극도로 싫어한다. 작가는 알러지가 있음에도 아헨의 쿠키를 뿌리치지 못하고 고생을 했다고 하니 이 쿠키는 한번 먹여보고 싶다.

작가는 어린 시절 앓았던 병으로 인해 여행을 즐기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살아있다는 것들에 경의로움을 느끼게 한다. 작가의 지구 사랑의 시작은 병에서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여행을 즐기지 않던 작가는 친구의 설득에 넘어가서 뉴욕으로 향했고 어쩌다 친구따라 아헨에 머물기도 한다. 뜬금없이 엄마는 작가의 친구를 보러 가자며 오사카행을 제안했고 안전한 신혼여행지로 타이베이를 선택한다. 정말 놀라운 건 런던을 가게 된 이유다. 우연히 응모한 영화 이벤트에서 1등에 당첨이 된 것이다. 저런 행운이라면 정말 로또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지구에서 한아뿐>에 적어 둔 그런 로또 말고.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p.75


내가 만든 좋은 인연들로 연결된 발자국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웠을까. 행복은 연결망 위에 놓여 있는 듯하다. -p.160 낯선 장소지만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는 즐거움은 또 어떻고. 모든 낯선 풍경들이 선사하는 진기함. 이런 것들을 느껴본 지가 오래된듯해서 살짝 갈증이 인다. 뉴욕에서 방문한 미술관 리스트만 보아도 알차고 새롭게 얻은 취미(주인 잃은 물건 찍기)도 멋지다. 뭐니 뭐니 해도 현지의 음식을 맛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

이야기가 가진 아주 투명하고 여린 힘, 읽는 이의 영혼에 밝은 지문을 남기는 능력에 대해서 멈추어 생각할 때가 있다. -p.373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들의 성격들이 어떤 이유로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니 환경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내가 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안전한 공기층에서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좋은 걸 잘 녹여내는 능력. 그리고 그 글을 잘 흡수하는 독자. 이러한 상호작용이 활발해지려면 많은 이들이 독서를 즐겨야 될 텐데. 책이 다른 매체에 뒤처지는 게 늘 안타까울 뿐이다. 부모님의 예술 사랑 역시 부러운 조건이다. 나도 좋아는 하는데 그걸 아이들과 공유하지 못해 안타깝다.

지구 온도를 낮추는 게 시급해졌다. 분명 지구에는 지구를 사랑하지 않는 지구인도 있다. 지구보다 순간의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에겐 지구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다정하지 않다. 게다가 지금은 여행이 훨씬 더 위험해져서 안전한 걸음을 보장받을 수도 없고 가게 되더라도 타인의 경험이 곧 나의 경험이 될 수도 없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비행기를 타는 일도 썩 편하지만은 않고 관광산업의 난폭함에 일조한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일기도 한다.

그렇다고 방구석 여행이 꼭 답은 아닐 터이다. 그저 일상의 좋았던 것들을 리스트로 적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작가처럼 무언가 늘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것도 닮고 싶은 점이다. 많은 이들의 지구 사랑이 더해져 더없는 다정함으로 지구 곳곳을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여자들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는 작가는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또 현기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잃은 가능성은 결국 인류가 잃은 가능성이 될 확률이 높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마지막으로 여성 장르 작가라는 이유로 악플 테러를 일삼고 맘에 들지 않는다며 집요하게 괴롭히는 이들은 꼭 천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귀신님 엄한 인간들 괴롭히지 말고 저런 인간 좀 잡아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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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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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연주의의 거~~~장! 이라고 불리는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내겐 낯선 작가다. 월리엄 포크너,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영향을 준 '거인'이라는 소개글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오래 잡고 읽으면 팔이 저릿할 정도의 두께감이 있지만 책장이 잘 넘어갔다. 1890년대의 미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러 군상들 중 미모를 겸비한 시골처녀의 도시 상경기이자 성공기를 그리고 있지만 '거친 파도 위를 표류하는 영혼'이라는 타이틀과는 달리 그다지 굴곡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굴곡진 삶을 살다 비극적 결말을 맺은 그가 더 기억에 남는다.

열여덟의 나이에 도시를 찾은 캐럴라인 미버. 도시에 발붙일 동안 머물게 될 언니네는 그다지 형편이 넉넉지 못했고 캐리는 얼른 일자리를 구해서 생활비라도 보태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된다. 도시로 나간 그녀는 화려한 도시가 내뿜는 광채에 넋이 빠지고 자신 역시 그 광채의 구성원이 되리란 환상을 품는다. 하지만 아무런 경험이 없는 아가씨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라곤 단순 노동직뿐임을 깨닫자 도시가 던지는 냉혹한 대우를 견딜 수 없어 한다. 다시 시골로 내려가야만 하는 신세가 돼가던 캐리는 우연히 시카고행 기차 안에서 만났던 바람둥이와 재회를 하게 되고 쾌락을 좇는 강한 열망(돈이란 모두가 갖고 있고 나도 가져야 하는 것. -p.89)이 그녀를 깨운다. 어쩌면 캐리의 행운의 문은 이미 기차 안에서 열린 것일 수도.

여자에게 미모는 타고난 재능이자 얼마든지 삶을 뒤흔들 기회를 제공한다. 캐리처럼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삶의 강렬함에 반응이 빠른 여성이라면 능력 있는 남자가 무조건적으로 내미는 호의를 잘라내긴 어렵다. 지폐 두 장의 유혹도 이겨보려 했으나 드루에가 밀어붙이는 물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택했음에도 드루에의 돈에 묶이게 된 그녀를 보며 씹던 껌 신세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차 그녀에게 색다른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게 그녀에게 두 번째 행운의 문은 연극 무대에서 열렸다.

하지만 인생은 또 다른 관계 속에서 꼬인다. 드루에의 친구였던 허스트우드가 캐리를 품으려고 회사 돈을 훔친 뒤 캐리를 속여 뉴욕행을 감행한다. 이쯤되니 두 남자 사이를 갈팡질팡한 캐리를 비난하게 되는 건 그녀가 드루에의 경제적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의 도시 상경기에 그녀가 자력으로 일구어낸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는 그녀에게 세 번째 행운의 문이 되어준다. 뉴욕은 배우의 꿈을 꾸기엔 최적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행운의 문은 그녀 스스로 연다. 허스트우드의 몰락이 한몫했지만 그제서야 그녀는 도시의 광채 속에서 자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남자들은 선량해야 하며 모든 여자들은 정숙해야 한다. 악인이여, 그대는 어찌하여 실패했단 말인가? -p.126

작가는 유독 캐릭터를 설명함에 있어 정교하다. 그래서일까. 등장인물들에게서 뚜렷한 선과 악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사회적 관습 아래 판단할 뿐이다.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점을 비난할 수 없다.

드루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나의 정복은 얼마나 달콤한가.'

캐리는 불안에 떨며 이렇게 탄식했다. '아, 내가 잃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p.127

더 확대해보면 지독한 바람둥이일거라 여긴 드루에도 캐리에겐 언제나 다정하고 친절했다. 오히려 캐리가 떠남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에게 있어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았으며 돈이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원하는 상대와 즐길 수 있음을 잘 알았다.

허스트우드 역시 사랑에 목이 마른 남자였을 뿐이다. 돈 앞에서 주체할 수 없이 사랑의 욕망이 들끓었을 뿐이다. 작가가 결론 내린 그의 가족의 모습에 동정이 인다. 이런 인물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안 봐도 뻔할 것이다.-p.119

그는 '완벽하게 꾸며진 집'에서 가족들의 지갑으로 지냈을 뿐이었다. 아내에게서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모습이 되려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절박했고 욕망은 강렬했다. 그렇지만 두려움에 약했다. 훗날 캐리가 떠나갔을 때 그녀를 향해 날을 세우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그 정도로 되먹진 않았다.

그렇다면 캐리는 나쁠까. 두 남자를 이용했다기보단 그들이 들러붙은 게 아닌가. 캐리 역시 대놓고 뻔뻔하진 않았다. 어차피 결혼도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함이었지만.

캐리는 여느 여인들이 그렇듯 좋은 옷에게 설득당하고 도시의 여인들의 우아함을 습득한다. 캐리는 선천적으로 흉내를 잘 냈다. -p.144 배우의 자질이 통하는 시점이다.

안정된 부에 대한 안도감보다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 처지를 벗어던질 수 있다는 안도감이 훨씬 크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는게 인간본성이다. 허스트우드에게 욕망의 허기를 들킨 것과 거절을 못 해 스스로 사랑에 빠졌다고 믿어버린 어리석음이 죄라면 죄일 뿐.

가난은 서로를 구차하게 만든다. 사랑의 도피도 가난의 굴레 속에서는 무의미하게 변해간다. 사랑은 여자가 줄 수 있는 전부에요.-p.251와 같은 말은 연극 대사로 만 감동을 줄 뿐이다. 뉴욕에서 허스트우드는 시카고에 있던 캐리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대도시는 많은 것을 품고 있지만 쉽게 내어 주지 않는다. 열망과 희망이 살아 숨 쉬던 전성기는 이미 지났고 경험한 적 없던 궁핍함을 해결해야만 한다.

캐리가 뉴욕의 당당함에 매료되어갈 때 허스트우드는 점점 무너져간다. 조강지처를 버린 대가라기보다는 그 역시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뉴욕의 대거 실직자의 대열에 자신도 끼게 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부가 곧 행복이라고 믿었던 캐리는 벤스 부인의 사촌인 에임스를 만난 후 배우로의 삶에 진정으로 눈을 뜨게 된다. "부자가 된 들 뭐하겠어요. 이런 것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어요." -p.421

그럼에도 캐리는 자신의 성공을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사람들과의 이별.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대도시의 차가움이었다. 운명의 여신이 처음부터 철저히 캐리의 편이었음에도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찾아오는 우울감은 쉽게 떨쳐내기 어려웠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던 그녀가 잠시 변화하는 순간은 무대였을 뿐이다.

나라고 달랐을까. 도덕적 판단은 접어두고 그녀가 쫓은 열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충만한 외적 조건과 내적인 순진함으로 헤쳐나간 시간들이 어쩌면 그녀에겐 최선이었다. 흔들리던 자유의지가 제자리를 찾았을 때 그녀는 욕망의 헛됨을 마주한다. 어리석었던 과거를 치유하는 길은 궁핍한 이들에게 지갑을 여는 일임을 깨닫는다. 그녀의 미래가 추락이 아닌 안전한 착륙이 될 수 있길 바라본다.

오래전 소설이지만 욕망 앞에 드러나는 인간은 본능은 한결같다. 자본주의의 앞면과 뒷면의 차는 지금이 훨씬 더 잔인하고 돈에 살고 돈에 죽는 우리의 삶의 공식은 변함이 없다. 소설에서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운명과 우연의 그 어디에도 진정한 사랑과 샘솟는 행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꿈을 꾼다. 불완전한 우리가 불안정한 미래를 만나 꿈꾸는 그 갈망의 끝이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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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특별판, 양장)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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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해 이 소설도 출간되었다. 남성과 여성의 지배 구조가 뒤바뀐 세상. 이 발상의 전환이 우째 신선하고 통쾌해야 되는데 3분의 1정도의 지점까지 달려오면서도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자연은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며 흘러간다. 제아무리 인간이 그 어떤 동물보다 이성을 앞세워 월등하다고는 하나 절대평등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제도였다. 그럼에도 자연의 불공평함을 치유하는 것은 모든 문명의 임무이기에 그 화살이 여성을 억압하고 눌러왔던 남성이라고 해도 약자를 향한 불편한 감정과 동정 그리고 심지어 연민이 생기기 마련이다.

소설에서 움(여성)과 맨움(남성)이라는 명사만 바꾸면 딱 그것이 과거 여성들의 삶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작가는 작정하고 비꼰다. 그래서 소설 속 성적 표현이 은근히 불쾌하고 저속하다. 헌데 바꿔 생각해 보면 남성이 저지른 수많은 성착취와 성범죄를 떠올린다면 충분히 이런 분위기로 그려질 수밖에 없겠다.

이갈리아는 모계 중심,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모장적 사회이다. 남성은 그저 씨앗만 제공하고 부성 보호를 받은 뒤 가정에 충실해야만 하는 존재다. 음하하. 이게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이갈리아는 그걸 이뤄냈다. 남성의 지배욕과 권력욕을 없애버리고 철저히 여성의 그림자로 살게끔 하기 위해 거세까지 감행하며 남성의 성을 눌러왔다.

그랬기에 여성들의 오만은 극에 달한다. 거침없는 행동에 거부감이 들다가도 여성들의 지난한 삶을 떠올리면 비난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가슴을 맘껏 드러내놓고 거리를 활보하고 월경을 축복받으며 출산을 귀히 여기는 곳에서 당당히 살아간다. 움의 성기는 위대하고 신성한 지혜를 가졌으며 생명을 순환하는 핵심이자 문명의 상징이 된다. 남성들은 여성의 체구보다 크게 성장하거나 가슴 털이 자라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며 부성보호만 잘 받고 아이를 팔에 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무한한 은혜의 대상이자 축복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여자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아이를 양육하며 가사를 책임지는 하우스키퍼의 삶이 전부다.

어떤가. 움에 의해 쓰인 역사가. 그렇지만 무언가 죄다 거꾸로 된 세상에 온 것만 같은 착각도 들지 않는가. 성의 역할이 정확히 구분되고 지켜져야만 하는 세상. 이것이 과연 평등주의(Egalitarianism)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Egalia)로 만들어진 나라의 모습인가. 그렇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

그저 얼마나 여자들이 이가 갈렸으면 이갈리아라고 지었을까하며 농을 던져본다.



분명한 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사회는 균열이 일기 마련이다. 여성들이 여성 스스로의 권리를 찾으려 발버둥을 쳤듯이 이곳 이갈리아의 남성들도 마찬가지이다. 게다 인정되진 않지만 이곳에도 게이와 트랜스젠더가 존재한다. 진정한 사랑은 허울뿐이고 한쪽의 일방적 희생은 사회를 병들게 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유독 페트로니우스에게 연민이 인다. 꿈을 꿔볼 수조차도 없고 개인의 삶을 존중받을 수 없다는 것만큼 맘 아픈 일이 없다. 심지어 그의 엄마조차도 아들의 심적 고민보다는 남성의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대하려 한다.

당시에는 큰 이슈를 몰고 왔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내게는 페미니즘도 유토피아도 아닌 그저 날카로운 풍자소설로 읽힐 뿐이다. 지금도 남혐과 여혐에 관한 여러 이슈나 그런 표현들이 영 달갑지만은 않다. 뜻도 모를 단어들은 왜 그렇게 자꾸만 생겨나는 건지. 그런 이슈를 키우는 게 오히려 언론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페트로니우스는 여친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폭력을 당한다. 그 사실을 아빠에게 울며 고백하지만 아빠도 가정폭력의 희생양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 아빠는 아들에게 충고한다.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말기를.

어쩜이리도 여성들의 삶을 그대로 옮겨 왔을까.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남성들이 아랫도리를 가리기 위해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페호)이 여성의 브래지어와 같은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남성들이 그걸 벗어던지며 자유를 외쳐댈 때 여성들은 혐오의 시선을 던지며 경악한다. 그 우스꽝스러운 장면의 뒷면에는 여전히 '여성답게'라는 관습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씁쓸함이 밀려온다. 노브라를 선언하는 게 왜 욕먹을 일인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역시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페이지였다. 페트로니우스는 엄마 루스에게 오래전 존재했을 가부장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에 대한 엄마의 대답이 압권이다.ㅎㅎ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그녀의 반박. <태고의 시간들>에서 여자들이 나누던 대사가 떠오른다. 여자들만 있다면 애초에 전쟁 따윈 없었을 거라는.

소설이 태어나던 해와 지금의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분명 눈에 띄는 변화는 있다. 그러나 첫 문장 "결국, 아이를 보는 것은 맨움이야." 라는 말을 바꾸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육아는 엄마 몫이다.

"결국, 아이를 임신시키는 사람은 맨움이에요." -p.130 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전히 임신에 대한 책임은 여자 몫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여성의 임신과 출산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이 사회는 여성차별이 곳곳에 존재하고 심지어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해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는 남성들도 있다. 어쩌면 지구가 망하는 그날까지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평등에 한발 더 다가가기 위해 투쟁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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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을 두드리다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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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사랑>을 덮자마자 구매한 장은진 작가의 두 번째 책이다. 단편집인지도 모른 채 제목만 보고 선택했는데 일곱 편의 이야기를 읽은 후의 느낌이라면 인간은 지독하게도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한다는 것이다. 그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기 위해서 비도덕적인 순간을 이용하거나 즐기기도 한다. 내가 예전처럼 FM대로 각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했다면 욕 한 바가지 퍼부어댈 인물들이 더러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단편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빈집을 두드리는 이유>속 주인공이 바깥을 향해 돌을 던지는 행위에 대해, <페이지들>속 주인공이 책 속 페이지를 찢는 행위에 대해, <찾아가는 도서관>속 주인공이 유기견을 잡아다 도살자에게 넘기는 행위에 대해 나름의 변명을 찾게 된다.

전도 유망했던 투포환 선수였던 '나'는 은둔형 외톨이로 전락하여 점점 괴팍해져 가고 있다. 남의 집에서 개를 돌봐주며 빈집을 지킨지도 한 달째.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라면 돌을 던지는 일과 말라뮤트를 골려먹는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의 신경이 깨어난다. 그녀는 그들이 <빈집을 두드리는 이유>를 모아 모아 집주인의 실체를 추리해간다. 그녀인 줄 알았는데 그였던 그를 사려 깊은 사람으로 둔갑시킨 이유가 엉뚱스럽지만 미운 오지랖이라고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그가 걱정이 되었기에.

다이어트를 결심하며 줄어든 장바구니에 대신 돌멩이를 채워 온 '나'는 다시 던진다. 고요한 일상과 편견에 찌든 세상을 향해.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이들의 고충은 얼마나 클까. <나는 나를 가둔다>에서 '나'는 그 잠이라는 행위에 도달하지 못해서 수면 체험실을 찾는다. 판화가인 그에게 꿈은 곧 돈이다. 꿈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다. 그는 꿈속에 자신을 가두는 일을 즐긴다. 희한하게도 그가 특정한 방에서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자 오로지 혼자만의 행위인 이 잠이라는 것도 음양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었나 의구심이 든다. 어쩌면 주파수가 맞는 상대를 만난 건지도.

아버지의 눈밖에 나버린 '나'는 지붕에서 머물다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던 티슈의 정체에 호기심이 인다. 그에게 멀쩡히 흩날리는 티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된다. 티슈와 함께 화단으로 몸을 던진 '그녀'가 '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가버린 전처를 떠올린다. <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덕에 '나'는 위로와 용서와 이해가 작용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방법이 없어서 지붕에서 지내던 그는, "누가 방법을 알려준다면"이라는 문구를 외면하지 못한 순수한 오지랖 덕에 티슈처럼 마음이 가벼워질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보통 사람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삶의 방법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사람이므로, 그래서 다른 삶의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알려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쉽게 생각하고 비난하고 감싸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음으로써 상처 주는 것뿐이다. -p.97


자살한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찾아가는 도서관>을 운영 중인 '나'는 그다지 책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애초부터 그의 목적은 책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떠돌이 개를 잡아 팔아치우고 차 안에서 성욕을 해소하는 역겨운 행동을 일삼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차 안에 어린 비글을 버리고 간다. 그의 양심이 꿈틀댄걸까.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도살업자를 찾은 그는 애초부터 책이 목적이 아니었다던 그의 말에 정곡을 찔린다. 그렇게 찾으려던 목적은 이루었지만 정작 찾아주어야 할 유서는 전하지 못한다. 그토록 기다리던 만남에 반전이 있을 줄이야.

<나쁜 이웃>은 참말로 뜨끔하다. 어쩜이리도 인간의 이중적인 면을 예리하고도 흥미롭게 끄집어 냈을까. 고독사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하에 신고를 감행한 그녀와 이웃 주민들, 그리고 경찰과 열쇠수리공 등의 속마음이 재미나게 드러난다. 중요한 건 할머니의 죽음이 아니다. 각자의 역할이 중할 뿐이다. 그녀에게는 체면이 더 중한 것이고.

책을 찢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분노가 일던 <페이지들>에서는 책의 중요한 페이지를 찢은 뒤 자신의 연락처를 남겨 놓는 것에 의미를 두던 한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어떤 이유였든간에 그렇게 연락오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만난 <페이지들>과의 만남이 무모해 보이지만 신선한 구석도 있다. 어쩌면 당장에 멱살을 잡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다가도 호기심이 발동하게 될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도 통하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호감 가던 그녀에게는 반전의 결과를 선사하고 만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년이 있을 줄이야.

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하는 P는 말로 일기를 쓰는 게 취미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P앞에 <나무인형>같은 떠돌이 책방 주인을 발견하고는 미친듯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책방을 차려놓은 채 하루종일 죽어라 책만 보는 그녀의 사연이 기구? 해서 ㅋㅋ 안쓰러운 것도 잠시, 헤밍웨이를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 모를 수도 있지 않나?

암튼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진짜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한 여자는 이제 P의 역할대행 도우미가 된다. 일기장이라는 역할을.

역할 대행 도우미의 삶을 살던 P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못한 자신이 후회스럽고 이제는 정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차지도 넘치지도 않는 인물들이 갈구하는 외부로의 세상.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문을 두드리고 있음을 보았다. 마지막 단편의 P처럼 좀 더 적극적이고 귀여운 두드림이라면 나도 귀를 기울여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표지그림처럼 두드렸을때 열릴 세상이 저렇게 시원한 바다만 같다면 또 얼마나 좋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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