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본의 근대를 ‘밝은 메이지(明治)’와 ‘어두운 쇼오와(昭和)’로 구분하는 시바 료오타로오(司馬遼太郎)의 NHK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이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메이지 전기의 ‘건전한 내셔널리즘’과 쇼오와 전기의 ‘초국가주의’라는 이항대립사관을 답습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언덕 위의 구름』이나 전후 일본의 마루야마 마사오 식의 후쿠자와 유키찌 연구에서는 왜 ‘밝은 메이지’=‘건전한 내셔널리즘’이 천황제 군국주의의 ‘어두운 쇼오와’=‘쇼오와 전기의 초국가주의’로 연결되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문제의 제기이다. 즉, 『언덕 위의 구름』비판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후쿠자와 유키찌 연구의 그릇된 이항대립사관 비판으로까지 진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문제제기이다. 

1. 『언덕 위의 구름』은 ‘마루야마-유키찌 신화’의 반영 - ‘一身獨立하여 一國獨立한다’의 치명적 오독
  일본의 근대사를 ‘밝은 메이지’ vs '어두운 쇼오와‘로 나누는 시바 료오타로오의 ’사관‘이며 NHK의 ’공전의 초대형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 「소년의 나라」(少年の国)는 예상하고 우려한 대로 ’마루야마 - 유키찌‘ 신화로 시작했다. 이유는 원작 『언덕 위의 구름』에서는 세 명의 주인공(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真之),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이 나오는데, 아키야마 요시후루에게 마사오카 시키가 일본에서 “누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나”라고 묻자, 요시후루는 “나는 만난 적은 없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찌라고 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다”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제1권 159쪽). 즉, 이것은 시바 료오타로오가 마루야마 마사오에 따라서 ’밝은 메이지‘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를 후쿠자와 유키찌로 파악하고 있는 것의 표명이다. 

  우선, 시바의 ‘밝은 메이지’ 대 ‘어두운 쇼오와’는 근대일본을 ‘메이지 전기의 건전한 내셔널리즘’ 대 쇼오와 전기의 ‘초국가주의’로 파악하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잘못된 이항대립사관(다른 표현으로는 메이지 전기가 분별 있는 ‘국가이성의 인식’임에 반해, 쇼오와 전기는 한계를 모르는 ‘황도의 선포’)을 알기 쉬운 표현으로 바꾸어 말한 것을 답습한 것이다. 문제는 ‘메이지 전기의 건전한 내셔널리즘’을 대표하는 사상가로서 마루야마 마사오가 해명한 후쿠자와 유키찌상이 허구의 마루야마의 유키찌상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이미 야스카와 쥬노스케(安川寿之輔)는 『福沢諭吉のアジア認識─日本近代史像をとらえ返す』(2000年)、『福沢諭吉と丸山眞男─「丸山諭吉」神話を解体する』(2003年)、『福沢諭吉の戦争論と天皇制論─新たな福沢美化論を批判する』(2006年)의 저서에서 전후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찌 연구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 마루야마의 후쿠자와 연구가, 장대한 허구의 ‘마루야마 유키찌’ 신화라는 것을 논증하였는데 마루야마 제자들을 포함하여 기본적으로 반론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특히 일본의 매스컴이, ‘마루야마 유키찌’ 신화의 압도적인 영향 하에 있기 때문에, 정설화된 마루야마의 후쿠자와상이 일본사회에서 지금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마루야마 유키찌 신화를 근거로 한 각본에 따라 요시후루가 동생 사네유키에게 “이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책이야”라며 『学問のすすめ』 제3편을 보여주며, “누구?” “후쿠자와 유키찌라는 사람이야. 후쿠자와 선생님이 쓴 이 『学問のすすめ』에는 이렇게 써 있어. ”일신이 독립하고 일국이 독립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하여야 비로소 국가가 독립할 수 있다는 의미야. 나는 돈을 모아 토오쿄오에 나가 학문을 하고, 언젠가 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꿈이다“라고 하는 문답이 있다(1권 104쪽). 이것은 주인공들이 ‘세계사상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근대국가’(8권 94쪽)를 성립시킨 영광의 ‘밝은 메이지’의 제일인자 후쿠자와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 『学問のすすめ』 제3편의 ‘일신이 독립하고 일국이 독립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근대를 ‘밝은 메이지’와 ‘어두운 쇼오와’로 나누는 국민작가 시바의 사관은 본인이 자인하듯이, 원래 ‘어두운 쇼오와’란 관련이 없는 러일전쟁까지의 일본을 ‘편애’한, 잘못된 ‘밝은 메이지’의 역사상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밝은 메이지’라고 하는 편애의 역사상의 단적인 잘못이 텔레비전에서 마루야마식의 메이지 전기의 ‘건전한 내셔널리즘’을 상징하는 정식(定式)인 ‘일신이 독립하고 일국이 독립한다’고 하는 것의 인용이다. 이것은 『学問のすすめ』 제3편의 목차의 두 번째인 「국가는 동등한 것」 「일신이 독립하고 일국이 독립하는 것」의 후자의 인용이다. 목차 자체의 국어적인 의미는 ‘일신이 독립하고 일국도 독립한다’고 하는 의미이다. 문제는 제3편에 대해 후쿠자와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일신 독립’의 내용물이 상식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한다’고 하는 국어적인 의미와는 큰 폭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이 정식의 ‘일신이 독립하고 일국이 독립한다’한다는 것이 기재되어 있는 『学問のすすめ』 제3편에서 후쿠자와 자신이 주장하는 ‘일신 독립’ ‘자유 독립의 기풍’의 내용은 아키야마 요시후루가 이해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독립’이나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개인적 자유’ ‘개인의 자유 독립’ ‘근대적 인간유형’ 등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으며, ‘국가를 위해서는 재물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목숨을 버리는 것도 아깝지 않은’ 국가주의적인 ‘보국의 대의’라는 것이다(후쿠자와의 보국의 대의는 ‘어두운 쇼오와’ 시대의 일본에서 요구된 ‘열사봉공’ ‘헌신몰아’(献身没我)의 애국심이다). 즉 텔레비전 『언덕 위의 구름』은 오류(거짓말)로 시작하고 있다. 일본에는 ‘시작이 좋으면 마지막도 좋다’고 하는 격언이 있다. 『언덕 위의 구름』에 관해서 이 격언은 ‘처음가 거짓말이면 마지막도 거짓말’로 정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를 선명화하기 위해 과감히 지적해 보자. 시바는 대담하게 청일전쟁의 ‘승리의 최대 원인은 일본군 쪽에 없다. 요즘의 중국인이 국가를 위해서 죽는다고 하는 관념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2권 119쪽)라며, 일본의 승인은 일본군인이 ‘국가를 위해서 죽는다고 하는 관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이 기술과 대비한다면 『学問のすすめ』의 정식인 ‘일신이 독립하고 일국이 독립한다’고 하는 메이지일본이 ‘자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바가 청일전쟁의 승인이라고 하는 ‘국가를 위해서 죽는다고 하는 관념’, 즉 멸사봉공의 ‘애국심’ ‘보국의 대의’의 필요성을 후쿠자와가(청일전쟁 20년 이상이나 전에) 선구적으로 주장하고 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대담한 해석의 타당성은 『文明論之概略』마지막 장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우선 자국의 독립을 꾀하고 (일신 독립 등의) 그 외(의 과제)는 그것을 제2선으로 남겨두어 훗날 해야 할 것’이라고 공약했던 후쿠자와가 결국은, 생애에서 귀중한 ‘일신 독립’의 과제를 두고, 청일전쟁을 맞이하자 ‘우리나라 4천만의 사람은 동심 협력하여 최대한의 충의를 다하고,······재산을 들어 그것을 물리쳐야 함은 물론, 노소의 구별 없이 죽음을 불사하고 인종이 다할 때까지 싸움의 각오······내부에 어떤 불평 부조리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는(이른바 ‘건전한 내셔널리즘’이 이런 것인가) 천황제 내셔널리즘과 ‘쇼오와 10년대를 선취한 멸사봉공’의 ‘1억 옥쇄’론의 사설 「일본 신민의 각오」를 쓰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의해 비로소 확인되는 문제이다. 

2. 초기 계몽기의 후쿠자와의 사상은 ‘밝은 메이지’의 ‘건전한 내셔널리즘’이 아니다 -‘어두운 쇼오와’의 ‘훈련된 정치적 백치’
  초기 계몽기의 후쿠자와는 세 번의 서양방문체험을 근거로 국제관계의 현실은 ‘방약무인’ ‘power is right'의 관계라고 인식했다(마루야마 유키찌 신화에서는 국가와 국가는 평등하다). 이 약육강식의 국제관계인식을 전제로 하여 후쿠자와는 일본의 근대화의 강령적 방침을 제시한 『文明論之概略』 마지막 장에서 ’오늘날 일본인을 문명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이 나라의 독립을 지키는 것일 뿐‘이라고 하여 ’자국의 독립‘ 확보를 지상 최우선의 민족적 과제로 설정했다. 그 무렵 후쿠자와가 우수한 점은 ’인류의 약속은 오로지 자국의 독립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한 나라의 독립 등의 작은 일에 개입‘하는 태도는 ’문명의 본지가 아니며‘ 라고 하여 ’문명론‘에 대한 정당한 기본인식을 표명하고 있던 것이다. 즉, ’자국 독립‘ 최우선은 메이지유신 당초의 ’지금 세계의 모양을 헤아리고 지금의 일본을 위해서······지금의 일본의 위급함에 따라‘ 제기한 한정적인 과제설정인 것에 대하여, 그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은 특히 유의하여야 하며 학자 등이 소홀하게 간과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반복해서 주의를 환기하고 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후쿠자와는 메이지유신 당초의 일본에서는 ‘먼저 일의 초보적 단계로 자국의 독립을 도모’하고 (일신독립과 같은) 그 외(의 과제)는 제2선으로 남겨두고 후일 도모한다고 서술한 것이다(후쿠자와가 『文明論之概略』의 저술을 생각한 것은 1874년 3월경이고, 정식 ‘일신․일국독립’의 『学問のすすめ』 제3편을 집필 간행한 1873년 12월에는 『文明論之概略』의 근대화 구상과 그 수순은 이미 의식하고 있었다고 추측 가능하다). 계몽기 후쿠자와의 사상이해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치명적인 오류는 후쿠자와 본인이 ‘자국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일신독립’의 과제는 ‘제2선으로 남겨두고 후일 도모한다’고 공약했음에도, 마루야마가 정식에서 ‘일신독립’과 ‘일국독립’의 두 가지 과제는 ‘민권론과 국권론의 내면적 연관이라는 것이 가장 선명하게 정식화할 수 있다’고 하고, ‘개인적 자유와 국민적 독립, 국민적 독립과 국제적 평등은 완전히 같은 원리로 관철되어 있으며, 훌륭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근대 내셔널리즘에 아름답고도 박명(薄命)한 고전적 균형의 원리’로 결론지은 사실이다. 

  마루야마의 오류는 기술한 것처럼, 『文明論之概略』 제3편의 정식에서 ‘일신독립’이 ‘자국독립’ 최우선의 과제에 보기 좋게 조응하여, ‘나라를 위해서는 재물을 버릴 수 있으며,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 아깝지 않다’는 ‘보국의 대의’이며, 이 정식에서는 ‘일신독립’이나 ‘민권의 확립’의 과제는 아무런 것도 논해지지 않을 정도로 무시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이전의 모든 선행 연구자가 마루야마의 이 결정적인 오류를 추종했다. 후쿠자와 본인이 ‘일신독립’의 과제는 ‘훗날 도모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데, ‘일신․일국독립’이 ‘훌륭한 밸런스’라든가 ‘아름답고도 박명한 고전적 균형’ 운운하면서 해석하는 것은 조야함의 극치다. 더불어 후쿠자와는 ‘자국독립’ 확보 최우선은 ‘지금의 세계의 모양’에 맞은 한정적인 과제설정이며 ‘자국독립’ 확보는 ‘문명론 속에서 사소한 하나의 조항’이라고 하는 뛰어난 역사인식을 제시하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은 특히 유의하여야 하며 학자 등이 소홀하게 간과할 우려‘가 있다고 단정함에도 마루야마 등이 그것을 ’소홀하게 간과‘한 것은 사상가 후쿠자와에 대한 실례의 극한이다. 

  이상에 의해 ‘일신독립’의 과제를 보류하고 재고한 ‘일신․일국독립’론이 ‘건전한 내셔널리즘’의 정식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어두운 쇼오와’에 연결되는 ‘밝은 메이지’의 허구는 마루야마에 의한 ‘일신독립’론의 오독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라고 하는 『文明論之概略』 머리말의 구절과 『学問のすすめ』의 내용이 사상적으로 괴리하고 있다(그러니까 후쿠자와는 ‘~라 한다’고 전문태(伝聞態)로 표현했지만, 마루야마는 그것을 무시)고 하는 중요한 사실을 선구적으로 지적한 코마쯔 시게오(小松茂夫)는 『ファシズム期における日本軍国主義と一般国民の意識』라는 귀중한 논고를 남겼다. 

  '어두운 쇼오와’기의 일본인 남성은 노동자, 농민뿐만 아니라 지식인까지 소집영장 한 장에 의해서 자신의 생명과 인생이 좌우되는, 그러한 국가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거대한 힘을 가지는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떠한 원인이나 이유에 의해 존재하는가 하는 ‘국가의 본질, 기원, 존재이유’에 대한 물음을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 했다고 하는 충격적인 사실을 시게오는 해명했다. ‘어두운 쇼오와’기에 일본인이 국가의 존재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고 하는 사실에 조응하는 것이 후쿠자와의 『学問のすすめ』에서의 국가관이다. 이 경우도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에게 정부 혹은 정치권력의 존재근거는 기본적 인권의 옹호에 있었다”고 파악하고 있지만, 이것도 마루야마 유키찌 신화이다. 

  후쿠자와는 미국의 독립선언을 스스로 번역하여 ‘그 통의(通義, 기본적 인권)란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보유할 자유를 요구하는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생명, 자유, 행복추구’의 기본적 인권을 선언하고, 나아가 ‘인간이 정부를 세우는 소이는 이 통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취지로 정부의 처치가 이 취지로 돌아갈 때는 곧 그것을 변혁하거나 그것을 엎어버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도 역시 인민의 통의이다’고 번역하여 정부의 존재이유, 존재근거가 기본적 인권의 옹호에 있으며 정부가 그 존재이유에 반하는 경우에는 인민에게 ‘저항권․혁명권’이 있다는 것도 바르게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다. 문제는 후쿠자와가 그 독립선언에 따라 『学問のすすめ』 제2편에서 일본의 인권선언을 행한 경우에는 ‘사람들 천성의 권리통의는 어느 경우에나 동등하여 한 치의 경중도 없으며, 그 권리통의란 사람들의 생명을 존중하고 재산 소지를 보장하며 명예를 소중히 하는 것이 대의’라고 하여, 미국의 인권선언과 대비하면 ‘자유’가 ‘명예’로 바꿔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문제점으로 정부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는 조직이라는 중요한 정부의 존재이유를 소개․주장하지 않고, 따라서 기본적 인권으로부터 ‘저항권․혁명권’도 의도적으로 제외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상의 국가구상에 대응하여 후쿠자와는 ‘오늘날 일본 내에 메이지의 연호를 받드는 자는 정부에 따라야 한다는 조약(사회계약)을 맺은 인민’이라는(『学問のすすめ』 제2편) 명백한 허위를 전제로 ‘국법은 부정불편(不正不便)하여 누구라도 그것을 깨뜨릴 이유가 없다’(제7편)는 일방적인 국법에 대한 복종․준법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세금을 지불하는’(제7편) 자발적인 납세의 의무를 설파했다. 즉 ‘자유’와 ‘저항’의 자연권을 부정하고 정부의 존재이유를 불문에 붙인 후쿠자와는 메이지정부에 대한 국민의 복종의 내면적 자발성을 환기하기 위해 사회계약사상을 환골탈태한 것이다. 이처럼 후쿠자와의 수많은 한계․제약은 기술한 ‘일신독립’의 과제는 ‘제2선으로 남겨두고 후일 도모한다’고 공약한 『文明論之概略』에서의 일본의 근대화의 강령적 방침과 대비함으로써 용이하게 설명된다. 즉 초기 계몽기의 후쿠자와사상을 대표하는 정식인 ‘일신이 독립하고 일국이 독립한다’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시대의 국제관계 아래에서 지상 최우선의 ‘자국의 독립’ 확보를 우선 아프리오리한 전제과제로 상정하고, 국가나 정부의 존재이유는 묻지 않은 채 인권선언에서는 자유권이나 저항권을 누락시키고 ‘국가를 위해 재물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한 목숨을 포기하는 것도 아까와 하지’ 않는 국가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보국의 대의’를 요구한 것이다. 

3. 중기 후쿠자와의 보수화 -강병부국의 아시아 침략노선과 ‘우민을 농락하는’ 천황제의 선택
  자유민권운동과 조우한 후쿠자와는 훗날 ‘일신독립’의 과제에도 임한다고 하는 계몽기의 귀중한 공약에 등을 돌려 1875년 ‘국권가분(國權可分)의 설’에서 ‘오늘날 정부도 인민도 오로지 자유 한쪽으로만 향할 뿐’이라고 하는 명백한 허위를 주장하는 것과 동시에, ‘무지의 서민’에 대한 계몽의 단념을 표명하고, 다음 해부터 ‘종교의 필용(必用)’을 말하기 시작한 이후, 생애 백편이 넘는 논고에서 하층민중을 위한 종교 교화노선에 몰두했다. 또한 1878년의 「통속 민권론」, 「통속 국권론」의 동시 간행에서 민권진영을 ‘무뢰배의 소굴’로 비난한 후쿠자와는 다음 해의 「민정 일신」에서 모델인 구미 ‘선진’제국이 사회주의․노동운동으로 ‘낭패를 당하여 방향을 헤맨다’고 하는 새로운 현실인식을 더하는 것에 의해, 1881년 「時事小言」과 다음 해의 「황실론」에서 역사적 현실주의의 ‘청탁병탄’(清濁併呑)노선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부동의 보수 사상을 확립했다. 이것은 자국의 독립확보는 ‘사소한 하나의 조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뛰어난 역사인식 위에서 ‘일신독립’을 ‘훗날 도모한다’고 하는 계몽기의 유일하고 귀중한 공약의 포기이며 일본 인민과 『文明論之概略』 독자에 대한 명백한 배반이다. 

①강병부국과 아시아 침략노선
  ‘일신독립’을 포기하는 보수사상의 확립은 필연적으로 아시아인식의 전환과 (‘부국강병’이 아닌) 강병부국의 대외 강경노선, ‘밖의 고난을 알고 내부의 안녕을 유지한다’는 권모술수적인 ‘내위외경’(内危外競)(田口卯吉) 노선을 후쿠자와로 하여금 선택하게 했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을 호기가 도래한 것으로 본 그는 강경한 군사개입을 주장했으며, 스스로 쿠데타의 무기제공까지 담당한 갑신정변에서는 천황 ‘친정’과 북경공략까지 요구하는 지나치게 격렬한 개전론 때문에 후쿠자와의 「時事新報」는 발행정지 처분까지 받았다. 

  「시사소언」에서 아시아 침략노선을 제시한 후쿠자와는 다음 해 「조선과의 교제를 논한다」에서 ‘조선국이 미개하다면 그를 유도하여 이끄는 것이 가능하고, 그의 인민이 완고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그 나라의 진보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명’으로 유도한다는 명목으로 침략을 합리화했다(부시 대통령의 아프간을 침략할 때 ‘야만에 대한 문명의 전쟁’도 같은 논리다). 즉 조선이 ‘완고’하다는 것이 무력행사의 용인․합리화로 연결된다고 하는 제국주의적인 ‘문명의 논리’이다. 그 결과 그는 조선․중국에 대하여 멸시․편견․마이너스 평가를 내린다. 그것이 임오군란․갑신정변 전후의 ‘조선인은 미개한 백성으로 지극히 어리석고 흉포하다’, ‘조선인은 완미하고 거만하며 무기력하고 무정견하다’, ‘중국 인민의 겁약 비굴은 실로 불합리함이 비길 데가 없다’, 중국인은 마치 거지와 같다‘ 등과 같은 발언이다. ’명예‘를 최대의 인권으로 평소 주장하는 후쿠자와가 조선인은 영국과 러시아의 지배 하에서 ’평생 내외의 치욕‘을 감내한다는 모멸적인 사설을 써서, 「時事新報」(의외로 알려지지 않지만, 후계지가 현재의 산케이(産經)신문이다)는 또 다시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1885년 ‘탈아론’은 그 직설적인 제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도발적인 후쿠자와의 아시아관이다. 그러나 ‘잔혹 불염치한’ 조선과 중국이 ‘수년이 지나면 망국이 될 것’은 필연으로서 ‘탈아’ 일본이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 하여’ 양국의 제국주의적 ‘분할’에 참가를 제언한 그 내용은 이 시기의 후쿠자와에게는 부동의 국책이다. 그 때문에 아시아 침략을 목표로 하는 당시의 후쿠자와는 동시대인에서는 ‘허풍장이 후쿠자와, 거짓말쟁이 유키찌’로 조롱받았으며, 특히 요시오카 코오키(吉岡弘毅, 前 外務権少丞)는 ‘우리 일본으로 하여금 강도국(强盜國)으로 변해야 한다고 하는 술책‘인 후쿠자와의 길(즉, 일본의 강병부국 근대화 노선)은 ’구원받을 수 없는 재화를 장래에 남길 것이 분명한 일‘이라고 신랄한 비판(난징대학살, 원폭투하 등 비극의 예고)을 했다. 즉, 후쿠자와는 전후 일본의 마루야마 유키찌 신화로 일약 유명하게 되었고 최고금액 지폐(1만엔)의 초상까지 되었지만, 후쿠자와를 직접 보고 있던 메이지의 동시대인은’허풍장이 후쿠자와, 거짓말쟁이 유키찌’로 간파하고 있었다. 메이지와 전후 일본인의 어느 쪽의 눈이 정확한가는 흥미 있는 의문이다. 

② ‘우민을 농락하는’ 기술로서의 신권 천황제의 선택
  계몽기의 냉정하고 비판적인 천황제 인식에서 보면 분명한 허위의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만민 열중의 진정’, ‘황실의 존엄은 향후 천만년도 같다’고 하는 주장을 시작한 후쿠자와는, 1882년 「황실론」에서 ‘나라의 안녕’ 유지를 위해서는 일본국민이 ‘수백 천 년 이래 군신정의의 공기 속에서 살아온 자라면 정신도덕의 부분은 다만 이 한 가지 점에 의지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文明論之概略』의 마지막 장에서 주장한대로 그는 ‘권력편중’ 사회의 ‘천황숭배’의 총동원에 착수했다. 그리고 계몽기와는 반대로 그는 지금 ‘우리 황실은 일계 만세’라고까지 표명하여 보수적인 천황숭배학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후쿠자와는 천황제를 ‘우민을 농락하는 사기술의 하나’로 조소하는 ‘서생무리들’은 ‘정치의 간난에 조우하면 민심 알력의 참상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비판하고, 국회개설 후의 ‘정당 알력의 불행’에 대비하여 ‘인심수렴의 중심이 되고 국민정치론의 알력을 완화’하는 ‘만세무결’한 황실의 존재가 필요하며, ‘우리 일본의 인민은 지금 중심으로 폭주(congestion)하여 안으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밖으로 국권을 넓히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즉 후쿠자와는 확실히 ‘우민을 농락’하는 사술(알기 쉽게 표현하면 ‘바보 같은 국민을 홀리는 사기의 정치장치’)로서의 신권 천황제를 주체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천황제의 본질을 ‘우민을 농락’하는 사술로 간파한 ‘개명한 지식인’인 후쿠자와가 「황실론」첫머리에서 ‘황실은 정치 외부의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당연하다. 국회 개설에 의해서 ‘정당의 경쟁이 상당히 극에 달하는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황실이 왼쪽을 돕고 또한 오른쪽을 비호하는’ 일이 ‘유리한 계책에 아닐 수 없는’ 것은 분명하고, 황실은 일상적으로는 ‘정치 외부’에 있고 ‘정치의 위에서 하계에 강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천황제 구상의 의도와 목적에 대해서 6년 후인 1888년 「존왕론」에서 후쿠자와는, 황실이 ‘정치라는 열계(熱界)를 떠나 멀어질수록 그 존엄과 신성함의 덕은 높아지게 되고, 그 완해조화(緩解調和)의 힘도 역시 크게 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 공덕을 무한하게 알릴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의 외부라 할 뿐이다’라고 하여 ‘정치 외부’론의 진심을 솔직하게 쓰고 있다. 즉 그에게 천황제의 ‘경세의 이익’, ‘공덕’이 판단기준의 열쇠이며, 따라서 전시처럼 ‘일단 완급을 조절하면서’(교육 칙어), 천황제의 ‘공덕을 무한’으로 발휘하기 위해서 천황이 직접 ‘정치 내부’로 나와(청일전쟁 중의 히로시마 대본영에서의 메이지천황과 같이) 전쟁의 선두에 서는 것은 당연했다. 이 천황제의 교묘한 사용구분의 구상에 대해 후쿠자와는 ‘고학(古學) 유파의 충용의열(忠勇義烈)’주의를 ‘진가의 보도’로 비유하고, 청일전쟁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4. 『언덕 위의 구름』이 은폐하고 그리지 않는 후쿠자와(=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사상적 자취
  아키야마 요시후루가 ‘제일 위대하다고 생각한다’는 후쿠자와 유키찌의 사상에 입각해서, 마루야마 유키찌 신화와 『언덕 위의 구름』에 의해서 숨겨져 있는 ‘밝지 않은 메이지’ 일본의 실제의 자취를 열거해보자. 후쿠자와는 근대일본 최대의 보수주의자이며, 그가 ‘어두운 쇼오와’시대의 훌륭한 사상적 선구자인 것이 이하 11가지 논점에 걸쳐서 해명․논증될 것이다. 

①제국주의강국 일본의 미래 전망
  아시아 침략의 강병부국 노선을 제기한 「時事小言」의 다음해인 1882년의 연재사설 「동양의 정략」에서 후쿠자와는, ‘인도와 중국의 토인 등을 제어하는 것은 영국인이 하는 것을 따를 뿐만 아니라, 그 영국인도 궁하게 하여 동양의 권력을 우리가 장악하고’, ‘일장기를 동양에 휘두르고 일장기를 멀리 서양 제국에까지’라고 하여 대영제국에 비견하는 제국주의강국 일본의 미래상을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청일 전쟁에 승리한 만년의 후쿠자와는 ‘지금 이웃나라인 중국과 조선도 우리 문명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일생의 유쾌함이며 기대 이상의 결과’, ‘국가의 위세를 세계에 휘날려 대일본제국의 무게감을 이룬 것은 마치 꿈같다’, ‘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유감스러운 일은 없을 뿐만 아니라 유쾌한 일만 있다’고 하여 경박하게 자신의 인생을 총괄하고 있었지만, 그 장대한 미래 전망 때문에 ‘사실을 말하자면 청일전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일본외교의 서막’에 지나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다. 

②‘만주와 몽고는 우리나라의 생명선’ 발언의 선구자 -제멋대로인 제국주의적인 ‘대국주의’
  많은 역사서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의 캐치프레이즈인 ‘만주와 몽고는 우리나라의 생명선’론의 원형은 1890년의 야마가타(山縣有朋) 수상의 ‘외교정략론’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3년이나 빠른 1887년의 논설 「조선은 일본의 번병(藩屛)」에서 후쿠자와는 ‘지금 일본을 지킴에 있어서 마지노선을 정해야 하는 지역은 반드시 조선지방’이라고 선구적으로 주장하고 있다(후쿠자와의 일본=‘동양의 맹주’론은 ‘대동아공영권’의 ‘맹주’사상의 선구). 『언덕 위의 구름』도 이 후쿠자와 발언은 누락하고 있지만,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문명 단계 속에서 조선은 일본의 생명선이 되는 것이다’ (3권 68쪽), ‘일본은 유신에 의해서 자립의 길을 선택한 이상, 이미 그 때부터 타국(조선)의 희생 위에 우리나라의 자립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3권 173쪽)라고 제멋대로이고 자국중심적이며 제국주의적인 ‘대국주의’의 아시아 침략 노선을 자명한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최초의 대외출병인 대만출병에 반대(후쿠자와는 환영)하여 해군경(海軍卿)을 사직한 카쯔 카이슈우(勝海舟)가 ‘일본․청․조선 삼국합종’을 주장한 것처럼, 동시대의 일본인 중에서도 ‘소국주의’나 아시아 연대를 주장하는 사람은 있었다. 『언덕 위의 구름』에 대한 비판세력이 지적하듯이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아시아 침략이 필연이었던 것이 아니고, ‘일본의 외부에 일본의 행동의 환경으로서 제국주의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행동 그 자체가 제국주의를 전개시키는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다’(木畑洋一)고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③제국헌법=교육칙어를 찬미하고 ‘사상․양심․신앙의 자유’ 탄압에 가담 -‘히노마루․키미가요(日の丸・君が代) 강제로의 길
  대일본제국 헌법을 ‘완전 무결’, ‘완벽하게 아름다운 헌법’으로 무조건 찬미하고, 교육칙어의 발포를 ‘감읍’하여 환영하여 학교에서 ‘인의효제충군애국의 정신’을 관철시키도록 요구하는 사설을 쓰게 한 후쿠자와는 다음 해의 우찌무라 칸조오(内村鑑三)의 교육칙어 배례기피 사건을 계기로 ‘교육과 종교의 충돌’ 대논쟁, 즉 근대일본 여명기의 ‘사상, 양심, 신앙의 자유’의 탄압․유린이라고 하는 사태에 논설주간 후쿠자와는 완전 침묵을 통해 신권 천황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이것은 ‘일장기․일본국가’ 강제로 상징되는, 지금 ‘일신독립’을 달성할 수 없는 현대일본의 정신적 풍토의 길을 연 후쿠자와의 죄업이다. 후쿠자와는 헌법발포 다음날부터의 연재 사설에서 일본인은 ‘수천 년 간 손윗사람에게 복종하여 그 통제를 받아’ 온 역사에 의해 ‘순종․비굴․무기력’의 성격․기질을 ‘선천적 성질’로서 형성하고 있으며, 이 ‘순량’(順良)한 성향을 오히려 ‘우리 일본인의 특색’으로 찬미하고 이 국민성에 의거하여 이후의 근대일본의 자본주의적인 발전을 낙관적으로 전망했던 것이다. 

④‘멸사봉공․일억옥쇄’의 ‘일본신민의 각오’ -어두운 쇼오와의 전의 고양론
  청일전쟁을 맞이하자 후쿠자와는 거국일치의 전쟁협력을 호소하는 논설 「일본신민의 각오」를 썼다. 후쿠자와는 ‘우리나라 4천만은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가능한 한의 충의를 다하고, 일이 급박해지면 재산을 헌납하는 것은 물론 노소 구별 없이 죽을 때까지 싸울 각오’를 호소하며 ‘우리들의 목적은 오로지 전쟁에서의 승리에 있을 뿐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우리 동포인 일본인들이 세계에 대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쾌한 일이 되므로 내부에서 어떠한 불평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쿠자와의 주장이 아시아 태평양전쟁기의 전의를 고양하는 ‘전쟁선동론’과 동일하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 논설에서 후쿠자와가 국민의 거국일치의 전쟁협력을 천황에 대한 ‘충의’의 명분으로 요구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루야마 유키찌 신화는 후쿠자와의 그것은 ‘충군 내셔널리즘과는 완전히 이질’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오류를 드러냈다.  

  일본인에게 ‘유례없는 연면(連綿)한 황통’, ‘신성무비’의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만민의 지극한 정성’이라는 것이 후쿠자와의 ‘진충’(盡忠)론이며, 전쟁을 직접 담당하는 병사의 경우는 ‘제실을 위하여 진퇴하고 제실을 위하여 생사를 결정한다고 각오를 정하고 비로소 전진(戰陣)을 향해 한목숨을 다한다’, ‘천황폐하 만세’의 황군정신이었다. 「제실론」(帝室論) 이후 ‘우리 대원수이신 폐하의 위엄과 성덕을 삼군의 장병은 폐하 앞에서 죽음의 각오를 하고 출진하는 날은 죽음을 결의하는 날’이라고 주장해 온 후쿠자와가 개전을 맞이하여서 ‘충용의열’(忠勇義烈)을 주창하고 ‘인심의 결합을 도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후쿠자와의 천황제론에 대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다른 하나의 치명적 오류는 「제실론」의 ‘政治社外’론을 ‘그 핵심은 일체의 정치적 결정의 세계로부터 보류’로 오독한 것이다. 후쿠자와 자신은 「존왕론」에서 ‘정치라는 열계(熱界)를 떠나 멀어질수록 그 존엄과 신성함의 덕은 높아지게 되고, 그 완해조화(緩解調和)의 힘도 역시 크게 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 공덕을 무한하게 알릴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의 외부라 할 뿐이다’라고 ‘정치사외’론의 진의를 솔직하게 쓰고 있다. 따라서 ‘일단 완급’할 때의 지론인 ‘정종의 보도’로서 1884년 갑신정변이나 청일전쟁 시에 천황의 해외출진의 ‘친정’발언을 한 것은 자연스러우며, 1993년 정부의 군비확장이 ‘전가의 보도’로서 유명한 ‘군함칙유’를 발하여 ‘군국주의 강화를 위해서 천황의 직접적인 정치관여가 이루어졌을’(遠山茂樹) 때, 후쿠자와가 ‘감읍’하여 환영한 것은 당연했다. 나아가 그가 전쟁이라는 최대의 정치무대에서 히로시마 대본영의 천황의 전쟁지도를 절찬하고 ‘충의’의 이름으로 전쟁협력을 호소한 것은 천황의 최대의 정치적 이용과 참여 그 자체이다. 전후 민주주의시대에 후쿠자와의 단순명쾌한 ‘우민농락’의 천황제론을 오독하고 면죄부를 주고 옹호한 마루야마의 전후책임은 여지없이 크다. 

⑤조선왕궁 점령, 뤼순학살사건, 민비암살, 운림학살사건 -난징대학살로 가는 길
  『언덕 위의 구름』은 ‘밝은 메이지’, ‘메이지의 영광’을 묘사하기 위해 조선왕궁 점령, 뤼순학살, 민비살해, 운림학살사건이라는 청일전쟁의 불의와 폭거를 상징하는 사건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이 (러일)전쟁을 통해 전대미문일 정도로 전시국제법의 충실한 준수자로 일관했는데, 그 이유는 에도문명 이후의 윤리성이 메이지 시기의 일본국가에 남아있었기 때문’(7권 218쪽)이라는 황당한 거짓말을 하고 있고, 뤼순에 대하여는 학살사건이 아니라 ‘뤼순이라는 곳은 두 번(청일․러일전쟁)에 걸쳐서 일본인의 피를 대량으로 흡수했다’(2권 107쪽), 즉 뤼순 탓에 많은 일본군사가 희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쓰고 있다. 

  이에 대해 후쿠자와는 네 개의 사건을 오로지 은폐․옹호․합리화․격려하는 최악의 전쟁보도를 했다. 개전 전의 조선왕궁 무력점령에 대해서는 사실을 은폐한 다음, 국왕 자신의 의지에 의해 민비정권에 대신하는 대원군의 정권복귀라고 소개했다. 민비살해에 대해서는 군의 ‘왕성 난입’은 소년배의 ‘야외 유흥’에 지나지 않다고 시치미를 떼며, 왕비암살이라고 하는 중대범죄에 대해서는 민비가 살해당해도 당연한 인물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날조해 미국신문에 게재하려고 획책했다. 영국과 미국의 「타임즈」, 「월드」지 등에 세계적으로 보도된 1894년 11월의 뤼순 학살사건에 대해서 후쿠자와는 사실을 은폐하는 길을 선택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수상과 무쯔 무네미쯔(陸奧宗光) 외상 등의 방침에 추종하여 사건을 ‘실로 근거도 없는 오보이며 거짓말’이라고 전면 부정했다. 후지무라 미찌오(藤村道生)가 『日淸戰爭』(岩波新書)에서 지적하듯이, 뤼순 학살사건의 책임이 불문에 붙여지고 후쿠자와 등 신문인이 거기에 가담하는 것에 의해서 일본의 전장에서는 ‘그 후 이런 종류의 행위를 연발시키게 되었고’ 확실히 훗날의 난징대학살로 가는 길을 부설하는 역할을 완수했던 것이다. 

⑥사유물 강탈을 권유 -『언덕 위의 구름』의 ‘일본군은 약탈하지 않았다’의 거짓말
  청일전쟁 최초의 전투인 조선왕궁 점령 때부터 ‘하이에나를 압도하는 약탈행위’가 일본군의 전통이 되고 있는데(中塚明『歴史の偽造をただす』高文研、白井久也『明治国家と日清戦争』社会評論社), 『언덕 위의 구름』은 러시아군을 ‘이웃마을에까지 밀고 들어가는 무장 도적단’(3권 369쪽)이라든지 ‘기독교국가 군대의 무차별한 살륙과 약탈의 굉장함은 근대사상 유가 없을 정도이다’라고 쓰면서도, ‘일본군만은 한 사람의 병사도 약탈을 하지 않았다’(2권 385쪽)고 하는 거짓말을 태연하게 쓰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 사설에서 청나라 병사를 ‘돼지새끼, 겁쟁이’라고 매도한 후쿠자와는 이틀 후의 글에서 북경의 일본병사들에게 사유물의 강탈을 권유했다. “부디 이번은 북경의 금은보화를 긁어모아 돌아오도록 해라. 고서화, 골동, 주옥, 진기 등도 많으면 한밑천이 된다.” 

⑦야스쿠니(靖国)신사의 군국주의적 정치이용의 선구 -전장에서 죽는 것의 행복
  청일전쟁 후,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벼운’ 일본군의 ‘정신’이 청일전쟁 승리의 ‘본원’으로 판단한 후쿠자와는 다가올 다음 전쟁을 의식하여 ‘다시 방패와 창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면 무엇에 의지하여 나라를 보위할 수 있는가’를 묻고, ‘호국의 시급한 일’로서 이 정신을 ‘무한한 영광을 전사자 및 그 유족에게 줌으로써 전장에서 죽는 행복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송구하지만 대원수이신 폐하 스스로 제주가 되시어’라고 하고, 야스쿠니 신사의 군국주의적인 정치이용에 대해서도 선구적인 주장을 하고 있으며, 1개월 후의 야스쿠니 신사의 임시 대제(大祭)에는 ‘송구스럽게도 천황폐하의 친림’이 실현되었다. 

⑧‘한국병탄’의 가능성을 예고 - 일본은 ‘청국이나 조선을 점유해야 한다’
  이미 뤼순의 점령도 끝나고 청국이 강화전권의 파견을 통보해 와 승리의 전망이 보이던 1895년 1월의 논설에서 후쿠자와는 ‘주권 운운 하는 것은 순전히 독립국에 대한 논의이며, 조선과 같은 경우에는 적용할 수 없다. 지금 일본의 국력을 고려하면 조선을 병탄하는 것은 대단히 용이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자국에 유리한 바가 있다면 조선병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시사하는 것이며, 생전의 후쿠자와가 1910년의 ‘한국병탄’의 가능성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언덕 위의 구름』에서는 청일전쟁에 대하여 ‘조선을 영유하자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조선을 다른 나라가 취했을 경우, 일본의 방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 전쟁은 청나라나 조선을 영유하려고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다소간 수동적이었다’(2권 49쪽)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무쯔 외상의 훈령, 『蹇蹇録』, 참모본부가 편찬한 「메이지 27~8년 청일전쟁사 결정초안」 등에 근거하여 ‘수동성’이나 ‘영유’ 의도가 없다는 논리가 오류임을 논증하여 비판할 수 있다. 이것은 이하의 후쿠자와의 발언도 마찬가지이다. 개전 직전인 1894년 7월의 논설에서 조선 ‘개혁’을 논했을 경우 그것이 조선의 ‘주권을 유린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조선침략을 세계의 ‘문명의 진보를 위한’ ‘지당한 천직’이라고 후쿠자와는 주장했다. 또한 전시 중 발언에서도 조선의 ‘문명개진’을 위해서 ‘국무의 실권을 우리가 잡는 것’이나, ‘싸움에 이겨 토지를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 를 자명한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대만 정복전쟁 때의 ‘대만의 처분은 모든 식산흥업을 일본인의 손에 의한 경영’, ‘대만의 토지는 몰수하여 섬 전체를 관유지로 한다’도 마찬가지이다. 

⑨아시오동산(足尾銅山) 광독(鉱毒)사건의 진압을 주장하고, 의화단진압 전쟁출병을 기뻐한 후쿠자와
  일본의 진로를 둘러싼 분기점의 해로서 주목받는 1900년, 일본에서는 2월 아시오동산 광독사건에서 극도의 탄압이 이루어진 ‘카와마타(川俣)사건’이 일어나 타나카 쇼오조오(田中正造)가 ‘백성을 죽이는 것은 국가를 죽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멸망하지 않을 나라는 없다’는 유명한 ‘망국’연설을 했다. 3월 치안경찰법을 제정한 일본정부는 6월 중국의 반제국주의 투쟁인 ‘의화단’ 진압을 위한 8개국 연합군의 출병했는데, 제국주의국가들의 ‘첨병․극동의 헌병’으로서 일본은 가장 많은 2만 2천의 병사가 출동했다. 유이 마사오미(由井正臣)가 『田中正造』에서 지적하듯이, ‘광해 피해민을 비롯해서 자본주의 발전 하에서 고통 받는 민중을 발판으로 이 시점에서 일본은 제국주의를 향해 크게 방향을 선회했다’. 피해농민의 대중적 청원행동을 ‘정부는 단연 직권으로 처분해 조금도 가차 없이 해야 한다. 그 불법행위는 결코 허락될 수 없다’고 탄압을 요구한 후쿠자와는 청일전쟁 승리를 ‘외교의 서막’에 지나지 않다고 경고하고, ‘광독문제는 일러문제보다 선결’이라고 하면서 천황 직소까지 감행한 동시대의 타나카 쇼오조오와는 대조적이며, 의화단 진압을 위한 북청사변 출병을 ‘세계에 대해 일본의 위엄을 보이는 것’이라면서 제국주의 열강에의 동참을 기뻐했다. 

⑩‘종군위안부’ 구상과 후쿠자와 -이제는 후쿠자와=남녀평등주의자가 정설?
  만약 후쿠자와가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에 살아 있었다면, 일본군 성노예(‘종군위안부’) 구상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첫 번째 이유로 후쿠자와는 가부장제적인 차별적 여성론을 체계화한 인물이며(마루야마 유키찌 신화에서는 후쿠자와가 ‘부인 예속 타파’를 주장한다고 함), 특히 ‘인간사회에는 창녀가 없을 수 없다. 경세의 눈으로 본다면 오히려 그 필요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매매춘 공창제도에 대한 적극적 찬성논자이며, 그는 ‘천업부인(賎業婦人)의 해외 돈벌이를 허가하는 것이야말로 유리한 계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로, 후쿠자와는 아시아에 대한 멸시와 모멸의식을 선도한 인물이며, ‘내 일생의 목적은 다만 국권이 커지는 것 하나’, ‘일본인이라는 인종이 다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하는 그의 전쟁승리에 대한 비정상적인 열의를 보면, 그 지상목적을 위해서 (야만스러운) 아시아 여성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을 것임은 충분히 예상된다. 세 번째, ‘원래 군사의 성질은 엄명에 속박당하고 은혜와 위력에 복종하게 하면, 상사에게 비굴해지지만 오히려 더 공을 세운다’고 하는 후쿠자와의 황군 병사 구상을 상기하자. 니우케쯔 아쯔시(纐纈厚)의 『侵略戦争』이 ’육군성 통첩‘을 분석한 것을 보면, 위안소는 ’엄명‘ 하의 ’비굴한 군인‘, 후쿠자와가 말한 ’과잉이기까지 한 계급차별‘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의 ’군대질서에 내재하는 모순을 모두 은폐한‘ 사탕으로, 황군은 ’말하자면 사탕과 채찍의 구분사용에 의하지 않고서는 군대로서의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비참한 조직이었다고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⑪후쿠자와의 아시아 멸시관과 ‘어두운 쇼오와’ 시기의 일본병사 -왜 아무렇지도 않게 중국인을 죽였는가
  콘도오 카즈(近藤一, 토오쿄오 고등법원에서 중국여성의 강간을 포함한 스스로의 전쟁범죄를 고백․증언)는 『ある日本兵の二つの戦場』(社会評論社)의 증언에서 후쿠자와의 가르침이 계승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 죽이면 조작도 없을 것’, ‘중국인은 돼지보다 못하다’, ‘조선국은 국가가 아니며, 중국은 제2의 조선으로 자신의 나라도 치료할 수 없는 열등민족’, ‘북경토벌 때마다 민가의 금품을 빼앗아라’. 그는 자신이 죄의식 없이 중국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소학교 때부터 중국인은 돼지보다 못하다고 하는 일본사회의 멸시관 탓이며, 이(후쿠자와가 선도한) 중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맺음말 -만엔권에서 후쿠자와를 삭제하라
 일본의 최고금액 지폐(만엔)의 초상을 장식하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찌는 아시아에서는 조선의 ‘근대화 과정을 유린하고 파탄나게 한 우리민족 전체의 적’(한국), ‘가장 증오해야 할 민족의 적’, ‘제국주의적 확장논자’(대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선구적으로 다루어온 윤정옥(尹貞玉)씨도 ‘일본의 만 엔권에 후쿠자와가 인쇄되고 있는 한, 일본인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후쿠자와가 이와 같이 아시아로부터 비판․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일본인은 거의 모른다고 하는 참혹한 사실인데, 이것은 마루야마 유키찌 신화가 그만큼 강력하게 일본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