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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ㅣ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평점 :
※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분야: 인문 에세이
어렸을 때부터 예민하다는 소리를 듣고는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외부 자극에 대한 민감한 편이다. 특히 내가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건 사람들의 악의다. 물론 예민해서 안 좋은 상황을 미리 피한 적도 있지만 별일 아닌 것에도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내가 만성 피로인 이유.) 그리고 여기, 나보다 훨씬 민감하게 인간의 악의를 감지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서경식 교수다.
아무런 위험이나 위협이 없는 경우 예민함은 오히려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자질이 될 수도 있다. 외부 자극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예술 등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서는 당연히 아무 일도 없는 날보다는 무슨 일이 있는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예민한 사람은 거의 항상 피로를 느낀다.
예민함은 타고나는 걸까, 학습되는 걸까. 내 생각에는 둘 다인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고 동시에 눈치를 살펴야 하는 양육 환경에서 자랐다. 이 중 어떤 게 나의 예민함을 형성하는 데 더 영향을 미쳤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예민하지 않은 성격을 타고난 사람도 일상이 무너질만큼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 특정 주제에 대해 아주 예민한 성격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 교수의 선천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재일한국인이라는 신분과 가족이 정치범으로 수감된 경험이 예민함이라는 자질의 개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서경식 교수님의 타계 소식이 큰 충격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근 몇년간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얀마 내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은 이미 불안으로 넘실거리는 저자의 마음에 연쇄폭발을 일으켰을 것이다.
서경식 교수는 평생을 폭력에 반대하며 싸워왔다. 나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예민한 사람과 싸움이라니. 그것도 승산이 거의 없는... 그런 거대한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점이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다.
이 책을 읽으며 서경식 교수님이 좀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프리다 칼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겠지. 그러나 에드워드 사이드와 마찬가지로 이제 서경식 저자는 이제는 생전에 출간한 저작물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은 미국이 가진 양면적인 모습을 그 누구보다 예리하게 그려낸 인문 에세이다. <여는글>에서 역자가 말했듯 정말 서경식 저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예민한 사람의 눈은 돋보기와 같아서 추악함도 아름다움도 선명하게 포착한다.
빛만이 있는 세계, 어둠만이 있는 세계. 둘 다 평면적인 모습의 세계일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빛도 있고 어둠도 있기 때문에 입체적이다. 세계는 정말 완전한 어둠으로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림자가 점점 더 짙어지고, 길어지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아메리카의 선한 면을 기억하려 애썼던 것처럼 나도 세상의 밝은 부분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