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동 이야기
조남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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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집'에 대한 욕망을 그린 콘텐츠가 많은 편이다. 일단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떠오르고, 작년에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도 생각난다. 이런 콘텐츠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에게 집은 단순히 먹고 자고 쉬는 곳 이상의 개념이다. 어떤 동네,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가 그 사람의 경제적 자산의 기반이 되고, 정치적 입장을 정하며,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고, 개인적 욕망을 좌우한다.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가 2022년 발표한 연작 소설집 <서영동 이야기> 역시 한국인들의 집을 둘러싼 욕망을 다룬다. 


서영동 주민들이 애용하는 인터넷 카페 '서사사(서영동 사는 사람들)'에 어느 날 '봄날아빠'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인물이 글을 올린다. 육아를 위해 영끌을 해서 아내의 부모님이 사는 서영동의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밝힌 그는 그동안 서영동 옆동네는 매매가가 1억이나 오른 반면 서영동은 그대로라며 중개업소의 가격 담합을 의심했다. 이 글은 곧 카페 회원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사람들은 논란의 제공자인 봄날아빠의 정체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대체 누가 집값이라는 예민한 문제를 대놓고 건드린 걸까. 


여기까지만 보면 집값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일 것 같은데, 소설은 '집값'보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주목한다. 가정의 실질적인 가장은 자신인데 결혼할 때 부모님이 집을 마련해준 남편의 눈치를 보고 사는 유정, 겉보기에는 자수성가한 가장이지만 실제로는 부동산 투기로 돈을 모은 아버지를 어떻게 봐야 할지 갈등하는 보미, 자신의 학원 옆에 노인복지시설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다가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경화, 힘들게 자가를 마련했는데 윗집의 층간소음 때문에 고통받는 희진 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읽는 내내 몰입이 잘 되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결혼 후 아버지 소유의 집에 사는 걸 내내 죄스러워 했던 보미가, 알고 보니 그 집이 아버지 소유가 아니라 남동생 소유인 걸 알고 대분노하는 장면이다. 부모에게 집을 물려받은 남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의 차이가 가족 내 남녀의 지위 차이를 만들고 가족 간 불화를 야기하는 이야기가 보미의 이야기라면, 결혼 생활을 망치는 이야기는 유정의 이야기이다. 둘 다 <82년생 김지영>의 연장선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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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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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성애자 시스젠더 여성이지만 성소수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관심이 많다. 비장애인이지만 장애에 대한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다. 이런 나를 소개하면 어떤 사람들은 "당사자성도 없으면서 왜 그런 걸 공부하느냐"라고 묻는다. 대답할 말이 궁했는데, 김승섭 교수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읽고 답을 찾았다. 당사자성이 없으니까(모르니까) 알고 싶고, 알고 싶으니까 공부하는 거라고.


김승섭 교수는 주로 장애인,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저자는 비장애인 이성애자 기혼 유자녀 남성으로, 자신이 연구하는 문제에 대한 당사자성이 없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부교수로 재임 중인 이력 등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도 특권층에 해당한다.


저자 역시 당사자성이 없는 문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과 회의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런 저자가 임상의사가 아닌 보건학자의 삶을 택한 건, 가난과 가정폭력으로 인해 우울증이 생긴 게 분명한데 약으로 치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스스로 처했던 사건에 대해 말하는 데 필요한 언어를 가지지 못한 걸 보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이야기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했고, 자신이 그걸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동자 등 한국 사회에서 아픔을 겪고도 아픔을 말할 수 없었던 존재들에게 응답하고 그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겪은 문제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연구는 샘플 확보부터 어렵다. 힘들게 샘플을 확보해도 샘플 수 부족을 사유로 다른 연구에 밀려 지원이나 정당한 평가를 못 받을 확률이 높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문제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 심사자가 비장애인, 비성소수자, 남성이라면 적확한 심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고통을 상기하는 일 자체가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조사 항목에서 어떤 내용을 삭제한 적도 있다. 윤리적으로는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하지만, 학문적으로는 그것이 잘한 결정이었는지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으로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지만, 학자로서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약자, 소수자의 이야기가 주로 '비참함의 언어', '슬픔의 언어'로만 공유되는 것을 경계한다. 비참하고 슬픈 면이 있는 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 책도 다루는 문제는 복잡하고 심각한 것이 많지만, 책 자체는 (저자가 오랫동안 공부한 내용을 몇 시간만에 읽어버린 게 미안할 정도로) 어렵지 않고, 다 읽고 나서 뭐라도 해보고 싶어진다. 지금의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무엇일까. 이 문제의 답을 찾는 것이 올해의 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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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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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린드버그는 비행기로 대서양을 착륙 없이 단독으로 횡단한 세계 최초의 인물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업적인데 그때 당시, 특히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공에 열광하며 찬사를 보냈을지 짐작도 안 된다. 오늘날로 치면 스포츠 스타나 할리우드 배우를 능가하는 인기와 명성을 누렸을 것이고, 어쩌면 그러한 인기와 명성을 발판 삼아 정계에 진출했을지도 모른다(트럼프처럼?). 필립 로스가 2004년에 발표한 <미국을 노린 음모>는 찰스 린드버그가 1940년 미국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누르고 대통령이 된다는 설정의 가상 역사 소설이다. 

미국의 영웅인 린드버그는 사실 나치 추종자이고 반 유대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히틀러를 만났고, 히틀러에 대해 "그는 의심할 여지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분명 독일 국민을 위해 큰일을 하고 있다."라고 코멘트했다. 1939년 일지에는 "뉴욕 같은 곳에는 이미 유대인이 너무 많다. 소수의 유대인은 나라를 강하고 특색 있게 만들지만, 유대인이 너무 많으면 무질서해진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유대인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라고 썼다. 1941년에는 미국을 떠밀어 전쟁에 몰아넣으려는 가장 유력한 집단 가운데 하나로 유대민족을 거론했다. 

소설은 그런 린드버그가 고립주의와 친 파시즘을 표방하며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을 공약에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필립은 보험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비서로 일하는 어머니, 그림을 잘 그리는 형을 둔 아홉 살 소년으로, 린드버그가 당선되기 전까지는 주민 대부분이 유대인인 마을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린드버그가 당선된 후 아버지의 직장 생활에 이상이 생기고, 그림밖에 모르던 온순한 형이 달라진다. 사촌 형 앨빈과 이모 이블린의 신상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소설에 따르면 반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전 세계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고 하지만, 필립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맞벌이를 해서 겨우 네 식구가 먹고사는 평범한 가정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몰라도, 필립과 필립의 형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도 아니고, 유대인보다는 미국인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 하지만 린드버그 당선 이후 이들 가족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급기야 직장에서 해고되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린드버그를 둘러싼 정치적 변동이 생길 때마다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목숨의 위협을 당한다. 

총 548쪽에 달하는 소설이지만 생각보다 빨리 읽은 건,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워낙 극적이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정치 경험 없이 인기에 힘입어 당선된 지도자가 힘세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굽신거리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등 돌리는 상황이 너무나 미국의 구 정권 같고 한국의 현 정권 같다. 본격적인 정치 소설이 아니라 필립의 성장 소설처럼 읽힌다는 점도 좋았다. 여러 일들을 겪으며 타자를 두려워하고 약자를 혐오하는 마음을 키울 수도 있었던 필립이 두렵고 불편해도 남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걸 배우는 결말도 감동적이고 교훈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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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맥도날드
한은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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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맥도날드 할머니'라는 인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노숙인답지 않게 트렌치코트를 입고 매일 같이 맥도날드에 나타나 영자 신문을 읽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서 방송에도 나왔다고 한다. 나는 그 방송을 보지 못했지만 맥도날드 할머니라는 이름이 워낙 인상적이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봤을 때 읽어보고 싶었다. 아니, 알고 싶었다. 맥도날드 할머니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지금도 종종 회자되고 이렇게 소설까지 나왔는지 궁금했다. 


이 소설은 맥도날드 할머니로 알려진 실존 인물의 생애 중에서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을 토대로 작가가 상상한 내용을 덧붙여서 완성되었다. 공중파 방송국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을 만드는 신중호 PD는 시청자 게시판을 통해 맥도날드 할머니에 관한 제보를 받고 취재에 나선다. 매일 밤 같은 시각에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정동 맥도날드에 나타나 음식을 주문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신문이나 책을 읽다가 새벽이 되면 사라진다는 할머니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할머니를 직접 만나보니 할머니보다 '레이디'라고 부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용하는 어휘나 행동하는 모습이 단정하고 우아했다. 이런 '레이디'가 벌써 7년째 정해진 주거지 없이 거리를 떠돌며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대학도 나왔고 직장 생활도 했다는 걸 보면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아온 게 분명한데 어떤 사연으로 인해 노숙인으로 전락했는지도 궁금했다. 자칫하면 자신도 늙어서 거리를 떠도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고 불안했다. 


한편 자신을 취재하러 온 신중호 PD를 만난 맥도날드 할머니는 자신의 고요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모처럼 대화할 만한 상대가 나타난 것이 반갑고 즐겁다. 맥도날드 할머니로 알려진 1940년생 여성 김윤자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교회에서 만난 어느 집사님이 매달 보내주는 20만 원을 아껴 쓰면서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케이크를 대접하기도 한다. 


밤에는 주로 맥도날드에 있다면 낮에는 일본문화원에서 오래된 일본 영화를 본다. 세상을 떠난 여배우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기도 하고, 과거의 꿈들과 현재를 비교하며 상념에 빠지거나 후회하기도 한다.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파멸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가 떠오르기도 했다. 실존 인물의 삶을 매체로 재현하는 것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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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도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41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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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최근작들을 읽고 조해진 작가의 팬이 된 경우라면 이 책을 읽고 놀랄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가 그랬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이 지금도 막 밝고 경쾌한 느낌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근작들을 읽으면 호의나 희망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는 편인데, 이 소설집을 읽고 나서는 단절이나 절망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이 떠올랐다. 작가님이 이 시절에 이런 분위기를 선호하셨는지 아니면 그 당시 한국 문학이 대체로 이런 분위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책에는 200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저자의 데뷔작 <여자에게 길을 묻다>를 비롯해 일곱 편의 중, 단편이 실려 있다. 2004년부터 2008년 사이에 쓰인 작품들이라서 (2024년인) 지금 읽으면 약간의 시차가 느껴질 수 있다. 폭력에 대한 묘사 면에서 특히 그랬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에는 폭력이 일상의 배경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소설이 몇 편 있다. 남자친구는 여자친구를 때리고, 아버지는 자식들을 때리고, 교사는 학생들을 때리고, 상사는 여직원들을 희롱한다. 다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이의를 제기하는 쪽이 이상해 보인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이런 야만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조해진 작가와 연결되는 작품들도 있다.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청년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강사의 이야기를 그린 표제작 <천사들의 도시>는 프랑스로 입양된 입양아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감독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 소설 <단순한 진심>의 원형 같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결혼 이민을 왔으나 현재는 주방 가구점에 사는 신세로 전락한 고려인 여성이 나오는 단편 <인터뷰>는 폐업한 가구점에서 몰래 생활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여름을 지나가다>와 유사한 모티프를 지닌다. 


데뷔작 <여자에게 길을 묻다>에선 저자가 이 때에도 소통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거인증에 걸린 언어 장애인 여성을 데리고 속초로 향하는 '나'의 이야기를 그린다. '나'는 8년 간 동거한 남자와 최근에 사별했는데,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사회에 나와 매일 같이 노동을 해야 했던 힘든 시기를 말없이 함께 견딘 그를 잃고 막막해 하는 상태다. '나'와 동행하는 거인증 여성은 때로는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은 짐 같고 때로는 존재만으로 의지가 되는 친구 같은데, 어쩌면 이는 목숨이나 인생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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