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창창
설재인 지음 / 밝은세상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몽에 용과 호랑이가 나와서 '용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곽용호는 거창하고 비범한 태몽과는 다르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찌질한 인생을 살고 있다.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 얼굴은 본 적이 없고,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자랐으며, 삼수 끝에 4년제 인서울 대학에 간신히 들어갔지만 몇 년째 취업을 못하고 있다. 이런 용호를 가장 괴롭히는 건, 용호와는 정반대로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인기 드라마 작가인 엄마 곽문영이다.

용호의 엄마 문영은 드라마계의 스타 작가로서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사람들은 문영의 인생에서 유일한 오점은 별 볼 일 없는 딸뿐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어릴 때부터 그런 시선 속에서 자란 용호는 문영을 원수처럼 여긴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처럼 엄마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온 용호는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문영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는 피디 오혜진. 그에 따르면 엄마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데... 

설재인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별빛 창창>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이다. 소설 초반 용호와 문영 모녀의 현재 관계가 묘사되고, 문영이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용호가 친구 장현과 함께 문영이 할 일을 대신하는 상황이 펼쳐질 때만 해도, 나는 용호가 문영의 삶을 살아보면서 문영의 심정을 이해하고 마침내 용서하는 전개가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용호와 장현이 문영의 이름으로 새 드라마의 극본을 집필하는 와중에 '광혜암'이라는 뜻밖의 장소가 등장한다.

용호와 장현이 광혜암을 찾아간 이후에도 반전은 계속된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자세히 밝힐 순 없지만, 반전 덕분에 내가 얼마나 편견에 갇혀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고, 거듭되는 반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실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는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점이 좋았다. 광혜암이 어떤 곳이며, 주로 어떤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소인지에 대한 묘사들도 좋았다. 작가님의 다음 소설에서도 만나고 싶은 공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혜순의 말 - 글쓰기의 경이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김혜순 지음, 황인찬 인터뷰어 / 마음산책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를 좋아한다. 인터뷰를 통해 몰랐던 인물을 알게 되어서, 알았던 인물은 더 깊게 알 수 있어서, 신간이 나올 때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구입해서 읽어보는 편이다. <김혜순의 말>은 김혜순 시인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구입했다. 수많은 한국의 문인들이 김혜순 시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아서 김혜순 시인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고 그의 시집과 책도 읽어 보았지만, 시심이 깊지 않은 나에게는 오랫동안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김혜순 시인의 모든 시집과 책을 읽어보고 싶다, 눈으로 가볍게 훑어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사유하는 경지에 다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1979년 <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40년 이상 시를 써온 김혜순 시인을 후배인 황인찬 시인이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와 시 창작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김혜순 시인의 개인사도 많이 담겨 있어서 전기(傳記)의 느낌도 난다.


서문에서 황인찬 시인은 "김혜순 시의 최종 심급이라 할 수 있을 '여성성'에 대해서는 장을 따로 할애하지 않았다."라고 밝히며 그 이유를 "저 모든 사유의 저변에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여성으로서 쓴다는 것'이라는 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9쪽)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 시인으로 산다는 것과 시를 쓴다는 것만큼이나 여성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과 여성으로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 책에 따르면 여성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말하고 쓰는 것에도 수많은 억압과 차별이 작용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기본적으로 남성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언어로 여성의 체험이나 생각,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상화, 타자화의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그래서 김혜순 시인은 시 쓰기가 아니라 '시하기', '남자-인간-서구 되기'에 대항하는 '여자-짐승-아시아 하기'를 제안한다.


김혜순 시인은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보는 이분법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죽음은 '나'만의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들이 함께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의 죽음뿐 아니라 국가적 재난이나 사고로 인한 죽음 또한 나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남긴다. 김혜순 시인에게 '시하기'는 이러한 고통을 언어로 형상화하려는 시도 너머의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 김혜순 시인의 시와 글을 계속 따라 읽어가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을 먹는 아이
도대체 지음 / 유유히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의 작가 도대체 님의 첫 이야기집이 나왔다. <행복한 고구마>로 화제가 되었던 때부터 도대체 작가님의 팬이었던 나로서는 기쁘고 반가운 한편으로, 그동안 작가님의 주 장르였던 그림 에세이가 아닌 픽션에 도전하셨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본책 구입 전 출판사로부터 받은 샘플북을 펼쳐보니 도대체 작가님 하면 떠오르는 다정하고 애틋한 세계가 픽션으로 구현되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도 있어서 작가님의 그림을 너무나 애정하는 팬으로서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듯한 느낌도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보통의 일상을 보내면서 속으로는 이야기를 지으며 울고 웃는 사람을 상상하며 읽었다. 그렇게 완성된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뭉클했다. 어서 본책으로 읽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을 먹는 아이
도대체 지음 / 유유히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보통의 일상을 보내면서 속으로는 이야기를 지으며 울고 웃는 사람을 상상하며 읽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뭉클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류진 작가의 책으로는 장편 소설 <달까지 가자>를 읽어본 것이 전부다. 소설 자체는 재미도 있고 임파워링도 되었지만, 주식 투자를 하고 있지 않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없어서인지 깊게 몰입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류진 작가의 신작 <연수>를 구입한 건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에서 이 책을 강력 추천했기 때문인데, 읽어보니 과연 추천할 만하고 장류진 작가의 소설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급상승했다. 


책에는 모두 여섯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각각의 소설 속의 상황은 일상적이고 친숙한 데 반해 그동안 한국 문학에서 잘 다뤄지지 않은 것이 많다. 가령 표제작 <연수>에선 운전공포증 때문에 오랫동안 장롱면허였던 '주연'이 동네 맘카페를 통해 소개받은 중년의 여성 운전강사에게 운전연수를 받는 상황을 그린다. 이어지는 <펀펀 페스티벌>에선 대기업 합숙면접을 치르고 있는 지원이 다른 면접자들과 장기자랑을 준비하다가 겪는 일을 그린다. 


<라이딩 크루>는 영상화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소설의 내용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기발하고 유쾌하다. 이 소설은 로드바이크 동호회를 만든 '나'가 라이딩 크루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의 어긋난 욕망과 어리석음을 예리한 묘사와 기상천외한 전개로 '돌려 까는' 솜씨가 대단하다. 작은 방송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는 '선진'의 동계 올림픽 취재기인 <동계올림픽>도 웃기면서 슬프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공모>다. 주인공 '수영'은 신입 사원 시절 회식 때마다 2차로 늘 똑같은 술집에 가는 것이 싫었다. 음식도 맛없고 분위기도 별로인 그 술집을 계속 찾는 건, 술집을 운영하는 여자 사장과 남자 상사의 부정한 관계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내심 짐작한다. 마지막에 실린 <미라와 라라>는 장류진 작가의 소설로서는 드물게 직장이 아니라 대학이 배경이다. 서로 다른 욕망들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면서도 울림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