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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시민들
백민석 지음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책 제목이 <러시아의 시민들>이다. 굳이 '시민들'이라는 단어를 넣은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과연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백민석은 <버스킹!>, <해피 아포칼립스!>, <교양과 광기의 일기>, <헤밍웨이> 등을 쓴 작가다. 사진이 취미인 저자는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만난 사람들의 사진을 부지런히 찍었다. 처음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사진 요청에 잘 응해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다. 러시아 하면 왠지 모르게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가 떠올라서, 러시아 사람들도 근엄하고 보수적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러시아 사람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친절했다. 사진 요청에 하나같이 긍정적으로 답했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도 적극적으로 취했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러시아를 여행하는 내내 러시아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경험을 자주 했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사회주의 국가였으므로 록 음악 같은 저항적인 음악을 듣는 사람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록 음악의 인기가 아주 높았고, 길거리에서도 버스킹을 하는 뮤지션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도시마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보다 훨씬 넓고 잘 정비된 공원이 있었고, 정치인의 동상보다 시인, 소설가 등 예술가의 동상을 훨씬 많이 볼 수 있었다. 영어는 잘 통하지 않았지만, 길을 물어보거나 물어보지 않아도 누구든 환하게 웃으며 저자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동네의 명소를 자랑했다. 아시아 사람이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를 여행할 때 흔히 겪는 인종차별을, 러시아에서는 훨씬 적게 겪었다.
러시아에 직접 가본 적도 없으면서 어쩌다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던 저자는, 어릴 적부터 즐겨 본 할리우드 영화에서 답을 찾았다. 냉전 시대부터 냉전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할리우드에선 빈번하게 러시아를 자유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으로 설정해왔다. 최근에는 이데올로기 대결을 성 대결로 교묘하게 바꿔서, 러시아와 동구권 출신의 여성 스파이들을 적으로 삼는다. "할리우드의 영화는 남성들의 무의식 속에서, 여성은 공포의 대상이고 그래서 억압해야 할 대상이라는 괴물 같은 왜상을 낳는다. 러시아가 바로 그런 할리우드식 과정을 거쳐 20세기의 악몽이 되었다." (240쪽)
책에는 여행 경험이 많은 저자의 여행 팁도 다수 나온다. 저자는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딱히 가보고 싶은 곳이 떠오르지 않으면 일단 무조건 걷는다. 걷다가 높은 지대(예를 들면 산이나 언덕, 타워 등)에 오르면 도시의 전경이 보이고, 계속 보다 보면 어디에 가보고 싶은지가 떠오른다. 성당이나 사원 같은 종교 시설에 가보는 것도 추천한다. 종교적인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나라나 그 도시의 대표적인 종교 시설에 가보면 그곳의 역사와 문화, 전통과 관습 등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처럼 여행지에서 사진을 주로 찍는 사람에게 필요한 팁도 있다. 셔터를 여러 번 누르지 않을 것(상대의 경계심을 높일 수 있으므로), 자세를 필요 이상으로 낮추지 말 것(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등이 기억에 남는다.